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3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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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3月 28日
개나리가 완전히 피었다. 곳곳 피었다. 목련도 하얗게 피었고 벚꽃도 어느 거리는 약간 피었다. 대체로 맑았다.
대구에 다녀왔다. 봉덕동에 커피 배송했다. 곽 병원에 들러 지난주 제빙기 수리한 것을 점검했다. 얼음 모양이 완벽한 것을 보며 나왔다. 오후, 삼풍동에 커피 배송 다녀왔다. 조감도에서 책 읽었다. 한시를 읽었다. 매창시집이다. 매창의 시 10수가량 읽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그해가 계유년이었기에, 달리 이름을 지을 것도 없이 계생(癸生)이라고 했다. 기생이 된 뒤에 애칭으로 계낭(癸娘)이라고도 불렀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기록이 없어 기생이거나 관비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께 글을 배웠다.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능했다. 매창은 그녀의 호며 직접 지은 것이다. 그녀가 그리워했던 사람은 시인 ‘유희경’이었지만 그는 예학에 밝은 군자였다.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한 기록은 없어 보인다. 그 뒤 이웃 고을 김제군수로 내려온 묵재(黙齋) 이귀(李貴)가 있었다. 하지만 매창과의 인연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귀의 후배였던 허균이 매창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허균은 매창을 이귀의 정인이라고 표현했다. 매창은 나이 서른여덟에 죽었다. 허균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펐다. 그녀에게 시 두 편을 써 주었다.
매창의 일대기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더 자세히 적지 못해 송구하다. 다음은 매창의 시조 한 수가 유명한데 필사해본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오늘 읽은 매창의 한 시 한 편을 필사해 본다.
東風三月時, 處處落花飛
綠綺相思曲, 江南人未歸
鵲巢解釋
샛바람 불어 삼월이라 곳곳 꽃 떨어지네.
거문고 뜯으며 님 그리워 한 곡조 불러도 강남 간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예지가 보고한다. 어제 들였던 탁자가 좀 거칠다며 얘기했다. 페인트 상사에 들러 붓과 칠을 샀다. 저녁 늦게 밀양에서 상현 군이 왔다. 커피를 차에 실었다. 평상시 같으면 고기 좀 사먹였을 텐데, 탁자 칠을 해야 했다. 조감도 마감보고 칠을 했다. 사포로 문지르고 반투명 페인트로 칠했다. 상현이는 지금껏 함께 일했던 직원이 모레쯤 모두 나간다며 얘기한다. 인사문제로 신경 꽤 쓰는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직원이 이 가게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는 듯했다.
2. 우물
아주 어릴 때였다. 그나마 동네에서는 초가집은 아니었지만, 초가집만큼 허름한 집이었다. 마당이 있었고 변소가 있었다. 그 중간에 우물이 있었다. 비 오면 이 우물은 넘쳐나기도 해서 한동안 시일이 지나야 이 물을 떠서 마신 적 있다. 이 우물은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았다. 사람 두 길이나 세 길 정도 깊이였다. 돌로 쌓아서 돌 사이사이 이끼 낀 것도 보이며 어떤 때는 청개구리가 붙어 있거나 소금쟁이는 아니지만 뭔가 떠 있는 듯 물금 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때가 1970년대였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옛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망이 그래도 좀 나은 곳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었다. 집을 옮기고 나서는 물이 문제였다. 지금은 각 가정에 수돗물이 들어가니 물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집에 쓸 물은 손수 알아서 구해야 했다. 아버지는 마당 한쪽에 자리를 마련해서 물이 나올 만한 곳을 팠다. 내 기억으로는 상당히 깊게 파고들어 갔지만, 물은 잘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좁은 구멍에 땅을 파고 들어갔으며 판 흙은 도르래에 매단 통에 담아 어머니께서 끌어 올렸다. 판 흙을 끌어올리다가 돌이라도 떨어지면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었다. 구멍은 어두컴컴해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을 팠다. 어느덧 축축한 흙이 달려 올려왔지만, 아버지는 모래가 나와야 한다며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물은 지하수라지만 흐름이 좋아야 물맛 또한 좋다. 우리 집 우물을 너무 깊게 파면 옆집 우물이 마르는 예도 있다. 어느 정도의 깊이는 아버지의 감이었다. 예전에는 땅을 파고 돌을 쌓았다지만 이때는 독광이라는 자재를 썼다. 지금은 수돗물이 각 가정에 공급됨으로 이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우물은 메웠다.
나중에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그때 우물 몇 미터 파셨나요?’, 아버지는 ‘약 40미터나 팠지 아마,’ 하고 대답해주셨다. 물이 나오지 않아 계속 파고 들어갔는데 그게 40미터며 1m 20짜리 독광 자재만 서른 개 이상, 경운기 몇 대 분량이라 말씀하셨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동네 어느 곳에 들러도 이 우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친구네 집에 가도 동네 점방店房에 가도 우물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어느 집에 가나 물맛은 각기 달랐다. 그래도 늘 마셨던 우리 집 샘물이 가장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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