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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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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보리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4회 작성일 17-01-27 08:47

본문

이대로 시에 대한 나의 모진 짝사랑이 끝나주길 바라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스물 한살, 아니 스물 두살?

잘 모르겠다. 나는 그때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기 전이였거나

아이를 가진 후였을 것이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사보에 내가 보낸,

행갈이 예쁘게 한 잡문이 실리고,

1990년도 돈으로 이십만원을 상금으로 받았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그길로 집을 뛰쳐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 둘을 낳고, 이혼을 하고,

손님상에서 술을 마시고, 얌전하게 앉아 말벗도 되어주던

한정식 집에 다녔던 기억과,

일을 하다 말고 햇살 좋은 마당에 배를 뒤집고 누운

커다란 바퀴벌레에 꼬인 설탕 알갱이처럼 작은 개미들의 행렬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여사장에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과

월드컵 때문에 붉은 인파들이 짝짝짝 짝짝 박수를 치며

밤이 늦도록 거리를 활보하던 기억과

글동네라는 문예 사이트에 넋두리를 올리면서

내가 시를 쓰고 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그에게 빠져들던 기억이 모두 한 시절의 것인 것 같다.

 

시는 내게 신이였고, 남편이였고 연인이였고, 내게 전부였기 때문에

나였기도 했다.

한 때는 나도 좀 쓰나하는 착각으로 열에 들뜨서 잠못 이루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손가락을 못 쓰게 된 피아니스트 같다.

 

시 외에 무슨 의미가 있어 이 삶을 계속 살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기를 쓴다.

일기를 쓰고

시를 쓸 수 없는 암에 걸린 나의 생존을 유지하려고

나 스스로를 무던히도 설득 시키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시를 쓰는 일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것은 사투일 뿐 사랑이 아니다.

어거지로 갖다 바른 말들이 여기 저기서 좋은 시로

대접 받는 것을 많이 본다.

 

시를 어디서 배운 적은 없으나

지금 쓰고 있는 일기와 시는 태생이 다른 글이다.

형광등과 촛불, 횃불, 아궁이 불의 차이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시는 외로운 글이다.

시가 나를 찾아와 단번에 쓰이던 순간을 기억하면

그것은 누군가 나라는 성냥갑 안에서

쓰러져 누운 성냥 개비들 중 하나를 일으켜 세워

불을 확 켜는 순간 같다.

그 순간 나는 필기 도구였을 뿐

쓰는 이가 따로 있는 느낌이 든 적도 있었다.

가끔 그는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서 너 번을 만나 술을 마시고,

삼년을 짝사랑하는 편지를 썼던 선생님이 있었다.

이상한 일은 나의 생각이 항상 그와 함께 했었다는 것이다.

비가 와서 마당에 내어놓은 난초에 빗방울이

퉁퉁 튕기면, 어쩐지 청순한 그의 눈매를 떠올렸고,

창밖에 흘러가는 강물을 보아도

피고 지고 매달리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보아도

그는 항상 내 곁에 함께 했었다.

그는 내 마음이라는 공간에 발을 헛디딘듯

내 마음 안을 빠져 나갈 길을 잃은 듯도 했다.

그렇게

이년, 삼년이 흘러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술에 만취한 그를 집 가까운 일본식 술집에서 만났다.

키가 호리호리  하고 갸름한,

내가 늘 청순이라고 기억하는 그모습 그대로,

그는 오뎅 국물이 졸아드는 가스버너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그가 추울까봐 먹지도 않는 오뎅 국물에

생수를 더 붓고, 가스버너의 불을 올렸다.

그렇게 졸다가, 바람부는 거리로 나와 내가 두르고 나온

목도리를 그의 목에 칭칭 감아서 택시를 태워드렸다.

그리고는

"나는 오뎅 입니다"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는 그는 내 마음안에서 길을 찾았던지,

내 마음이라는 곳을 빠져 나갔다.

 

지금은 시가 그래 주길 바란다.

나는 그의 도구가 되어줄 기력이 없다.

시가 내 마음안에 쓰러져 누운,

머리에 발화물질을 바르고 누운 시의 성냥개비를

내 가슴에 그어도 불을 일으킬 수 없다.

나는 눅눅해졌다.

지쳤다.

삼년만에 만나 오뎅탕이 끓는 가스버너 앞에서

한참을 졸다 나를 떠나듯,

그냥, 시야, 그렇게 나를 떠나라.

 

나는 이미 죽었나보다.

시를 떠나보내고 남은 나는

시를 쓰느라 지었던 죄를 갚으며 살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부족하고 소홀했다.

밥 앉히고 청소할 시간에 시를 짓느라

여기 저기 내 마음을 어질러 놓았다.

이대로, 가라, 그냥,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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