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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빌 언덕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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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734회 작성일 17-11-14 21:29

본문

눈사람 친구로부터 밥을 먹자고 전화가 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두 사람의 메뉴는 아쿠찜으로 통일 되었다.
좀 잘 한다하는 찜집을 찾아 다니며 그녀의 양껏 밥 두공기와
매운 맛으로 주문한 찜을 먹고 막걸리를 두 세병 마신다.
나는 대부분 전날 술을 마신 상태라 술이 깨면 매운 것이 당긴다.
오랫만에 만난 눈사람 친구는 겨울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더 눈사람다운 몸매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살이 좀
빠졌다고 빈말을 해주었다. 나는 대중 목욕탕을 잘 가지 않아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 옆에 서면
쪄도 될 여분이 내게 많이 있는 것 같아 여유가 생기곤 한다.
무슨 까닭인지 그녀는 나를 늘 이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 추켜
세워주는데, 나는 내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잠깐은 내가 그렇기도 한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죄책감의 대부분은 학습 되어진 것이거나 어떤
필요에 의해 조작되고 강화 되고 세뇌 되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고,
그녀는 대부분 나의 의견에 대해서 그러하듯 내 말을 옳다고 말해
주었다. 대낮부터 소주 두 병을 마시고, 그녀가 식후에 꼭 한 대씩
권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선수도 관중도 아무도 없는 공설 운동장에
출입을 금하는 테이프를 젖히고 들어갔다. 선수도 관중도 아무도 없는
공설 운동장은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달이나 화성 같았다.
관중석에 앉아 담배를 피울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괜히 눈에 띄였다가
관리인에게 쫓겨날까봐 불량 청소년들처럼 으슥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만나는 진짜 목적인듯, 그녀가 라이타를 끼워놓은 담뱃갑을
열었다. 가을 햇살이 눈부셨다. 바람은 밥 때 된 선수들처럼 기운 없이
텅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난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고, 틈만 나면
피워왔던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체 했다. 그냥 눈사람 친구와 내가
만나면 의례적으로 해야할 일 중 하나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의 차를 사주기 위해 오백만원 대출을 받았다고 하자 날 더러
능력 있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아직 명의를 넘기지 않는 코딱지만한 아파트를
담보 잡혀서 받은 것이라고 하자 그녀가 자기도 대출 좀 내 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러지 뭐, 했다. 그러자 그녀가 "야! 비빌 언덕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으론 더 이상 돈이 없어서 아들에게
명의 변경을 해주지 못한 아파트로 빚을 내는 일은 없어야 겠다고 결심했는데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난 여지껏 혼자 낑낑대며 살아도 빚이 진 적은 거의 없었다.
오만원 십만원을 빌려 일주일만에 갚아주곤 하는게 고작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비빌 언덕이라고 나를 말하자, 정말 그 믿음을 실망 시킬까봐 걱정스러워졌다.
비빌 언덕 같은 건 내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해도 나는 비비지를 못했다.
요즘은 내가 점점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오빠는 외제차를 긁었다고 엄마와 조카 둘이 한달 먹고 살 생활비를 한 푼도
집에 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대출을 내는 김에 백만원을 더 내어 밀린 의료
보험비를 갚고, 오십만원을 부쳐 주었다. 형제자매라곤 오빠와 나 뿐이니
엄마가 나 아니면 어디에 말을 할 것인가? 비빌 언덕이 되기에 나는 너무나 부실한
인간이다. 그래, 이 지구에 한 오십년 살면 누구라도 비빌 언덕 하나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비빌 언덕이 되려면 확실히 되어야 하는데
나는 대출 낸 돈을 갚으라고 했다. 힘을 겨루고 승부를 내는 일도, 남이 힘을
겨루고 승부를 내는 일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일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개천 예술제 가장 행렬을 하거나, 크고 작은 행사들로 이 곳 공설 운동장의
관중석에 앉은 적이 많았지만 난 대체로 잘 열광하지 못하고, 경기나 경쟁과
상관 없는 것들에 눈이 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 구름, 뭉개구름, 아무 구름도
없는 작정한듯 파란 하늘, 파란 하늘이 운동장인 새들,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기에
나를 이루는 것들의 밀도는 너무나 허망했다. 나는 겉돌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소풍을 가도 운동회를 해도 학예회를 해도 객석도 관중석도 아닌 그렇다고 무대나
경기장은 더더욱 아닌 어떤 지점에 김이나 안개처럼 서리고 떠돌았다. 그것은 아이들
의 엄마로서 살면서도 마찬가지 였다. 나는 항상 낮은 울타리의 위치에 있었지
벽도, 문도, 방도 되어주지 못했다. 기대고 비비기에 나는 너무나 겉에 속해 있었다.
이가 성치 못해 음식을 잘 씹을 수 없어 치매가 빨리 올 것을 걱정하는 눈사람 친구에게
나는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을까? 엄마도 아빠도 다 돌아가시고 피붙이라곤 아이
둘 뿐이라고 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나에게 비빌 언덕이 생긴 것 같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나쁜 친구인지 왠지 모를 부담감으로 담배 연기를 더 멀리 훅 내뱉았다.

비빌 언덕이 되고 싶다.
병든 여자에게 빠져 이 핑계 저 핑계 대어가며 엄마와 조카들의 생활비를
빼돌리는 오빠로 인해 아이들 세뱃돈까지 헐어쓰는 엄마가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눈사람 친구에게도, 
그런데 나를 이루는 알갱이들은 흙이 아니라 공기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내가 사랑했던 공기 생각을 했다.
실체가 없거나 실체를 모르는 것들을 나는 사랑하기도 하고
그 실체 없음에도 상처 입고, 그 없는 실체를 의지하며 살기도 했다.
내가 비빌 언덕이였던 사람들, 그저 마음을 비비고, 시선을 비벼대던,
실제 할 수 있는 그 어떤 언덕보다 견고했던, 사랑을 생각했다.

가을은 모처럼 읍내로 나가거나, 가까운 중국이라도 다녀 오려는 노인들처럼
들떠서 울긋불긋 차려 입은 것 같다. 모두들 쓸쓸함을 느낀다는 가을이
내게는 왜 이렇게 흥청망청 들떠 보이는 것일까? 나도 가을처럼 내 가을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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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공덕수님의 댓글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 합니다. 맞아요. 무어든 아름다운거예요. 무어든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무어든 아름답게 그릴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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