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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부를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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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보리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23회 작성일 17-01-2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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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이라고 적힌 다이어리 표지가 떨어졌다.

11월달에 산 다이어리에, 달마다 새로 그려서 사용한 장부가

새벽마다 배달할 곳의 동호수를 들여다 보느라 얼마나

시달렸던지, 날개 한 쪽이 떨어져 나갔다.

컴퓨터라면 척척박사인 큰 아이에게 부탁을 하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매끈하고 쫙쫙 빠진 장부를 만들 수 있겠지만

나는 한 줄 한 줄 줄을 긋고 장부를 만들며 나의 마음을 장부속에 가둔다.

처음 장부를 그릴 때 두 세 페이지를 잡아먹던 고객들이

석달 사이에 한 페이지면 여백까지 생긴다. 무려 백만원 가까운 매출이 줄었다.

모바일 작업을 하지 않아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배달을 했던 고객들

영수증이 그대로 나와 그것을 찢어 넣은 비닐 봉지가 제법 불룩했다.

어쨌거나 나는 새해 다이어리 표지가 닳아서 떨어질만큼 열심히 석달을 살았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장부를 그릴 것이다.

몇 권의 일기장을 간직하듯 몇 권의 장부를 간직하며 내가 살았던 시간을

간직 할 것이다.

얼마 전 선희가 주었던 작고 예쁜 다이어리를, 그날 술 한 잔 하며 누군가에게

선물로 줘버리고, 아쉽던 차에 화장품 하는 고객 한 분이 꽃분홍색 표지의

예쁜 다이어리 한권을 주고 갔다. 그런 예쁜 장부를 들고 다니면 장사도 더

잘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자꾸만 화장품 영업을 하러 가자고 나를 조른다.

170원짜리 파는 것 보다 17만원짜리 파는 것이 몸 편하고, 마음 편하다고

무엇인가를 한 봉지 살 때마다 보챈다. 그런데 나는 별로 화장품을 팔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석달 동안 정든, 내가  점빵 나무라 부르는 나무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의 점빵 나무는 그렇게 많은 잎을 달고 있으면

곧 내가 장사할 자리에 응달이 질까봐 그가 쥐고 있던 숱한 잎들을 서둘러 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붕어빵 할머니도 떠나고 없는데 그 점빵 나무라도 나의 서까래와 기둥 노릇을

해주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점빵 나무의 벤치 때문에 햇빛을 쬐러 어르신들이 모여들고

등원과 하원 시간에 엄마들은 아이와 짐을 안고 잠시 팔을 쉬었다 가고,  나 또한 앉을 자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서툴러 종일이 빠듯하고 바쁘지만, 곧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생길 것이다. 얼굴의 껍데기에 돈을 바르라고 권하는 것보다, 몸에 좋은 것 드시라고

하는 것이 덜 어려울 것 같다. 모자를 늘 쓰고 있어 잊고 지냈는데 일을 시작할 때 짧은 단발이였던

예쁜 갈색 머리가 지금은 테리우스처럼 길어졌다. 흰머리가 밥이 쌀밥인지 보리밥인지 모르게 만든다.

예쁜 옷을 입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내 마음에 없는 것을

남에게 권하지 못한다. 화장품이 피부를 좋게 만든다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기 싫다.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면 피부는 좋아지는 것이지, 밖에서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밖으로 베여나는 것이다. 말의 털에다 기름 바른다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잘 먹이고 잘 재우면

털이 반짝이듯, 사람도 그런 것 같다. 그런 사기를 치기 싫어졌다.

 

나는 점점 170원 짜리 장사가 좋다.

돈 귀한 줄 알고,

170원에도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웃고, 착하게 구는 내가 좋다.

점점 그러다보면 10원에도 1원에도 마침내는 그냥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웃고, 마음 쓰는 내가 될 것 같다.

내 고객 할머니 중에는 일주일에 한번 1550원짜리 우유를 8층까지

배달 시키며 번번히 미안해 하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어떤 날은 귀찮은 마음도 들지만 몸이 불편하신 어른에게 그냥도 갖다

드려야 할 우유를 돈을 1550원이나 받고 갖다 드릴 수 있다니

참 좋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늘 붕어빵 할머니와 나, 둘 중 한사람이 없으면 운동하러 나올 맛이 나지 않는다는

87세의 얼굴이 한참 부풀다 찬 곳에 둔 호빵처럼 둥글둥글 쭈글쭈글 귀엽게 생기신

할머니는 나의 가장 좋은 말벗이다.  나는 그 할머니의 자분자분 흐르는 햇볕애

잘 말린 수건같은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때론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햇빛 속에서 소르륵 잠들고 싶을 때도 있다.

 

자야겠다. 목요일에는 4일치의 배달을 해야한다.,

내일은 시누가 어디 간다고 일마치고 시누의 소주방을 봐주러 가야한다.

요구르트 이천원치도 사주지 않는

나에게 정 없는 시누이지만 내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나보다.

뭐든, 내가 도움이 되면 도움을 주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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