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음악이 연주 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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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깊은 잠을 잤다. 가랫톳이 서서 나에게 몸을 좀 존중하는 습관을 길러보라고 충고 했다.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일을 하러 가면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밤새 비가 내린 뒷날
아침의 풀벌레와 새 소리가 맑은 물처럼 귀에서 마음으로 흘러든다. 범사에 감사하라든가, 늘 감사하며 살라는 말이 귀에 못이 되어 박혔다. 회색 몸빼 같은 것을 입은 내 또래를 넘은 여자들이손에 염주 같은 것을 알알이 돌리며 얻은 식상한 결론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음에도,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는 매사가 많아진다. 오래 전에는 바이올린을 켜주거나 피아노를 쳐주거나 기타를 쳐주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식당이나 까페들이 있었다. 기름을 넣으러 온 트럭처럼 허겁지겁 배만 채우던 식사 시간에 리듬이 생기고 선율이 생기고, 오래 지긋이 고기나 야채를 씹는 중에도, 오래 지긋이 시선이 음악을 따라 바깥 풍경속으로 스며들곤 했었다. 그냥 뚝딱 차려낸 한끼의 식사같은
아침이 와도 고마운데,하나님은 단 하루, 단 한번의 아침에도, 저 물리지 않는 음악을 걸러지 않으신다. 행여나 같은 음악에 질릴까봐 계절을 따라 악사를 바꾸고 음악도 바꾸신다. 그럴땐 허겁지겁 배가 고팠다가도,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를 듣는 아이처럼 허기를 꿀꺽 삼키며
숟가락과 젓가락의 속도를 음악에 맞추게 된다. 밥 먹고 눈만 뜨면 살아왔는데 이제는 후닥닥, 허겁지겁 살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은가? 음악은 흘러가는 모든 시간을 아름다운 선율로 세공한다. 슬픔도 기쁨도 낙담도,격분도 절망도, 죽음 마저도 음악 속으로 흡입 되면 기름지고 풍성한
울림이 된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백화점 코너를 돌거나 , 사람들의 어깨를 부딪히며
시장 바닥을 걷고, 하다못해 쇠수세미를 들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씻을지라도 나는 음악이라는
투명하고 빛이 부서져 흐르는 길과 공간에 흡수 된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도, 술렁이는
대숲과 공터의 잡초들마저 왈츠가 흐르면 왈츠를 맞추고, 람바다가 흐르면 람바다를, 단조로운
찬송가가 흐르면 찬송가를 맞추어 흔들린다. 음악은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음악의 영토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다. 그 영토에 있는 모든 존재는 음악을 따라 흐르고 멈추고, 달리게 된다. 어렵게 깊은 잠을 자고 잠이 깬 이른 아침, 어디론가 급히 가야한다는 내안의 소음에 휘둘리면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이 저 풀벌레 소리를 베이스로 깔고 흐르는 새들의 소리다. 음악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발견하고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창세기에는 태초에 음악이
있었다는 말이 빠져 있다.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면 계곡물의 음악이 있고, 강의 음악을 지나 바다에 이르면 물결을 뜯고 파도를 연주하는 바다와 달의 음악이 있다. 어디를 가도 있는 이 음악들이 들릴 때 우리의 청력은 정상이다. 바다에 갔는데 파도 소리가 마음 속으로 밀려들지 않고,
깊은 산속에 갔는데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가슴 속에 스며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귀가 먹은 것이다. 그 소리를 빼고 이 세상에 남는 소리를 우리는 소음이라고 부른다. 음악을 빼고 남은 소리들은 지옥의 소리다. 지옥의 소리를 듣는 청력만 남았다면, 차라리 귀가 다 먹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남을 흉보며 속닥속닥 하는 소리, 자동차의 경적 소리,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싸우는 소리, 기계가 치덕치덕 무엇인가 사람의 욕망이 담긴 물질들을 찍어내는 소리,
마음 속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미움과 의심과 질투의 소리...물론 음악이라는 필터가 이 소음들을 음악으로 구원할수도 있다. 소리가 소리의 죄를 회개할수만 있다면 말이다.
비가 연일 내려서 그런지 이맘때 쯤이면 극성이여야할 매미 소리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많이 빠져버린 것처럼 약하다. 매미 소리를, 새벽 닭소리를 소음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우리들의 귀에 병이 생긴 증상 같다. 압력밥솥의 압력추 돌아가는 소리가 맹렬하게 나지 않는다면 압력밥솥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거나, 뚜껑위의 압력추가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맹렬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이 지구가 제대로 밥을 짓고 있구나. 불을 낮추고 압력추 소리가 잦아들다, 추를 젖혀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을 때 밥솥을 열면 찰지고 고슬고슬하니 밥이 잘 되어 있는 것처럼, 저 매매 소리 잦아들면 가을이 오고 오곡백과가 맛나게 익어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소음이라니, 정말 못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 온 세상이
쫄딱 망해도 나만 살면 되고,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소시오패스들이다. 새벽닭이 울면
무사히 건강하게, 너도 나도 잘 살아서 무사히 아침을 맞게 된 것이다. 오로지 사람들만 잘 살아서 알람을 켜고 억지로 잠을 깨는 아침이 아니라, 닭공장의 철장속에 아직 갇히지 않은 닭들이
땅을 밟고 흙을 파헤치고, 횃대 위에 가끔 훼를 치며 날아 올라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심지어
풀과 나무와 강물과 잠든 바람마저도 깨는 그런 아침을 맞게 되는 것이다.
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보고들이 전세계 도처에서 잇따르고 있다. 그것은 이제 꽃을 보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예고이고, 꽃을 이어 열매를 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벌이 내 살을 쏘면
살충제를 들고 와서 그 벌통의 벌을 다 몰살 시키는 일에도 아무 꺼리낌이 없는 인간들이,그 벌이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을 눈치 챌 날이 언제일까?
사흘들이 잘리고 때려치우는 나를 자학 했으나, 제발 사람들아, 그기 때려 치우고 나오라.
내 할말 한 번하고 잘려보라. 왜 이리 사는 일이 힘드냐고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모두가 일을
하러 나가고 텅빈 한낮의 길을 홀로 걸어보라. 먹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답게
먹고 살아야 한다. 인간이 짐승처럼 먹고 살고, 인간이 기계처럼 먹고 살아서는, 먹고 사는게 아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설계된 행성에서 인간만, 아니 인간 모두가 아니라 나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니까 그 행성이 암에 걸리는 것이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내가 바로 증식하고 전이 되면 지구 전체를 죽이는 암세포인 것이다. 행성에게 좋은 것, 행성을 살리는 것, 내가 다 죽이는 것이다. 인간은 없어도 이 생태계가 살지만(없으면 없을수록 고마운 존재가 우리들이다) 벌과 나비가 없으면 지구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생명체가 거의 없을 것이다. 개미 한 마리도, 땅을 파 먹고 사는 미생물 하나의 존재도 인간만 못한 것이 없다. 그들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먹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누군가의 죽은 사체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과연 이기는 것인지, 내가 이 싸움에서 살아 남는 것이 과연 살아남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니라면 손을 털어야 하고, 내가 지금껏 자유라고 믿어왔던 것이 과연 자유인지,
두려움을 잘라내지 못하는 카멜레온은 죽는다. 카멜레온이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치는 그 방향으로 우리도 가야한다. 우리는 잘라서 버려야 할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꼬리를 잘라야 할텐데 머리를 잘라버리는 카멜레온들이 우리 인지도 모른다.
그 키가 크고 주름들이 큰 늙은 여자의 심통을 내가 더 견딜수 없었던 것에 대해 나를
몰아세우지 말자. 일당 십만원 받자고, 글로버를 낀 혓바닥에 온 종일 두들겨 맞을수는
없는 것이다. 그 눈은 유리 파편으로 동공을 에워싼 것 같아, 나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나는 베인다. 그 여자는 자신의 혀와 눈에 찔리고 상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죽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혀와 눈을 기른 가슴에 찔려 사망했으므로. 왜 내가 더 강하지 않고 약한 것에 대해 내가 악한 것을 반성하듯이 해야 하는가?
그 폭언과 살기어린 눈빛에 다치지 않고 그러려니 하게 되면, 나의 귀는 이 아침의
풀벌레 소리와 새 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다칠 줄 알고, 아플 줄 알고
멍들 줄 알고, 잘릴 줄 아는, 살아있는 자의 약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면 새벽을 맞는 나팔꽃처럼 귀가 활짝 꽃 필줄 알고, 추하고 사악한 것을
보면 뙤약볕을 맞는 달맞이꽃처럼 귀를 다물 줄 아는, 이 우주를 헤아릴수 없는 겹겹의 동심원으로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선율의 한 가닥에 내 영혼을 이어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그곳을
그만두고 그곳에서 잘리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 우주의 선율에 이어지고, 그 선율을 또
누군가의 영혼이랑 이어가는 일이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가, 자신이 그럴 위치도 아닌데
나에게 화를 내며 무슨 말인가를 하고, 또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여자 또한 부탁을 하지 않고
화를 내며 하명을 내리는 듯 했다. 왜 그들이 나에게 그래도 된다고 판단을 했는지가 궁금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떠올린다.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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