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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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다. 두마리 3800원짜리 오징어를 칼금 넣고 데쳐서 데친 쪽파에 감아 먹었다. 바닷가에서 나오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남편의 입맛에도 나쁘지 않은지 여러 점을 먹었다. 우리는 늘 주안상이 저녁 밥상이다. 숙취로 조퇴를 해온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하루 맥주 한 병 소주 한병이 정량인 남편도 맥주는 마시지 않았다. 동네를 갓난 아기들 뒷통수 예쁘게 만드는 베개처럼 둥글게 두른 길가에 산딸기가 조랑조랑 했다. 손만 뻗으면 나무에 음식이 매달려 있다. 이모집 장독간에는 담너머 오디가 너무 많이 떨어져 시멘트 바닥이 새까맣다. 오늘 아침에는 이모와 남편이 밭에서 마늘을 캤다. 땅을 파도 음식이 나오고,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음식이 떨어지고...이 지구란 곳은 커다란 복덩어리다. 속에 먹을 것이 가득 들어 있어서 지구의 배는 늘 부른 것 같다.
오늘은 양피지에 관한 시를 썼다. 양피지란 제목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너무나 1차적인 접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갈겨 보았다. 또 다른 양피지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시제다. 피륙 안에 있는 육기를 걷어 내어야 영원을 얻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되버린 나무들은 또 얼마나 성스러운 종이였던가? 그러고 보면 모두 껍데기를 경멸하지만 껍데기야말로 내면을 지키는 성곽이다. 물고기를 잡아도 뱃속에 있는 것은 다 빼버리고 뼈도 버리고 껍데기와 살만 먹는다. 껍데기는 가라고 하면 안될 것 같다. 차라리 껍데기는 남고 안에 뒤룩뒤룩한 것들은 가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창자나 오장육부가 얼굴이나 잘룩한 엉덩이 선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이 살아 남기 위해 최종적으로 선택한 조건이다. 건강한 생명체는 균형이 잡혀 있다. 균형은 곧 미학이다. 비틀어지고 기우뚱거리고, 찌그러지고 홀쭉한 것은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생에 적합하지 못해 추한 것이다. 뺨이 발그스럼하고 엉덩이가 잘 발달하고 치아가 고른 여자는 건강해서 2세를 생산하기 적합하고, 또 2세를 튼튼하게 양육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모두 생존에 적합한 형상을 사랑하게 된다. 껍데기는 내면의 일부다. 우리는 포장지나 박스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부라는 신체에서 가장 큰 장기에 붙어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사유나 생각들은 우리들의 피지에 그려지고 쓰여진 그림이나 문자들인지도 모른다. 껍데기를 경멸하는 습관을 버려야겠다. 어떤 여자가 싸가지 없고 무식하고 잡년일지라도, 그녀의 껍데기가 아름답다면
그녀는 아름다운 것이다. 왜 그 많은 청춘 남자들은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녀들의 내면은 아름답지 못한가? 그녀들이 건강한 껍데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댓글목록
고현로님의 댓글

안녕하세요, 눈 뜨니 또 좋은 아침입니다. 낮은 덥지만 아침저녁은 서늘해서 일 년 중 가장 근사한 계절 같네요. 껍데기론을 읽다 보니까 안산에 있는 곰장어집이 생각나네요. 껍데기가 벗겨져 산 채로 나오던 곰장어. 숯불 위에서 뱀처럼 꿈틀대다가 죽죠. 혐오스럽다고 모자 같은 뚜껑을 곰장어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덮어주는데... 맛있어요, 입안에서 짠물이 톡 터지는 게. 아오~
그런데 단가가 센 편이라 곰장어만 죽어라 먹다간 집안도 말아먹을 수 있어요. 그럴 땐 곁 안주로 돼지껍질을 시키죠. 구두 뒤축 같이 딱딱하던 것이 불에 타면 탕탕 튀기도 하고 야들야들해서... 맛있어요, 압안을 쫀득하게 해주는 게.
곰장어 껍질은 가죽으로 가공되어 쓰인다더군요. 그러고 보니 살은 썩고 거죽만 남는군요. 잠이 덜 깨서 제가 먼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껍데기를 헹구고 일터로 가야겠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길...
왓칭님의 댓글

고현로 옹 같아요. 이 경호가 한 삼십년은 젊게 느껴짐...횟집에 다니면 도미회가 통째로 나오는데 도미 대가리가 두 눈 부릅뜨고 있으니까 숙녀들이 무섭다고, 어머머, 징그럽다고, 물수건 뒤집어 씌우고 난리도 아닌데 그런 여편네들의 젓가락이 더 날쌔고 용맹스럽죠. 나중엔 트림하고 이쑤시고...좋은 하루 되세요.
고현로님의 댓글

죽어가는 생명체의 눈을 바라보며 살을 취한다는 게 쉽지는 않죠. 잡는 자, 죽이는 자, 먹는 자 어느 누구든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생명을 위해 생명을 제공해주는 객체에 감사함은 느껴야겠다 싶습니다. 그래야 덜 죽이고, 덜 키우고... 갑자기 비가 오네요. 우중충한 게 이런 날씨가 참 좋은 날씨 같네요.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