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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내가 심은 나무를 돌아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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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플루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49회 작성일 20-03-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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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 한 사발만 떠 놓으면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 줄 것 같은 달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좋다. 중참으로 먹을 삶은 계란 두어 알과 도시락을

싸들고, 곡괭이와 토시와 챙이 넓은 작업모자와 코팅 장갑, 장화를 챙겨서,

한 시간 정도를 달려서 당도하는 곳이 아침이라 좋다. 남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날 잡아서 돈 들여서 가는 산을 날마다 올라서 좋다. 어제 갔던 산은

발 딪을 돌부리도 나무 뿌리도 드문드문한데 거의 수직으로 서서 바람만

불어도 스스스 흙가루가 떨어지고, 작은 돌들이 굴러 내렸는데 오늘

나무를 심을 산은 밥을 설컷 먹은 개처럼 엎드려 있어서 좋다.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모내기를 하듯 줄을 잡고 미리 대를 꽂아 놓은 자리가

나무가 일평생 서 있을 자리다. 갓 삶은 밤고구마처럼 파삭파삭 한 흙이

한 숟가락 퍼먹어도 좋을 것 같은 산은 경사가 지고, 경사가 완만해서

참 좋구나 싶은 산은 자갈과 돌이 많아 괭잇날이 튕기고, 흙도 산도 좋다

싶으면 벚나무나 고로쇠 나무처럼 뿌리가 길고 뻣뻣하다. 어쨌거나 심기가

수월하고 힘든 것은 내 사정이고 내가 심어 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 나갈 수 없는 나무에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아 놓은 대를

따라 한 줄씩 나래비로 서서 산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또 꼭대기에서

또 아래로, 옆 사람들에게 쳐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거의 경주를

하다시피 나무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심은 나무를 꼭꼭 밟아 주지도 못하고

뿌리에 맞춰서 땅을 더 깊이 파야 하는데도 흙을 더 덮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용을 쓰며 기어 오른 산에서 괭이 자루를 바닥에 깔고 앉아 각자

앞치마에 넣어 온 참을 먹는 시간이면, 집에서는 아무도 먹지를 않아

냉동실에서 돌이 되어가던 찰떡과 시루떡, 쑥털털이 같은 음식들이

그렇게 같이 산을 오른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나눌수 없는 진미를

발한다.  흙투성이 코팅 장갑과 속장갑에서 까낸, 이내 땀이 마른

말간 손들이 더러움도 위생도 다 잊고 한 조각씩 떼어낸 떡을 우물거리며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경이 내가 이미 다 살고 온 세상처럼 아득하게

보인다. 폭발하듯, 불이 옮겨 붙듯 미친듯이 피어나는 꽃들도, 새순이

움터는 벌거벗은 나무들도, 만들어 낼 수 있는 형체라곤 사각 뿐인 것

같은 인간들의 군락도 이미 벗어버린 옷가지처럼 헐렁하게 느껴진다.

저기에서도 나는 이렇게 살았을까? 사실은 옆을 볼 것도 없이,

자갈 뿐인 바닥을 더 깊이 파고 주변의 흙을 끌어 모아 최대한 깊이

구덩이를 팠어야 했던 것이다. 남들이 몇 나무를 더 앞서 가더라도

눈을 딱 감고 어린 나무의 우듬지를 위로 당기며 더 꾹꾹 바닥을

밟았어야 했던 것이다. 흙이 부서러져 떨어지는 낭떠러지 일수록

더 넓게 물받이를 내어 주고 돌이나 나뭇가지라도 받혀서 나무가

설 발코니를 내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큰 나무 밑이라 도무지

묘목이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과감하게 대를 분질러 버려야

했던 것이다. 한 발 잘못 딪으면 굴러 떨어지는 절벽일지라도

용을 쓰고 나무 심긴 자리에 다시 올라서서 푸석푸석한 흙을

다져 밟았어야 했던 것이다.  누군가 우리들 작은 사람들의

생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흐름에 휩쓸려 다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좀 더 일찍 꼭대기에 당도한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 자리를 대충 밟고 오르는 것은

휩쓸리는 존재의 증상이다. 손톱만한 물고기라도 물결을 거슬러

머물줄을 안다. 침을 묻혀 떼어낸 문풍지 조각 같은 나비라도

바람을 거슬러 꽃에 머물 줄을 안다. 나는 무익하고 어리석었던

것이다. 불성실하고 정직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노동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구덩이를 파고 괭이질을 하며 눈에

흙이 튀고, 장화에 돌이 들어가서 걸음마다 밟혔던 수고를

잊은, 십년 후나 더 오랜 이후에 늠름한 나무 한 그루가

푸른 머릿결을 바람에 날리며, 정말 고맙다며 곱게 짠 그늘 몇 필을

선물할 날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밥물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발을 씻기지도 못하고, 잔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앉은 누군가의 슬픈 얼굴을 비춰

주지도 못하고 그저 휩쓸려 흘러 왔던 것이다.

그것은 삶이나 시나 마찬가지 였다.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내 마음의 웅덩이를 더 깊게 하지 못했고, 뻣뻣한 것이나 긴 것이나

내게로 뻗어오는 사유의 뿌리들을 더 깊이 품지 못했고, 더 풍요롭게

흙을 덮어주고, 지긋이 밟아주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서 문 닫은

식당이 많아 계속 일이 없어서 나무 심기라도 하려고 산으로 왔던

첫 날 나는 나무를 빨리 심지 않는다고 이런 저런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정말 나무를 제대로 심었던 것이다. 나무는

식당에서 씻는 그릇처럼 제대로 씻지 못하면 다시 식기 세척기에

돌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잘못 심으면 뿌리가 뽑히거나

말라 죽기 때문에 나는 무척 긴장을 했고, 나무에게 많은 할 말이

있었고, 나무에게 많은 말들을, 혹은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 우앴던가 잘 살으래이, 여긴 돌이 많은데 우짜것네, 그래도

햇빛이 잘 들어서 금방 괜찮아 질끼다." 

사람들이 내가 나무에게 하는 말을 듣고 웃었다. 작업 반장인

아저씨는 "절도 하고 막걸리도 한잔 부 주이소"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심고 밟은 나무들 한 그루 한 그루에게

절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부어 주고 싶었다. 잔으로 주면 되로 갚고

되로 주면 말로 갚는 것들이라 내 복장이 든든해질 것 같았다.

한 번, 여기다 하고 자리를 정해주면 죽을 때까지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제가 선 자리가 이 세상 푸름의 마지노 선인 것처럼 지키고 살 나무들이다.

코로나다 미세먼지다하며 공기가 썩어가는 세상을 향해 청정을 길어내며

내일 지구의 폐가 될 나무들이다. 둘레길이다 무슨 축제다 측백나무 숲이다 하며

멀쩡한 꽃과 나무들을 베어내고 돈이 되는 수종들만 골라 심는 얌체

짓을 탓하지 않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는 성자들의

영혼으로 욕심으로 오염된 세상을 구원할 나무들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생각한다. 휩쓸리지 않고 흐르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익하고 어리석은 더 빨리가 아니라, 좀 더 나의 힘을 더 사용해서

한 그루라도 더 심으면, 등이 괭이 보다 더 굽은 저 할머니가 한 그루

덜 심어도 되는 빨리를 생각한다. 무릎이 아파서 중참 때 연신

무릎을 어루만지는 언니가 한 발이라도 더 높이 기어오르지 않아도

되는 빨리를 생각한다. 괭이 자루를 두 손으로 모아 잡고 더 힘을

주어서 구덩이를 파고, 팔목과 팔꿈치가 아파도 더 빠른 동작으로

괭이 질을 하고, 조근조근이 아니라 자근자근 흙을 밟는 것이다.


죽으면 썩는다.  제대로 썩어야 좋은 흙이 되는 것이다. 살아서

살았다고 몸에 쌓이는 에너지를 완전연소하고 가야 잘 소화된

음식처럼 좋은 똥이 되는 것이다. 어정쩡하고 구질구질하고,

비루하고 저열하거나 어리석지 말고 눈의 빛을 형형하게 내며

치열하고 뜨겁게, 사랑과 연민에 가득차고 흘러 넘쳐서

풍만하고 풍성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릇을 씻거나

양파를 하루에 서너 다라이씩 썰거나,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가파른 산을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나무를 심거나,  금관을

쓰고 왕좌에 앉거나, 그리살면, 그리 살기로 작정하면

이 생이라는 시간은 한 그루 한 그루, 큰 걸음으로 두 걸음 건너

나무를 심으며 올라온 산 꼭대기에서 새벽에 녹여 온

오래 된 떡처럼 입에 쫙쫙 달라 붙을 것이다. 그릇을 씻으면

그릇과 사랑에 빠지고, 양파를 썰면 양파와 사랑에 빠지고,

나무를 심으면 나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니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릇을 만나면 그릇을

살리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살리고, 너를 만나면 너를 살리고

나를 만나면 나를 살리는 공부가 내게는 더 적합한 것 같다.


오랫동안 노끈에 묶여 있던 어린 측백 나무가 햇볕에

비쩍 말라 있었다. 내가 마시려고 앞치마에 넣어 왔던 물병을

꺼내어 녀석이 기진맥진해서 주저 앉는 웅덩이에 뿌려 주었다.

옆에서 나무를 심던 무릎 아픈 언니가 웃었다.

"얘는 목요일까지 비를 기다릴 처지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야 봐라, 나무 죽는다꼬 지 마실 물을 부 준다야, ㅎㅎㅎ"

모두가 내가 심은 나무를 돌아보며 잠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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