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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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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98회 작성일 19-01-18 13:53

본문

친구의 카톡 사진에 주렁주렁한 감들은 아직 떪은 행색으로 매달려 있다.

애인과 지리산 부근으로 단풍 구경을 갔다 단풍을 찍느라 찍은 사진에

감나무도 끼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 감나무의 감들은 홍시의 세월을

지나 꽂감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가난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 선물을 놓아 둘 마음의 평수가 없다. 그 흔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그 흔한 아파트와 그 흔한 아파트 입주자들이 나보다 더 가진 것만 부러워 한다.

아침에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은, 가난이 내 마당에 심어준 감나무다. 먹이 앞에서

동물들은 길들여진 짐승처럼 기분 좋게 모여든다. 적당히 쫄깃쫄깃 해졌을

홍시를 쪼아먹는 까치들의 목소리는 찰지고 윤기가 흐른다. 아침마다 나는

감나무가 벌이는 이벤트로 인해 잠을 깨는 것이다. 가끔 까마귀가 잠을 깨우는

아침에는 내 마음의 흉흉한 자리들을 돌아보며 하루를 경계하기도 한다.

빗물에 불다 불다 썩어가는 합판들과 폐 자재 더미와 우리 부부가 밤마다 비운

시름을 가득 담은 술병들과 여름 한 철 한 바탕 열매 맺고 간 방울 토마토와

청양 고추들이 폐가처럼 남겨 놓은 스치로폴 화단에 고양이 발톱 자국만 무성한

달세 없는 천만원짜리 빈가의 마당에서 감나무는 망해가는 서커스단의 마술사처럼

돋보인다. 봄이 와서 옷 소매도 없는 맨 가지에서 카드처럼 푸른 잎사귀를 봅아내고

새들을 불러내고, 산호와 호박 같은 열매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객석으로 던져주면

관객은 깨물어 먹기까지 하는 것이다. 애지중지란 얼마나 애틋한 단어인지,

그 두꺼운 국어 사전이 표지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다. 많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단 하나 뿐이거나 극소수라서 그 많은 것들 전부보다 마음을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감나무 농장의 그 많은 감나무 사이를 빠져 나와, 단풍이 불붙은 산길의 그 많은

나무들 사이를 빠져 나와, 머리 위에 날을 벼른 달을 놓고, 내 고단한 퇴근길 마당에서

기다려 주는 감나무와 나 사이에 시계추의 이편과 저편처럼 애지와 중지가 있는 것이다.

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책이라도 한 줄 읽으려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앉은 나에게

까무룩하게 졸음이 밀려들면, 지붕 위로 퉁퉁 땜감을 던지며 잠을 깨워주고,

살려고 여기 저기 부딪히고 깨져서 돌아 와 모서리를 돋우고 강팍해져서, 캔 맥주를 들고

안주도 없이, 송홧 가루 말라붙은 춧담에 앉으면 발밑에 툭툭 감꽃을 던져 주는 것이다.

그 밤, 가장 질기고 긴 달빛에 꿰어 감꽃 목걸이를 걸어주듯, 내가 지나 온 감꽃처럼

순하고 두툼한 시간들을 돌이켜 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외출하고, 혼자서 덜덜 떨며

목욕을 시키고, 파우더 분을 발라주던 첫 아이의 살냄새는 얼마나 순온 했던가?

탁자 위에 빼 놓은 반지를 금은방에 내다 팔아 동해 여행을 다녀온 딸에게

제법 묵직한 금목걸이를 빼주며 " 이거 너무 신가라라서 차고 댕길라카이 넘사 시럽다.

젊은 너그들한테나 어울린다" 하시던 친정 엄마의 붉은 눈시울은 세상 어떤 노을보다

고왔다. 이인용 전기 장판에 세 식구가 자려니, 몸부림 많이 치는 아이들이 언제나 열선

밖으로 굴러 나가서 아침마다 두 놈 중 한 놈은 감기에 걸리던 겨울, 몰래 5인용 전기 장판과

열가마와 쌀 한 포대를 사놓고 자판 밑에 돈 오만원 있다던, 분순이의 목소리는 또

얼마다 뜨거운 생의 전열이였던가? 몇 해 전 일당을 받으며 감꽃을 솎은 적이 있다. 감꽃은

다른 꽃잎처럼 여리여리 하지 않고, 잎이 두툼하고 딱딱하다. 마치 서부 시장 칼국수 집에만

이십년을 다녔다는 금자씨의 손 같고,  사내들에게 술 한 잔 따라주지 않고, 호프집 해서

두 아들 서울 공부 다 시켰다는 여 사장의 손같은 투박하고, 깔깔한 결기가 만져지는 것이다.

사람만큼 전염성 강한 병도 없다. 순한 사람 옆에 가면 나도 순한 병에 걸리는 것이다.

누가 감꽃을 화병에 꽂겠는가? 그릇이 많이 없던 시절 잔칫집에 가면 커다란 감잎이 생선 접시였고

떡 접시였다. 우리 세대에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감꽃 목걸이에 대한

추억이 있다. 감꽃 향기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풋풋이란 감꽃 향기의 준말 같다. 달콤하거나

요염하지 않으나 아르마처럼 후각의 저 먼 심원까지 침투하는 치유의 기운이 있는 향기다.

맥주 한 모금 마다, 내 말을 들어주며 천천히 찢어주는 피데기 안주처럼, 감나무가 떨궈주는

늦은 봄날의 감꽃이 폭음을 경계한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우리 마당에서 가장 오래산 고양이 노랭이가 감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가

가장 높고 깨끗한 햇빛을 쬔다. 늘 배가 고파 허덕이는 덕구는 감나무 밑동에 발톱을 갈고,

나는 한가한 아침이면 대청마루 문을 활짝 열고, 대가집 마님처럼 서서 감나무가 지게처럼

한 무더기 지고 온 하늘과 햇살 더미를 굽어본다. 그 집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나 다닐 수 없는

시골 유지처럼 마음이 부유해져서 남루하고 쬐쬐한 기운이 넘볼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달에는 목화 씨 한 알도 제 힘으로 자라지 못한다는데

우리집 마당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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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피랑님의 댓글

profile_image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침에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은
가난이 내 마당에 심어준 감나무다

애지중지란 얼마나 애틋한 단어인지
그 두꺼운 국어 사전이 표지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내 고단한 퇴근길 마당에서 기다려 주는 감나무와 나 사이에
시계추의 이편과 저편처럼 애지와 중지가 있는 것이다

시 보다 더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길...

공덕수님의 댓글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으앗! 서피랑님이시다.
일전에 아들래미랑 통영 갔는디
여기에 서피랑님이 사신다 그랬는데(동피랑님도)
무슨 커다란 다리가 있는 동네에서
바다 구경 한답시고 물결보다 더 덜덜 떨다 왔는디요,
ㅎㅎ 잘 지내시죠? 동양의 나폴리 라는 말과
온 동네에 나폴리 모텔, 나폴리 횟집, 나폴리 나폴리 하는것이
몹시 거슬렸어요. 이젠 우리도 그런 열등감에서 벗어나도 될텐데
만약 절더러 무명의 김소월이라하면 전 화낼것 같은데
나폴리보다 우리 장군님  큰 칼 옆구리에 차고 시름에 잠겼던 이곳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 생각 했더랬어요.
그래서 통영 시청 홈페이지에 시민들의 의식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민원 넣을려고 찾아봤는데 마땅한 경로가 없더구만요.
뭔 시인인가 하는 넘도 동양의 나폴리 운운 해놓았더만요.
미친 새키 쪽팔린 줄도 모른고. 언제까지 너 후나, 배칠수 할거얌?

ㅋㅋ 오랫만에 뵙는데 낮술에 취해서리..ㅋㅋ 건강하셔야합니다.
이 누추한 곳에 와주셔서 저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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