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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가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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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유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85회 작성일 17-05-0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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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데 남편의 차가 시이모 집으로 향했다. 부모가 이혼을 해서 친가와 왕래가 없었던 남편은

외가와 외사촌과 외삼촌과 이모가 외자를 뺀 모든 그들보다 친하다. 이모는 시어머니처럼 사흘들이 우리에게

반찬이나 맛있는 것들을 주시는데, 오늘도 가오리 무침이나 갓 담은 열무 김치를 한 통 주시려나 하고 갔는데

남편이 두 팔로 받혀 들고 내려 오는 것은 김장 할 때나 쓰는 욕조 보다 더 큰 빨간 고무 통이였다.

"이것 뭐하게?"

가끔 시골 노인들이 가마솥을 구해 달라, 고물 오토바이를 구해 달라 해서 그런 것들을 구해다 주고 값을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또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의 짐작은 어긋났다.

"반신욕 할거야"

사실 순간 온수기를 사용하는,

그래도 좌변기를 앉히고 세면대를 붙이고, 타이루를 붙여놓아 겨우 화장실의 모양새를 흉내낸 우리 화장실에서

욕조를 찾는 건 밥도 겨우 차린 밥상에서 에피타이저를 찾는 것과 같다.

나는 종일 운전을 하느라 지친 그가 소금에 절인 거대한 배추처럼 고무통 속에 들어 앉아 있으려나 상상을 했을

뿐, 나와 그 통이 무슨 연관이 생길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화장실 불은 와 꺼놨노? 또 형광등 나갔나? 이놈의 집구석은..."

마감 계산을 하느라고, 이리 저리 돈을 맞추고 있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간 화장실은 영화 속에 나오는, 무수리나 비천한 신분의 여자가 성은을 입기 전 목간을 하던

곳으로 변해 있었다.

뜨거운 물이, 그와 내가 함께 앉으면 유레카를 외칠 만큼 받혀 있었고, 두껑을 덮은 변기

위에는 서랍속에 돌아다니던 캔들이 예닐곱개 켜져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난 뭐든 경상도 버전으로 남편에게 말을 한다.

그러나 장미꽃잎을 띄우진 않았지만,  작년 김장 때 간 절은 배추로 가득 찼던 고무통이 근사한 반신욕 욕조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사람이 앉으면 한 사람은 무릎을 물속에 담글 수 없는 고무통 속에 앉아

오랫만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때까지 오랫만에 침묵하며 가끔은 내가 한 동안

눈을 감고, 또 가끔은 한동안 그가 눈을 감고, 싸구려 캔들이 풍기는 달큰한 양초 향기에 취했다.

내가 물이 아깝다며, 이 물로 헹구면 되겠다고 벌떡 일어서서 갑자기 락스를 풀어 변기와 화장실 바닥을

닦으면서 산통을 다 깨긴 했지만, 우린 모처럼 그야말로 한 통속에서 한통속이 되었다.

 

만약에 우리집 화장실에 다른 집들처럼 당연히 욕조가 달려 있었다면, 우린 그 당연함에 길들여져

죽을 때나 되면 한다는, 않하던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우리가 추억이라고 부르는

장면들을 되돌려 보아도, 뭔가 구색이 갖춰지고 번듯한 조건을 갖춘 순간들이 아니였던 적이 더

많았을 것 같다. 급식이 다 되는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에게 3교시에 도시락을 까먹다가 들켜서

도시락 들고 복도에서 벌 서던 챙피함이 추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급식소에서는 급식소의

추억이 있겠지만 그 또한 급식소 규율에 완전히 부합 될 때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추억이 될 것이다.

매직기나 전기 고데기가 없을 때 연탄불에 젓가락을 달궈서 인순이 머리카락처럼 머리를 지졌던

기억, 여학생들이 멋을 내는 것이 허용 되지 않았던 시절, 핀컬 파마를 했다가 반성문을 썼던 기억,

단체 관람 외에 영화 관람이 금지 되어 있던 시절, 이대근과 이미숙이 나왔던 뽕이나 무릎과 무릎

사이, 애마 부인 같은 성인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함께 가지 않았다고 어떤 친구가 고자질 해서

귀를 잡고 토끼뜀으로 운동장을 열바퀴 돌면서도, "조선 팔도 다 돌아도 너 만한 계집은 없어"

하며 이대근의 대사를 흉내내며 키들대던 기억, 대체로 추억이 되는 기억들이 가진 조건들은

가난하고 부족하고 허용보다 금지에 가까웠다.

 

내가 일하는 아파트의 경비실 화장실에 가면 누군가 버린 우산들이 한 무더기 있다.

대부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아이들의 우산들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비오는 날이면 우산 장수가 있었다.

조금 비바람이 세차게 불면 마릴린 몬로의 치마처럼 뒤집혀지던 비닐 우산을 팔던

우산 장수가 있었다. 그땐 학교에 촌지를 들고 와서 소풍 때면 선생님 도시락을

싸오던 부잣집 엄마의 딸이나 아들이 아니면 손잡이가 달린 방수천 우산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였다. 그래서 어쩌다 살대 부러진 우산이라도 생기면 행여

그것을 잊어 먹을까봐 수업 시간에도 복도에 있는 우산 꽂이에 눈길이 가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우산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우산은 아이들에게 그저 비를 피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맑은 날에도 괜히 입고 있다가 잠들기도 했던 비옷은 비를 피하는 옷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처럼 관계하고 의미를 공유하는 사물이였다.

소중함이란 풍요 속에서 참으로 잃기 쉬운 소중한 감정이다.

지금 시대의 병은 빈곤이 아니라 풍요라는 생각마저 든다.

절대빈곤이라는 말은 있어도 절대풍요라는 말은 없다.

가져도 가져도 모자란다.

없어서 모자라다고 느끼는 것은 건강한 반응이지만

가졌는데 자꾸 모자란다고 느끼는 것은 병든 반응이다.

지금 대부분은 밥을 먹고 산다.

따뜻한 방에서 자고, 죽겠다 어쩌겠다 해도

여행을 다니고, 남들 입는 어디가서, 나이값, 녹슨 패이스,를 입고,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외식도 한다.

그런데도 모두들 못살겠다는 아우성 뿐이다.

 

욕조가 있으면 참 좋겠다.

뭐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남편이 모처럼 갖는 바램이다.

욕조가 있는 집보다 없는 집 찾기가 훨씬 더 어려운 세상에

남편이 갖는 모처럼의 소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무슨 차가 있으면 좋겠다

애인이 있으면 좋겠다

집이 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욕조가 있으면 참 좋겠다니,

 

욕조가 없어서 나는 다행이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면 먹고 자기 바빠

서로 얼굴 마주 볼 시간도 없는데

대여섯살 때 한 여름이면 엄마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호스를 길게 빼어 물어 받아 주면 팬티만 입고 몇 시간이고

물장구 치며 놀던 그 김장 다라이에 중년의 부부가 들어 앉아

신혼부부 코스프레를 벌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욕조가 있는 집은 거의 대부분이라도

그 흔해 빠진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욕조를 가진 사람은 가질 수가 없다.

대부분의 집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마른 호수처럼 화장실 잡동사니나 담고 있는 그 욕조가 없어,

김장 김치 담는 고무 다라이 가득, 한 쪽이 일어서면

물이 쑥 줄어드는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가난이 때로는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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