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갈아 끼우는 아침 > 편지·일기

오랫만에 법정 스님을 뵈었다. 나처럼 식당 다니느라 깊은 산속까지 다녀 올 수 없는 중생들을 위해 스님의 거처를 책속에 옮겨 놓고 가신 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나처럼 중심이 약한 사람은 사람을 골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간밤에는 술을 마시고 배를 채우느라 머릿말만 읽다가 던져 두었던 것을 아침에 한 두어 페이지 읽었는데, 깊은 계곡물에 세수라도 한 사람처럼 정신이 확 깬다. 어떤 이의 정신속에는 수렁이 있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불쾌한 진흙 수렁이 있어 무심코 딪은 발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내 정신과 마음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어떤 까닭인지 집이며, 차, 세속적인 성공과 허영으로 부터 마음이 떠나 있을 때 여유와 홀연한 충만감에 이르곤 했는데 채우기에 급급한 벗들을 만나면 나또한 무엇인가에 급급해지고 채우자고 마음을 먹으면 까마득한 나의 허허로움을 마주보며 당황스럽게 된다. 그들이 무슨 악한이고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돌아보고 스스로를 깨우지 않는 어리석음이 서로 만난 탓이라 여겨진다. 때론 중심이 약하다는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스님처럼 중심이 선한, 혹은 밝은, 또 혹은 청정한 사람을 만나면 금새 동화가 되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 사람과 자신과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남과도 진정한 대화에 이르기 힘들다. 그의 의견과 주장과 행동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의견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항상 남과의 관계에 머무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영향력을 믿고 의지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전에 노래방을 다니며 번 돈으로 낮에는 백화점에 가서 수십만원짜리 옷과 액세서리를 쓸어 담듯이 사는 여자와 이웃하여 살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녀의 직업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번개탄을 피우고 죽는 어머니 보다 위대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라도 팔아야 했다면 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팔지 않는게 뭐가 있다고 하필이면 그녀가 가진 전부 일 수도 있는 몸을 팔았다고 돌을 던지겠는가? 오히려 그녀와 같은 직업을 경멸하면서 단지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서 남편의 눈을 속이고 애인을 가지고, 스스로는 무슨 숭고한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일반 주부들과 여성들이 더 자신의 저고리가 아닌 옷을 입고 사는 것 같다. 나는 밤이면 어머니가 어디서 어떻게 벌어 온 돈인지도 모르고, 새벽 네시나 되어야 귀가한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는 그녀의 중학생 딸을 보며 겉 껍질은 모래 범벅이 되어도 겉껍질 저 안쪽의 속은 새 하얀 배추가 생각난다. 그럼에도 간밤에 받은 스트레스를 과소비로 푸는 그녀를 따라 백화점을 가면 가도 모르게 그녀가 카드로 긁은 옷가지 위에 내 옷을 슬쩍 얹고 만다. 만원짜리 옷을 사면 만원어치만 노동하면 되지만 십만원짜리를 사면 십만원어치 노예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나를 더 그럴싸한 존재로 만들것 같은 기대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 소유물이 나를 소유한다는 말이 진리인것 같다. 적게 가지고 적게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길인데 세상은 지금 소유의 수렁이다. 나의 뛰어난 동화 능력은 이 수렁을 자신도 모르게 가진 자들을 만나면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발휘가 된다. 그러니 세속의 친구들을 멀리하는 것은 내가 이 수렁들을 멀리하는 것과 같다. 그녀들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 수렁에 발을 딪지 않고 그녀들의 친구가 될만큼 심지가 강한 사람이 못되기 때문이다. 집과 차와 옷과 맛나는 음식과 근사한 여행지와 자식과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들 틈에서 나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지켜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모든 있어야 마땅한 것 같은 것들이 내게 없을지라도 스님처럼 없음으로 인해 더 당당하고, 가능하다면 더 덜어놓기 위해 정진할 비범함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근 시간이 되었다. 너무 오래 사용해 닳아버린 와이퍼를 갈아 끼우듯 너무 오래 사용한 나의 마음도 갈아 끼운다. 냉면집에서 섞음 냉면과 물 냉면을 주문하고서 뜨거운 육수를 달라고 해도 웃으면서 갖다주기, 손님이 내가 권하는 자리에 앉지 않을지라도 짜증스러워하지 않기, 내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오늘 내 하루치의 목숨은 그곳에서 사용해야 하니까 내 목숨이 불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향해 품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그 에너지의 발원지인 나를 먼저 치고 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있나 뭐가 있나 무엇으로 내게 인연된 사람을 복 되게 하랴?  따뜻하게 대하고 환하게 대하고, 진정으로 대하자. 베풀것이 마음 뿐이라면 마음이라도 온전히 베푸는 하루가 되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