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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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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02회 작성일 17-09-1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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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 오늘은 좀 그랬다.

시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인 번민을 버리는 방법이 된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는 것을 보니

나는 그간 치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삼년이 넘도록 목욕 한 번 하지 않던 봉지 부인을 씻었다.

봉지 부인은 치마속에 버리기도 쓰기도 어중간한 비닐 봉지들을 넣어두는 인형인데

비닐 봉지를 임신하고 만삭이였던 봉지 부인의 배가 홀쭉하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호시탐탐 오셔서 우리집을 편집하는 시어머니께서 버리라고 했지만

난 단추눈 두개가 멀쩡하고 진주 귀걸이가 칠이 벗겨지지 않았는데 그녀를 버린다는 것이

어쩐지 미안해서 다시 그녀에게 몇 백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숙제들을 맡기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고호의 방을 닮은데가 있는 부엌방에 시멘트 블록 두개를 다리 삼아 만든

대리석 탁자 위에 놓아 둔 해바라기 조화를 마루에 옮겨 놓고, 마루에 붓글씨로 시를 필사 할 때

쓰려고, 잘 읽지 않는 책들을 쌓아 올려 대리석을 얹어 만든 나의 책상을 치워 버리셨다.

우리 주인집 아저씨가 전직 돌공장 사장님이라 우리집 주변에는 커다란 대리석들이 지천이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비우면 우리집을 편집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시는 것 같다. 부엌방에 펴 두었던 양탄자는

몸을 바싹 접고 비닐 봉지 속에 들어가 있고, 침대방에 있는 아그리파 상은 재수 없다며 언제 치워버릴까

기회만 엿보고 계실 것이다. 난 어머니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창문에 또 뭔가를 붙이기 전에

샤브샤브 식당에서 얻어 온 영자 신문으로 만든 기름 종이들을 아무렇게나 붙여버렸다. 어머니는 무슨 신문을

붙이느냐고 펄쩍 뛰셨지만, 내 눈엔 나도 읽지 못하는 그 영자 신문들이 빈티지 따윈 염두에도 없지만

빈티지를 면할수 없는 우리집을 그나마 그런 느낌의 일관성을 주는 것 같았다. 오랫만에 주둥이를 묶어둔지

일년이 넘은 커피콩을 핸드밀로 갈아서 여과지에 솔솔 내리고는 키피 끓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나도 어머니처럼

작년 겨울 열대어들이 다 얼어죽은 어항에  다시 물고기들을 불러모을 궁리를 호시탐탐 하고 있다. 비쩍 말라서

털이 다 빠진 못난이와 감나무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노랑이가 내 인기척을 따라 다니며 하도 울어사서

무엇을 줄까 냉장고를 뒤져보니 풀떼기 밖에 없어서 남편이 우리집 앞 저수지에서 잡아 놓은 민물 물고기들을

냉동실에서 꺼내어 비늘을 치고 내장을 뜯어내고 남은 밥알들을 넣고 끓였다. 그래도 생선인데 녀석들이 서로

학학대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 찬물을 부어가며 열심히 식혀 주었는데 녀석들은 뜨거워서 그런지 맛이 없어

그런지 선뜻 주둥이를 대지 않고 있다가 결국 뜨거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빌어먹을, 내 요리는

고양이들 조차 외면을 한다.

어쨌거나 대목밑이라 일이 없어 나는 종일 시를 붙들고 씨름했다.

이제 시를 함부로 완결하지 말아야 겠다.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시를 발표하다 신춘문예 당선이 되셨던 분이 하셨던 충고를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 때는 그냥 누가 줄줄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것처럼 시를 쓰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와 오래 오래 놀아야 한다는 말을 이제사 이해한다.

시를 쓰다 보면 가지를 치듯 자꾸 시상이 번식하는데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오늘 결국 나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 씨름한 시를 두고 두고 완성하지 않고,

고양이가 잡은 쥐를 가지고 놀듯이 해볼 작정이다.

시 이외에 다른 생각들은 일체 잡념이 된 하루였다.

요즘 어디 어디에 당선 되었다는 시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경향도 이제사 읽어 내는 것 같다.

시를 버린 시들이 뽑히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호흡을 배워야겠다.

내 삶도 그런 호흡을 해야겠다.

 

가끔 마당에 나가 자재더미 위에 떨어진 홍시를 쪼개 먹으며 출렁이는 깻잎 저수지를 내려다 본다.

초릿대 끝으로 모든 근심 걱정을 모아버리듯,

한 점에 집중하며 살자.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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