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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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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62회 작성일 17-08-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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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두시까지인 식당을 마치고, 다섯시에 일을 들어 가려면 두 시간이 남아 마트에서 장을 봐서
아이들 집으로 왔다.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 장 본 봉지 두 개가 들어가지 않아 양쪽 핸들 손잡이에 달고 왔다. 일당
사만원을 받아서 삼만원을 썼다. 그 집에선 열 다섯 통의 양배추를 썰었다. 손바닥 가장자리에 물집이 생기고 칼 자루를 잡았던
오른 손 검지에도 물집이 잡혔다. 피순대에 들어가는 양배추라 잘게 썰었다. 내게 물집은 닭똥집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다.
병원이나 미용실에서 쓰는 위생 장갑이 너덜거리는 것처럼 내 손바닥에서 너덜거리는 피부를 느낄 뿐이다. 날마다 음식을 
만드는 곳이 나의 직장이라도 나는 요리가 늘지 않는다. 순두부 찌개, 김치 찌개, 부추전, 오뎅 볶음, 또 뭐가 있나? 일주일에
두어 번 겨우 들리는 집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메뉴는 거의 변함이 없다. 가끔 두부를 굽기도 하고, 버섯 나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다음에 들릴 때 어김 없이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있곤 한다. 내 형편 없는 요리 솜씨 때문에 득을 보는 일도 있다. 남편은
내가 만드는 음식을 먹지 못해서 자신이 요리를 해먹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종일 구정물에 손 넣는 내가 집에 까지 와서 물에
손 담그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자신이 한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간에, 내가 음식을 그의 입맛에 잘 맞게 하면서 음식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많이 미안할 것이다. 때론 시집 식구들이 놀러오거나 친구들이 놀러와서 양념통이 어디 있는지, 무엇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헤매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는 느낌이 들면 나는 그의 입 짧음을 핑계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제대로 할 줄도 모른다. 뭐 하나 장만 하려면 냉장고 부터 씽크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다. 내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내어도 남편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 온다.
"또 무슨 재작이고? 제발 좀 어질지 마라"
그런 내가 아이들에게 오면 집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된다. 다행히 식성이 까다롭지 않고, 날 닮아 식탐이 많은 두 녀석은
어릴 때부터 나를 요신(요리의 신)이라 부르며 내가 해 주는 음식을 잘 먹는다. 난 아이들에게 오면 갑자기 자신감에 넘쳐서 도마
두드리는 소리를 타다닥 내며 식당 주방에서 배운 칼 솜씨를 자랑하며 척척척 음식을 해내는 체 한다. 기껏 한다고 해봐야 맨날
다 되어 있는 양념을 사서 하는 순두부 찌개에서 큰 맘 먹고 해봐야 잡채 정도 인데, 양은 또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작게 한다고 하는 것이
일주일 분은 족히 넘는다. 아! 참 미역국도 있다. 미역국은 쇠고기를 넣으면 반 쯤 만 버리게 되고, 조개나 새우를 넣으면 거의 삼분의 일을 버리게 되는데 나는 꾸준히도 미역국을 끓인다. 집에 젖 내야하는 산모라도 있는 것처럼 많이도 끓인다. 그래도 미역국은 끓이기 쉽기 때문에 건망증 심한 나는 아직 반이나 남은 건미역들을 두고도 번번히 장을 볼 때 다시 건미역을 산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와서 다 버려야 할 음식이라도 해 놓고 가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팔자 고친 엄마의 죄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다. 김치 찌개를 끓이면 돼지 고기를 한 덩이 뜨서 아이들에게 간을 보인다. 아이들이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면 나는 너무 행복해진다. 제 자리란 이런 곳일까?
녹슨 나사못이 원래 박혀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행복하다, 행복하다고, 나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행복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 뭔가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못하다. 녹슨 나사못이 새 나무나 벽을 뚫고 겨우 박혀 있는 것 같은 불편함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십분 거리에 있는 오골계 집을 갈 시간이다.  닭 간과 똥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비린 내를 맡으며, 나는 편함도 불편함도 잊을 것이다. 아무래도 순두부가 할인가로 세개 천원이라, 몽땅 다 끓여버린 순두부 찌개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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