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6월 30일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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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내 시력은 1.2, 1.0이였지만 돋보기 안경을 쓰지 않으면
눈앞의 글씨들이 풀어지고 뭉개진다. 귀 먹어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져 가듯이
바탕체를 좋아하는 내 편지의 글씨도 점점 더 크져 간다. 백세 시대라고 하니까 글씨가
24나 30파워 포인트가 될 때까지 나는 이렇게 편지질을 하고 있을 것 같다.
2023년 6월 30일의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쉬고 있다. 일당을 14만원이나 주고 오후
네시나 되면 마치는 공장 급식소에 나갔었는데, 오십살이라는 어떤, 나처럼 일당을
받고 일하는 알바가 무슨 까닭인지 나와 말도 하지 않고,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때면, 나를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대하듯이 앙살 맞게 하고, 그나마 그렇게라도 대답을
해줄 때면 고마움을 느낄 정도로 내가 거는 말에 대답조차 잘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내가
잘못한 것 없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먹어도 이사짐 센타 바구니
가 가득차도록 양파를 썰다, 또 그만큼 하고도 한 바트 정도로 무채를 밀다가 언뜻언뜻
내 시야에 들어오는 그녀의 표정이나 체격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무리한 칼질로
뭉칠데로 뭉친 뒷목과 어깨까 더 당기고 돼지 고기를 덩어리째 올려 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가장 힘들고, 단 한번도 이겨 본 적이 없는 일이 기싸움이다. 그렇게
하면 만만하게 보이고, 존재감이 작아진다는 것을 아는데도, 십분 이상 누군가랑 신경전을
벌이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내 녹초가 되고 무슨 말이라도 내가 먼저 건내버리게 된다.
남편은 내가 화를 내거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금방 다시는 보지
않을듯이 화가 나도 화장실에 한번 다녀오면 방광보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단히 화를 내려고 하면 할수록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웃긴 일도 하나도 없는데
웃음이 나와서 오래 인상을 쓰고 있지 못한다. 나는 매사에 그렇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부딪히거나 가벼운 말다툼이 있은 후에도 내 마음에서 일었던 분노와 감정들은 끓는 물에
집어 넣은 얼음처럼 녹아서 사라졌는데 상대방의 감정은 여전히 냉동실에 들어 앉아 있는
것 같아 나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만다. 그래서 결국 내가 택하는 것은 도망이다. 그 집
일을 그만두고, 그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 나를 옮기는 것이다. 그곳의 근무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불편한 관계 앞에서는 대책이 없다. 이렇게 자주 옮겨 다니니 일을 소개해주는 가사원
소장님도 지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삭의 우물을 떠올리며 나를 위로하곤 한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이삭의 이웃이나 적들이 그 우물을 두고 다투거나 그 우물을 뺏으려고
했는데 이삭은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우물을 주실 것을 믿고 순순히 그 우물들을 내어
주신 성경속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 여기 때려치우고 나면 더 좋은 식당으로
가게 해주실거야. 그런 위안을 스스로 만들며 다른 곳으로 옮겨 보면 한 삼일이나 일주일은
또 번번히 역시 하나님은 나의 편이구나 하며 감사한 마음이 되곤한다. 사막에서 우물
하나를 파는데 몇 일이 걸리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탐을 낼만한 우물을 파는데 나는
한 일주일, 길면 한 보름 정도면 족하다. 어느 식당을 가나, 어디를 가나 열심히
파놓은 우물을 버리게 만드는 사람이 꼭 한명은 나타나는데, 그는 사장일 때도 있고, 동료일
때도 있고, 정말 어이가 없을려면 사장의 딸이나 아들인 경우마저 있다. 지금 나에게 그 쌤통
맞은 인상으로 울렁증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를 피해 출근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곳의
점장인 영양사로 부터 제발 이틀만 도와 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내 심신의 미약함을
눈치 채지 못한 사장이나 동료들은 늘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데. 나는 그 누구보다 먼저 그런
나자신을 미리 겁내며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정식 직원으로 일해달라는 그들의 부탁을 거절
하기 일쑤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사람이 무섭다. 사람들이 가장 작고 하찮케 여기는 사람도
나는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무섭다. 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가져도 반감을 가져도 부담스럽고
편하게 대해지지를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가지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거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언짢아 보이거나 표정이 어두우면 종일 신경이 쓰이고
내가 그 사람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되뇌이며 돌아보게 된다. 사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것
보다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어떤 모임에 나가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맛 있는 것을 나눠 먹고 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역시 사람과 있을 때보다 고양이랑 있을 때가 더 행복하고
자유롭다. 내가 이런 나 자신을 이렇지 않게 바꾸려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내년의
오늘에는 내가 열심히 파놓은 우물을 양보하지 않는 이삭으로 변할수 있을까? 그냥 병에 가까운
모순을 지니고 그것을 반복하는 일이 내 삶인 것일까? 영양사의 부탁으로 토요일 그곳에 가면
기계에 가죽을 씌워 놓은 것 같은 그 차갑고 딱딱한 여자를 또 마주칠 것이다. 나는 또 머릿속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절은 친절 입니다. 하던 법정 스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불친절은 폭력이다
불친절한 사람은 소시오 패스다. 초파일날 연등을 밝힐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표정을 밝히고
목소리를 밝히고 마음을 밝히는 것이 부처님을 맞이하는 일이다, 등등, 나를 힘들게 하는 불친절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한숨을 쉬고,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불친절한 사람들을 보면 더 그녀들의 횡포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게 되고, 그녀들의 불친절은
내 마음의 평화를 착취하는 악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절은 친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사는 반면 교사라는 생각도 하며, 나는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쓰며 그를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말아야지 하며, 내가 뜻하는 대로 된다해도 나는 그러는데
왜 저들을 저럴까하며 억울한 심정까지 더하게 하는 굳은 결심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년의 오늘에는 아무도 함부로 나를 지나다닐수 있는 투명 인간이 아니라 나를 보면 스스로들
둘러가고 피해갈 수 있는 불투명인간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들을 불편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침범하거나 지나갈 때 불편을 감수할수 있는 밀도와 질감이 분명한 불투명인간을
내년으 오늘에는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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