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3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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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3月 21日
대체로 맑은 날씨였다.
오전, 대구 곽 병원, 범어동 옷가게, 경산 옥곡점에 커피 배송 다녔다.
점심때 화원에서 커피 일하는 후배 이 씨가 왔다. 언제부터 국밥 한 그릇 하자며 문자 왔었지만, 오늘 식사 한 끼 했다. 국밥이 아니라 본부 앞에 돈가스 집에서 먹었다. 본점에 자리 옮겨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대화하며 차를 마셨다. 후배 이 씨는 직접 볶은 예가체프 한 봉을 가져왔는데 거저 맛보기로 조금 들고 왔다. 마침 오 선생이 있어 그 맛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볶은 거라 하지만, 향은 밋밋하며 맛은 탄 맛이 배여 예가체프라는 것을 못 느끼겠다. 이 씨에게 예가체프를 어떻게 볶아야 하는지를 가볍게 일렀다. 요즘은 신맛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대며 또 아라비카 커피는 드립용으로 볶을 시는 그리 많이 볶지 않으며 특히 예가체프는 마치 덜 볶은 것 같은 느낌 들 정도로 한다. 하지만, 시티는 넘겨야 한다. 그래야 맛은 감칠맛이 나며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군침이 돌며 코끝에서 야릇한 꽃향기 같은 것도 군고구마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볶은 것도 가져와 정하게 내려 맛을 보였다.
오후, 신대부적리에 개업 준비하는 펫 카페(pet-caffe)에 다녀왔다. 조감도 점장을 지냈던 훈도 군이다. 마침 부건이도 함께 있어 얼굴 보았다. 기계 초기화하기 위해 정수기 허 사장도 왔다. 개업 일정을 이달 31일로 잡았다며 얘기한다. 아직 어수선하다.
저녁, 카페 단물고기에 다녀왔다.
책을 보다가 허난설헌의 채련곡을 소개한 글을 읽었다. 더 자세히 알고자 네이버 검색을 통해 자료를 읽었다. 조선 중기 천재 여류시인이었다. 스물일곱 해밖에 살지는 못했으나 그녀가 남긴 시는 동생 허균에 의해 몇몇 작품을 엮어 ‘난설헌집’을 펴냈다. 아마 그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꽤 많은 시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쓴 시는 유언에 따라 모두 태웠으나 동생 허균은 친정에 남겨놓은 시와 그가 암송한 시 몇 편을 엮었다.
허균은 ‘난설헌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에게 일람하게끔 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했다. 중국에서도 이 시집을 발간하기까지 했으며 이는 또 일본까지 건너갔다. 허난설헌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꽤 인기를 끌었다.
잠시 그녀의 시 몇 편을 읽었는데 그녀의 삶을 알고 읽으니 애틋하게 닿는다.
벽해침요해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청란의채란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홍타월상한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벽碧 푸르다. 침浸 담그다, 물에 적시다. 요瑤 아름다운 옥, 구슬 란鸞 난새, 방울 의倚 의지하다. 채彩 무늬, 채색 부芙 부용 용蓉 부용 연꽃 목련 타朶 늘어지다. 타墮 떨어지다.
허난설헌의 부용 꽃이다. 시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이리 붙였다. 그녀의 삶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그 풀이는 일맥 와 닿기도 한다. 그녀는 15세에 안동 김 씨 집안에 시집갔다.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치는 못했다. 그녀가 낳은 자식도 어린 나이에 잃어야 했고 남편과도 부부애가 좋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위 시는 그녀가 지었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는 동생 허균이 누이의 시를 모으고 편집하는 과정에 손을 좀 쓴 게 아닌가 하며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스물일곱이라는 숫자와 시어는 그녀의 삶과 맞아 떨어지는 수다. 그녀의 본명은 초희楚姬다.
38. 도자기
우리 인류는 언제부터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을까? 그 역사는 아마 서기전 만 년에서 육천 년경 사이로 추정한다. 우리나라는 대략 서기 전 육천 년에서 오천 년경사이로 본다. 토기와 도자기는 점력을 갖춘 가소성 있는 질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이것을 불에 구워낸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베트남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일찍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독창적인 데가 있으며 양질의 자기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도자기 공예가)이 일본에 많이 잡혀간 사실이 있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했다. 일본 사람은 우리나라 도공을 왜 납치해 갔을까?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없었다. 음식을 대나무 그릇이나 나뭇잎에 담아 먹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의 자기문화는 일본인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본차이나(bone china)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도자기가 유럽에 건너간 시점은 18세기 이후다. 특히 영국은 중국의 도자기를 모방했는데 이때 소뼈를 갈아서 원료를 사용했다고 하여 본차이나라는 이름이 붙였다. 어쨌거나 도자기는 중국과 우리나라만큼은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술을 받아들인 국가가 도로 명성이 더 나 있음이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잔도 대부분 이들 국가에서 들여온 물품으로 이룬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인근에 도자기 공예가 선생이 있다. 그의 제자 분은 카페에 자주 오시기도 한다. 하루는 선생의 도자기 만드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치 바람을 떠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며 말했다. 그러니까 수주 받은 잔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잔은 여럿이었는데 한 잔씩 떠내는 작업은 마치 기계로 떠낸다고 해도 선생의 손 솜씨와 기술에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얘기다. 그만큼 속도도 빨랐으며 표면의 질감이나 모양의 정확성은 어찌 표현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냥 '휘리릭'하며 떠낸다.
생활자기와 카페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커피는 모두 잔에 담는다. 아무리 맛있는 커피를 내려도 이를 담는 잔이 투박하면 맛은 또 떨어진다.
노자의 말씀에 치빙(馳騁)이라는 말이 나온다. 노자 도덕경 12장과 43장에 나온다. 이를 잠깐 인용하자면, 12장 치빙전렵馳騁畋獵, 영인심발광令人心發狂이라 했다. 이는 사냥이 능수능란하면 사람에게 마음을 미치게 한다. 43장에 천하지지유天下之至柔, 치빙천하지지견馳騁天下之至堅,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견고한 것을 다룬다는 의미다. 물론 치빙馳騁이란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말이겠다. 지유至柔는 지극히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쓰는 행위는 부드러움에 해당한다. 내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하루 일과의 그 딱딱함을 치유治癒한다.
내가 글을 잘 쓰고자 하면 물론 여기서 치빙을 말한다. 속도와 질감과 그 모양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면 아까 모 도자기 선생과 같이 바람을 떠내는 것과 같은 것은 그러니까 늘 밥 먹듯이 써야 하며 읽어야 한다. 읽지 않았는데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러니 먼저 읽어라! 이것은 나의 잔에 담는 행위다. 잔이 그득하면 몸소 깨달은 것이 저절로 흘러넘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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