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석, 잡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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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213회 작성일 17-02-15 10:28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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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 2006)
얼음의 온도 / 허연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사람 한 명씩 있다
너무 쉽게 잊기엔 아쉽고
다시 다가가기엔 멀어져 있는 그런 사람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너에게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당신 곁에 앉아 아주 곱게
꿈을 지키고 싶다
수정처럼 울음을 닦아
그대의 깊은 어둠을 밝히고 싶다
이슬이 되어 / 박종숙
나로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안개꽃 / 복효근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 박완호
사랑한다고 썼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의 부재를 긍정하는 일, 물 위를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에 얹힌 눈길에 잠깐 머뭇거리는
수면의 굴곡을 감지하는 일, 누구도 읽어내지 못한 너의 잠언을 해독하는 일,
네가 밟아온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헤아리는 일,
찡그린 이마에 파묻힌 번민의 무게를 재는 일,
눈금을 읽던 저울까지를 버리는 일, 또는
바짝 말라 있던 꼭지에 물기가 감돌게 하는,
숨어 있던 꽃봉오리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창백하던 하늘을 한순간 홍조로 물들이는,
캄캄한 숲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새의 문장을 끄집어내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 [시인정신] 2011년 여름호
단풍나무 둥치의 주름진 손아귀를 펴보니
몸통 잘려진 비명 자국이 갈피마다 고인, 그
터진 고랑이며 싯푸른 물이 보였다
지난날, 내민 손 덥석 잡았던
뜨건 손에 덴 단발마의 흉터, 덮을수록 덧나
화농 속에서 단풍이 익고 낙엽이 졌던, 그
손
맞댄 손바닥에 꽃물 터져 색이 날아다녔던,
길을 잡고도 수없이 넘어지고 돌부리에 채인 그,
출구를 잃는 소용돌이 끝자락이
오늘, 희미한 초서체로 안부를 묻는다
몸 깊이 허공을 짚어가던
손을 놓고 툭,
떨어진
여백 한 점
깊다
- 덥석, 잡았던 / 장순금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 2006)
얼음의 온도 / 허연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사람 한 명씩 있다
너무 쉽게 잊기엔 아쉽고
다시 다가가기엔 멀어져 있는 그런 사람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너에게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당신 곁에 앉아 아주 곱게
꿈을 지키고 싶다
수정처럼 울음을 닦아
그대의 깊은 어둠을 밝히고 싶다
이슬이 되어 / 박종숙
나로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안개꽃 / 복효근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 박완호
사랑한다고 썼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의 부재를 긍정하는 일, 물 위를 나는 잠자리의 날갯짓에 얹힌 눈길에 잠깐 머뭇거리는
수면의 굴곡을 감지하는 일, 누구도 읽어내지 못한 너의 잠언을 해독하는 일,
네가 밟아온 발자국들을 남김없이 헤아리는 일,
찡그린 이마에 파묻힌 번민의 무게를 재는 일,
눈금을 읽던 저울까지를 버리는 일, 또는
바짝 말라 있던 꼭지에 물기가 감돌게 하는,
숨어 있던 꽃봉오리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창백하던 하늘을 한순간 홍조로 물들이는,
캄캄한 숲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새의 문장을 끄집어내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 [시인정신] 2011년 여름호
단풍나무 둥치의 주름진 손아귀를 펴보니
몸통 잘려진 비명 자국이 갈피마다 고인, 그
터진 고랑이며 싯푸른 물이 보였다
지난날, 내민 손 덥석 잡았던
뜨건 손에 덴 단발마의 흉터, 덮을수록 덧나
화농 속에서 단풍이 익고 낙엽이 졌던, 그
손
맞댄 손바닥에 꽃물 터져 색이 날아다녔던,
길을 잡고도 수없이 넘어지고 돌부리에 채인 그,
출구를 잃는 소용돌이 끝자락이
오늘, 희미한 초서체로 안부를 묻는다
몸 깊이 허공을 짚어가던
손을 놓고 툭,
떨어진
여백 한 점
깊다
- 덥석, 잡았던 / 장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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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물풀님의 댓글
물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헛된 바람 / 구영주
어느 이름모를 거리에서 예고 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없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