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그날을 기억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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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국민하교 3학년때다 1945년8월15일 아침 책가방이 아닌
지게 바작에 마초(말이먹는띠풀)를 짊어지고 학교근처에 다달었는데
운동장은 물론 신작로에도 해방만세 행렬이 넘처났다
이웃에 5학년 형이 해방됐어 지개를 벗어 던지고 만세를 불러
행렬을 주도하는 맨앞에 4학년 단임 이한복 선생님이 선도한다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사람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삼천리를 선창하며 행렬은 흥분으로 들끓어 오르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만세를 외처댄다
매일 아침 학교에 들어서면
고고꾸 신민노지카이(황국신민수칙)를 낭독하고 다이마호시뎅을 참배한후
교실에 들어가든 어린 나로서는 어리둥절 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리강후꾸 (이한복)
그는 전 한산면장 이은구의 아들이다
일본이 內鮮一體를 원만히 이루기위해 조선사람중에 부유하고 덕망이 있는자들을 회유하며
면장으로 추대했으나 이은구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은것을 보면 어쩔수없는 시류에 따랐을분
일본에 충성하지 않은듯하고
그의 아들 이한복이 백두산 뻗어내려를 선창하는것을 보면 비밀히 대한제국의 맥을 이여 온듯하다
일제때 면장을 했데서 친일파로 몰아가는것은 아닌듯하다
어느잡지에서 보면 상해 망명정부에 자금을 제일 많이 제공한 사람은 김성수라한다
총독 치하에서 교육사업을 했다 해서 친일파로 몰고
최재형조부의 유진면장 무재인 아버지의 흥남농업계장 시비는 옳지 않다
해방
시로시마에 8월8일 규슈에8월11일 두알에 원자탄이 투하 됨으로서 일본천황은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에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된듯 하나 그것은 잘못된 이해다
일본천황이 항복하자 마자 2차대전의 연합국이던 미국과 쏘련은
위도38도선을 경계로 그어 놓고 전리품으로 챙긴것이다
6.25사변을 이르킨 김일성 모택동의 중국통일를 보고 감행했으나 그것은 착각이였다
중국은 내전이라서 UN이 간섭발수 없었고
남과북은 1948년 각각의 나라로 UN에 신고 승인을 받았으니 엄연히 두개의 국가이고
누가 먼저 침략했느냐? Un이 나서서 침략국가를 징벌하게 되였으나
38선 월경 사진몇장으로 남이 침략자로 몰려 방관했으나 대전전투로 북의 침략이 판명됨으로
참전16개국이 참전하고 압록가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참전 인해 전술로 1953년7월에 휴전이 된것이다
전리품 주인이 구쏘련에서 중국으로 굴러온데는
그때까지 핵이없든 구쏘련이 손을떼고 중국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북이 중국이 지배하에 들어간것이다
김여정의 미군철수론
한미 군사동맹이 아니라 해도 미군철수는 없다
미군의 주둔이유는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이고 한국만한 상륙전초 기지를 얻으려면
수백조딸라와 수만명의 인명손실이 될것인데 전리품을 버리겠는가?
하여 친북 좌파라 해도 연판장에 날인하는 정신나간 행동은 없

어야 한다
우리는 이만큼의 나라를 수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통일국가로 가는 지름길임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않된다
틈바구니에서 진정한 해방 그것은 실로 형극에 길이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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