鵲巢日記 16年 07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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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7月 17日
맑았다.
오전에 한학촌에 다녀왔다. 커피 배송했다.
가족 모두 데리고 촌에 다녀왔다. 부모님 모시고 외식했다. 겸상이라는 주제로 가벼운 글도 썼지만, 이제는 가족이 모두 모이면 외식 가는 것이 예가 되었다. 집에서 마땅히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없으니 식당이나 카페에 가는 것이 놀이문화가 된 듯하다. 그러니 가게를 하려면 어느 정도는 규모가 있어야 하며 주차장도 있어야 한다. 가족이라 해도 좋아하는 음식은 모두 달라서 식당 고르기도 쉽지는 않다. 회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와 나는 거저 묵묵부답이었고 아이들은 회 먹자고 하니 아버지는 횟집으로 정했다. 횟집은 오늘로 두 번이나 오게 됐다. 전에 왔던 집이었다. 회 먹다가 어머니는 상추와 깻잎이 부족해서 조금 더 부탁했다. 이제는 단골로 이 집을 자주 올 것 같기도 했지만, 주인장은 채솟값이 비싸다는 말만 했다. 비싼 건 둘째 치더라도 더 내주고 값을 매기면 될 것을 그냥 어려운 말씀뿐이다. 솔직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회를 별로 집지도 못했지만, 아주머니 말씀에 더욱 입맛은 뚝 떨어졌다. 다음에 다시 이 집을 다시 찾을지는 모르겠다.
저녁, 역사스페샬, 다큐멘터리다. 역사를 보면 놀라운 사실이 많다. 그간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와는 또 다른 것들이 있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시도한 이래, 우리가 바라보는 역사관도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68년 고구려 멸망, 698년 발해건국,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다. 이때 여진족은 요동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 여진족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 이가 있었다. 나라는 금이며 금 태조는 아골타였다. 아골타는 김 씨며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는 사실을 알 게 됐다. 먼 훗날 후금을 세웠던 누르하치도 김 씨였으며 이를 뒷받침한다. 청 황실의 성 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로 우리말로 김 씨라는 것이다.
금을 세운 금 태조 아골타는 송나라와 대립한다. 중국 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경을 중심으로 정치통치 중심의 기초를 닦는다. 금 태조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1068~1123)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의 핵심인물은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이었다. 완안올출은 김올출로 부른다. 지금도 중국 감숙성에는 김 씨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들은 김올출의 후예라고 했다. 가족공동체 즉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1895~1925)선생은 금 태조는 우리나라 사람이며 평주 인이라 했다. 빼이징 도서관에는 각종 고문 서적이 보관돼 있다. 금 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라는 책을 볼 수 있다. 이는 여진 추장이며 신라사람이라 명백히 썼다. 금사에는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라 했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다고 말한다. 고려전의 신라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하다. 왕건이 이미 고려를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다. 함보는 마지막 남은 왕족으로 혼자서 만주를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이것은 민족 대이동이었다. 청나라 역사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신라 왕실인 김 씨가 수십 세를 이었고 금이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 씨 성을 취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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