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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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배홍배
나는 그림 속의 그와 매일 이야기를 한다 대화의 내용과 방향과 시간은 언제나 그의 결정 나보다 빠르게 늙어가는 그에게 색깔을 덧칠하는 게 나의 일이다 그의 열정과 맥박을 재고 밝아지는 캔버스 안에서 모닥불과 툭툭 이야기를 하면 횃불을 들고 불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외로웠다 내가 집에 없는 밤엔 그는 홀로 거리를 걸었다 담 벽에 세로로 찍힌 발자국, 창문을 열어놓고 귀를 막고 별들과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별과 나란히 걸어갔다 발자국은 지나온 길과 짧은 토론을 하고 구부러진 풍경들과 낯선 대화를 하고 버려진 안경과 입을 맞추고 어둠을 피해 지하실로 숨었다 눈동자 안에 아무렇게나 지던 별 하나가 천천히 떠오를 때
*배홍배 시집, 『라르게토를 위하여』 (시산맥, 2022)
얼띤感想文
초저녁이었다. 여기 금호강변 둘레길 걷는다. 천체의 아름다움은 여름보다 겨울이 낫다. 겨울철을 상징하듯 일백과 태백(개밥바라기) 그리고 달이 한 줄에 서 있다. 희미한 듯 카시오페이아자리도 보인다. 그 아래 한 인간이 걷다가 뛰다가 종일 보낸 하루를 곱씹고 있었다. 춥다. 춥지만 걸으니까 시원하다. 내 나이 오십 하고도 셋이다. 벌써, 아직도 청춘 아닌 청춘 같은 마음이지만 몸은 늙어 더는 늙고 싶지 않아서 이리 걷는 나를 보고 있었다. 글은 늘 보아야 한다. 글은 늘 써야 한다. 마음 수양에는 이것만큼 좋은 것은 없기에 그렇다. 그리고 때를 가려 아니 그때를 가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만 잘해도 남은 삶은 유복할 것이다.
시인 배홍배의 자화상을 읽는다. 수많은 벽돌로 이룬 집 한 채다. 저 벽돌 하나하나는 시인께서 제공해 주었다. 다 뜯은 벽돌로 나는 무엇을 지을 것인가? 내게 열정과 맥박은 있는 것인가? 이제는 어느 한 풍경을 접고 창문이 바라보는 쪽으로 고운 빛깔 두른 천막을 펼치고 싶다.
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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