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2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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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2月 21日
맑았다. 바람 좀 불었다.
조회했다. 어제 단체 손님이었다. 인원으로 보면 스물다섯 명이다. 한 분이 커피 값 계산한다면 최소 15만 원 이상은 나온다. 그러니 커피 값도 부담이 된다. 그러니까 커피는 열 몇 잔 정도 주문하고 빈 잔 있으면 부탁하신 손님 있었다. 계산대에서는 종이 잔을 몇 개 더 드렸다. 배 선생께서 종이 잔으로 우리가 쓰는 테이크아웃용 잔 말고 조금 더 작은 것 있으면 갖췄으면 하는 얘기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떤 카페는 일인일잔一人一盞을 원칙으로 한다며 써 붙여놓은 집도 있다. 여기는 나이 많으신 어른이 많이 오시는 곳이라 특별한 경우는 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커피에 대해서는 더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고 조언을 했다. 바깥은 경기가 아주 좋지가 않아 그 여파를 조금씩 느낀다. 리필을 하더라도 시기적절하게 상황에 맞는 서비스였으면 해서 부탁했다.
오후, 본부에서 쉬었다. 어제 산 꼬다리*가 있었다. 고기를 정리하고 생선 머리만 담아서 옆 집 재활용수집 장에 갔다. 아재는 매일 개죽을 쓴다. 마침 개죽 쓸려고 불을 지피고 있었다. 블록 두 장을 두 이자 형태로 놓고 블록 한 장을 두 블록을 이으며 한 장 더 놓았다. 그 위에 솥을 얹었다. 솥은 양 머리 하나는 족히 넣을 수 있는 원통으로 아래위 굵기가 같다. 이 밑에다가 불을 지핀다. 개죽은 동네 식당에서 얻어온 잡고기(주로 돼지고기)와 원룸단지에서 먹다가 내놓은 통닭이나 기타 음식 찌꺼기 같은 것이 재료다. 솥에 차도록 쏟아붓고는 물 가득 채운다. 내가 가져온 꼬다리 생선 머리도 함께 넣었다. 그러니까 이 속에는 육해공 모두 들어간 셈이다. 아재는 불을 지펴놓고는 이미 퍼 놓은 개죽을 각각 나누어 준다. 개는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닭 뼈다귀는 오도독거리며 씹는 소리가 여성의 구둣발 소리보다 더 명쾌하다. 여기서 오도독거리면 저기서도 오도독거린다. 개 밥그릇은 폭 15cm, 넓이가 20cm, 높이가 15cm 정도 되는데 거의 머리 폭 담가서 훨리적훨리적 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개는 개죽을 주더라도 절대 뜨겁거나 미지근해도 안 된다. 충분히 식었다 싶어도 개는 뜨겁기만 하다. 하루는 충분히 식었다고 해서 내었는데 제 딴에는 뜨거웠던 모양이다. 발로 탁 차서 쏟아놓고는 흙과 돌도 구분되지 않는 개죽 범벅을 핥아 먹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개죽을 먹는 건지 흙탕물을 먹는 건지 구분 안 된다. 그러니 충분히 식었다 싶으면 내야 한다. 인간은 밥에 돌 하나 있어도 밥맛 떨어져 먹지 않는다. 또 뱉어내기 바쁘다. 동물은 자연이다. 자연과 몸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다. 어느덧 다 먹은 건지 꼬리 살랑살랑 흔든다. 그러더니만 땅바닥에 퍼질러 일광욕 멋지게 한다. 에궁! 개 팔자 상팔자라더니 이것 보고 하는 게다.
사동 카페 단물고기 커피 배송 다녀왔다.
사동 조감도에서 책 읽었다. 배 선생께서 저녁을 하셨는지 식사하시라며 얘기한다. 예의상 거절했다만 이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네’하며 주방에 갔다. 호! 김치찜을 아주 맛있게 했다. 김치는 한 포기 그대로며 돼지고기도 한 뭉텅이 정도 되었는데 폭 찐 김치와 돼지고기는 가지런히 쓸어서 한 접시 곱게 내었다. 태윤, 부건, 인열, 그리고 나까지 밥 한 공기 게눈 감추듯 했다. 태윤 군이 한마디 한다. 배 샘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밥하기 아주 바쁩니다. 배 샘 없으면 굶어죽것어요. 그러니 배 샘은 집에서는 하지도 않는다며 많이 드시라고 한 말씀 붙인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가족을 이룬 것에 감사하다. 아까 예의상 거절하고 책만 읽었다면 얼마나 서운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자고로 여자는 내가 한 음식을 다른 가족이 맛있게 먹어줄 때 행복을 느끼는 법이다. 다 먹고 나오는데 배 선생께서 한 말씀 주신다. 반찬이 별로 없어 식사 제대로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아! 아닙니다. 찜 한 접시만도 넉넉한 식사 라요. 최곱니다.
저녁, 본점 일 끝내고 나온 권 씨와 친구 대학원생 최 씨, 경모, 그리고 둘째 찬이와 함께 ‘황제뒷고기’에서 고기를 구웠다. 젊은이들이라 고기 꽤 먹었다. 고기 25인분 먹었다.
각주]
*, 꼬다리는 명태 같은 것이다. 이것을 말린 것을 그렇다고 완전히 말린 것은 아니다. 약간 언 상태며 녹으면 좀 촉촉하기도 하다. 경상도에서는 꼬다리라 얘기한다.
9. 오감도(烏瞰圖)
오감도(烏瞰圖)는 시인詩人 이상(李箱)이 지은 총 15편의 연작시(連作詩)다.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이태준(李泰俊)의 소개로 연재되었다. 이 시가 발표되자 난해한 시로 일대 물의를 일으켜 독자의 비난이 만만치 않아 중단되었다. 오감도는 당시 조감도를 뜻하지 않았나 하는 그러니까 고의로 만든 신조어다. 아니면 70년대도 그랬지만 어쩌면 오타로 인한 우발적 사건 같기도 하다.
이상, 본명은 김해경이며 관향은 강릉이다. 두 살 때 큰아버지 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한 것은 큰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건축과 학생은 12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은 3명이었다. 이상은 그중 한 명이었다.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이상의 마음은 화가나 문학가였다. 그가 카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났던 문인들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김소운,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다방 경영은 여의치 않았다. 다방 마담 노릇을 했던 이상의 연인 ‘금홍’도 권태를 느낀 나머지 바람을 피웠다. 결국, 다방은 그의 간헐적인 각혈처럼 폐점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이후도 이상은 다방을 몇 번 더 열고 또 닫은 바 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카페 역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달리 나는 커피에 어떤 희망을 안고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거저,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뭐 전적으로 어떤 꿈을 위해 매진했던 것은 아니다. 카페를 하다 보니 책을 꽤 좋아했다. 물론 이상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서 먼저 만난 일 있었지만, 그 뒤 대학가 복사 집에서 또 만나기도 했다. 땅바닥에 흘린 어떤 파지를 줍다가 그의 시 ‘시제 2호’를 읽고 나는 무심코 웃었다. 정말이지 그때 느낌은 황당했다. 그의 묘한 매력은 그때부터 끌렸다.
수년이 더 흐르고 카페를 해도 특별히 나의 가치관이 바르게 서지는 않아 가게 이름조차도 이탈리아 말로 지었다. 일에 뜻을 두고 카페를 하고 싶은 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름까지도 함께 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나의 가치관으로 바르게 일하고 싶었다. 나만의 직영점으로 바른 커피를 하고 싶었다. 커피 맛을 바르게 짚고 그 뜻을 생각하다가 오감(五感)이 떠올랐다. 거기다가 글은 평생 취미라 이상의 시를 생각하며 오감도(五感圖)라 상표 등록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었나 보다. 물론 오감도(五感圖)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감도였다. 이참에 나는 조감도(鳥瞰圖)라는 이름으로 바꿔 다시 시도했는데 뜻밖에도 됐다.
그리고 몇 년이 더 흐르고 정말 내가 꿈에 그리던 자리에서 조감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상표는 이름이 좋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성취가 따라야 함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옛사람이나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며 우리 자식들 세대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삶은 노력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운도 따르며 그러다가 파도처럼 내려오는 시기도 있다. 부는 아무것도 아니다. 삶은 무한도전과 갈등과 고뇌와 성취, 또 실패 같은 것으로 반복한다. 끝까지 도전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았으면 싶다.
각주]
‘이상과 모던이 뽀이들’, 현암사, 장석주 지음, 017p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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