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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의 물을 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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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왓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975회 작성일 16-06-1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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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의 물을 갈았다. 네마리의 칼라 테라피 중 두 마리가 죽고 초록색, 분홍색, 두 마리가 남았다. 몇 일 동안 밥 주는 것을 잊었는데 그가 잘 챙겨 준 것 같다. 고양이 밥도 그렇다. 늘 시작하는 것은 내쪽이고, 수습은 그의 몫이다. 물갈이도 거의 3주를 넘길 뻔 했다.  내 마음을 비우고 맑은 것으로 새로 채운 것 같다. 나는 희망이 자꾸 익사 해서 거의 썩은 물만 고인 어항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난 어쩌다 어항에 물을 갈아 채우는 것 같은 소소하고 가벼운 희망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던가? 내 침대에서는 다시 헤르타 뮐러의 소설이 내 눈꺼풀과 함께 접히고 있다

난 그녀의 리듬감 넘치는, 비슷한 리듬으로 브리테니카 백과 사전 만큼이라도 쓰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은 문체가 좋다. 장문의 시를 읽는 것 같다. 마당의 방울 토마토는 벌써 반이나 출근길에 퇴근길에 따먹었다. 여태 상모꾼 모자밑에 열두개는 더 달고 남았어야 할것 같은 수국이 어디가 병들었던지 꽃 한 조각 피우지 않더니 손가락으로 몇 송이 뜯어낸듯 궁핍한 꽃을 피우고 있다. 올해는 육월 중순이 지났는데 감꽃 떨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실은 밤새 지붕 위로 퉁퉁 떨어졌는데 깊이 잠들어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의 산 감 솎으러 다니느라 우리집에 동거하는 나무에 무관심 했는지도 모른다. 난 가끔 우리가 온 몸, 숨 구멍 하나 하나가 햇빛이나 빗줄기에 연결 된 마리오네뜨 인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숨구멍에 연결 된 투명한 햇살과 빗줄기가 많이 끊기면 끊길 수록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걸음은 쳐지고, 생각은 지치고, 틈만 나면 구석진 자리에 풀썩풀썩 꼬꾸라지는 것이다. 왜 나는 마음을 닫고 내게 주어진 세계를 만났던가? 햇빛을, 빗줄기를 끊고, 춤을 잃고, 음악을 잃고, 해질 무렵의 노을과 허밍을 잃고..

 

오늘은 삼계탕 집...복날이 다가와 더 많은 새끼닭들이 다녀간 뚝배기에 눌러붙은 닭살을 쇠수세미로 밀어야 한다. 이전에 나를 지탱했던 희망이 이제는 왜 유치한가?  한 세상 어질고 더럽히다 가는 사람도 많은데 닦고 치우고 맑히고 가는 내 삶이 얼마나 좋으냐고, 앞치마 입고 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집 뒤에 있는 식당에 앞치마를 입고 출근하고 퇴근하던 그 시절을 나는 잊었는가? 햇빛을 보며 일할 수 있고, 배가 고프다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앞에 고개 숙이고 허리 숙이고 온 몸을 숙이며 살 수 있어 너무 감사했던 그날을 잊었는가? 자식에게 그 하찮은 일을 자랑스러워 해야 했던 그 날을 생각하면, 나는 다시 끊어졌던 줄을 회복한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일어 설 수 있다.

 

칼라 테라피는 생명력이 강한 물고기라 어지간한 조건에선 살아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어지간한 조건도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마리가 죽었고, 두 마리가 남았다. 내 안에도 살아 남은 두 마리가 있어, 폐기 되지 않는 어항처럼 나도 새 물을 받고 다시 기포를 뿜어 올려야 겠다.

 

시를 탐하는 자에게 시는 오지 않는다

집착하는 사랑에게서 사랑이 떠나듯

내가 시를 탐하여 시는 숨막혀 하며 나를 떠났다

왜 시가 욕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까?

친구였고, 애인이였고, 아이였고,

아주 가끔은 내게 숨을 주는 신이 아니였던가?

내가 그의 목을 졸라서 그는 나를 떠난 것 같다

봄날 화분에 그냥 꽂아 둔 방울 토마토 세 그루와 함께 살고

감나무 밑에 감춰 둔 해바라기 씨앗과 함께 살고

종일 뚝배기를 닦아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손바닥에

놓이는 일당과 함께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였던가?

코기리 발처럼 덩어리진 마늘 뿌리의 진흙을 털며

나는 이 세계의 알갱이를 눈에도 넣고 입에도 귀에도

신발속에도 앞섶의 속옷 속에도 넣으며 아이처럼

웃지 않았던가?  그 웃음을 잃어, 지루한 것을,

무거운 것을, 유머 감각 없이 심각한 것을 싫어하는

시가 나를 떠난 것이다.  아홉시 이십삼분.

열시가 되면, 물 간 어항속의 칼라 테라피처럼

나는 종일 식기세척기의 구정물이 쏟아지는

나의 세계에서 가장 신이 난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

시는 하느님처럼 아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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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심월님의 댓글

profile_image 심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가 절창이네요. 시가 당신을 떠난게 아니어요. 당신이 시를 버린거지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다시 얻제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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