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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 빵틀과 식은 붕어빵들에 대한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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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플루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69회 작성일 20-03-26 17:47

본문

그는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한마디로 교회가 혐오스럽다.

붕어빵은 붕어가 아니다. 비늘도 없고, 내장도,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다.

붕어 빵틀과 스텐레스 바구니에 놓인 식은 붕어빵들,

내 눈에 보이는 교회는 예수님이라는 빵틀에서 구운 예수빵이다.

예수님의 피라는 안코로 달콤하게 만든 밀가루 덩어리다.

붕어빵 장수는 한 여름에도 신나게 붕어빵틀을 돌리고

세상이 춥다며 속이고는 상한 빵을 팔 뿐이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웃은 같은 교회의 사람일 뿐이다.

땅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며 교회를

부유하게 만들 욕심 뿐이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를 가지 말라고 한다고 종교를 탄압한다고

반 사회적인 시위를 한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이웃을 병들게 하면서까지 교회에 나오라는 말이 아니라, 그 하루는

세상의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보내라는 뜻이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지, 꼭 모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육체가 곧 작은 교회이니 일주일 중 하루라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보내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인 것이다.

사이비 종교와 진정한 종교는 그 교주들의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만희는

엄청난 부자지만 예수님은 죽을 때 로마 병사들이 제비로 가른 옷 가지가

전 재산이였다. 이만희는 잘 먹고 잘 살지만, 예수님은 가난하게 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이만희는 구십이 다 되도록 이 세상에 살아

있지만 예수님은 서른 세살에 삼년의 짧은 공생애를 마치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셔서 천국을 가셨거나 말았거나, 그가 이 세상에 와서

개인의 잇속을 챙기거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키거나 편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만 봐도 믿음이 간다.


지금의 교회가 로마군에게 파괴당한 예루살렘 성전처럼 무너뜨려 버려야 할

두 가지가 천국과 지옥이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말고, 아무것으로도 협박하지 말고

사람들 스스로가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도록, 이 땅에서의

작은 삶들을 보듬고 구원할 수 있도록 이 땅에서의 예수님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들의 모든 죄가 속죄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해도 천국

간다고 전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땅에 그가 왔을 때

불렀던 이름이 예슈아고, 그는 아버지나 좋은 친구, 남편, 든든한 아들, 딸,

좋은 모든 좋은 사람들처럼 내 말을 들어주시고, 실존하고 현존하며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등피 속의 등불처럼 내 안을 비춰주는 따뜻하고 밝은 존재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수님 혹은 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수만 있다면

그가 구원을 주건 벌을 주건 우리는 그를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실존이

우연과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창조의 결과라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히브리어 역사책에 나오는 어떤 예언의 성취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미 그와 사랑에 빠져 있는데 그로 인해 지옥을 간다고 한들, 천국에 간다고 한들

귀에 들어 올 것인가? 그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지 않고

내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죄 때문에 누군가를 십자가에 매달고 싶지 않다. 그런 잔혹한 희생의 댓가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님보다

현장범으로 체포되어 돌에 맞아 죽을 처지가 된 간음한 여자에게 판결을 내리는

예수님이 좋다.  분명 이마나 볼에 돌을 맞아 흘리는 피냄새를 맡으며 군중은

흥분 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은 유대인들의 콧구멍도 벌렁 거렸을 것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펄펄 끓어서 술렁이는 물 같은 군중들 한 가운데

뜬금없이 앉아서 땅에 낙서나 한 것이다.  너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땅에

손가락으로 그리는 희미한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일까?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너나 잘하세요, 너희 중에 누구라도 죄 짓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시대가 이천년 전이다. 그 때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집에서 기르는 양이나 말, 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죄라는 것은 개인적인

고민들이 깃들지 않은, 누군가가 정한 극단적인 금지였다.  왕이 있었고, 신하와

백성, 노예가 있었고, 그런 위계가 한치도 벗어나서는 않될 질서로 여겨지던 시대

였다. 지금도 이란이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죄와

징벌인데 이천년 전 어떤 시골의 청년이 무엇이 진정한 죄인지 한번 고민해보라도

말한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너도 간음하거나,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간음 한 사람들이 재수 없게 틀킨 사람에게 돌을 던지느냐고, 소크라테스보다

신랄하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면 이미 용서 받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무엇보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나약한 죄성을 측은하게 여기고, 죄가 고귀한 생명을 집어 삼키지 않도록

문둥병 걸린 아이를 껴안는 엄마의 사랑을 보인 것이다. 죄라는 것은 율법서나

십계명의 돌판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지는 기록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아무 법에 걸리지 않아도, 내가 어느 가난한 여자의

하나 뿐인 떡을 몰래 한 입 베어 먹은 것이 목에 걸려 있다면 그 불편함이 죄인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구원이 되고 나름 의인은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죄에대한

자각 증상이 없는 사람은 죄를 고칠수가 없는 것이다. 아픔은 병에 대한 자각증상이듯

죄 또한 그런 것이다. 아이를  반 나누어 가지라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하는 엄마와

차라리 내가 아이를 포기 할께요 하는 엄마처럼 목적과 사랑은 구분 되는 것이다.

목적의 눈으로 보면 아무 죄가 아닌 일도 사랑의 눈으로 돌아보면 살과 뼈에

못이 박히는 듯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자꾸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목적을 가르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내가 지은 죄가 댓가 없이 사라지고,

천국을 가고 지옥을 면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는 일이 잘 풀리고, 가 아니라

그가 신이고,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늘 우리의 생명안에 함께 하시는데

등피가 등불이 켜졌는지 꺼졌는지 모르듯, 우리 육체가 물질화 되어서 느끼지

못할 뿐이라고, 오병이어란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더 배가 불러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을 전파 받는 사람이 더 배가 불러지는 것인데, 교회는 점점 부자가 되어가는데

자식에게 세습을 할 정도록 엄청난 부를 달성하는데 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교회 하루 빠지면 지옥을 간다고 믿을 정도록 자유함이 사라지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가출을 하고, 가정이 깨지고 사회가 깨져 간다면,

오병이어란, 사랑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도시락을 모두 모아서

사랑의 신에게 바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욕심을 빼고 주변을 돌아보면 이 생은 이미 선물이다.

예수님의 피로 영생을 얻는 것보다 예수님의 창조로 생을 얻은 것이 이미 선물이다.

그것에 아이처럼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까닭이다.

믿음이란 엄마가 무엇을 주어도 안전하고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어린 새들처럼

쫙쫙 입을 벌려 먹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문제로 이미 이천년 전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썰전이 있었다. 안식일에 서로 병을 퍼뜨려도 되는지

않되는지 답이 그기에 나와 있다.  제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생떼를 쓰서

예수님을 기름때 끼인 붕어 빵틀처럼 만드는 짓을 교회는 그만 두기 바란다.

어느 날 몇 백명의 도시락을 싸는 집에 일을 갔는데

그 집 사장이 날더러 큰 철판에 지단을 구우라는 것이였다.

나는 순간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그가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내가 기도를 하면, 그것이 내게 좋은 것이 분명하다면 들어주실 것 같았다.

내 손에 지혜와 꾀를 주어 이 것들을 하나도 태우지 않고 잘 굽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 난 사실 그날 계란 지단을 처음 붙여 보았다. 지단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는 여자가 몇 판째 지단을 태워 내고 있어서 겁이 나서

기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단을 여러 조각으로 내어서 구우면

찢어지지도 않고 잘 구워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누군가가

나는 무서워하는 지단 굽기를 참 재미 있겠다 하며 내가 한 번 해볼께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기름 주전자로 기름을 구우면 지단이

기름 때문에 울퉁불퉁 해질테니 옆에 있는 휴지에 기름을 묻혀서

팬을 닦듯이 하면 지단이 타지도 않고 얇게 구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문득, 그가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씀이라, 사랑이라

이 모든 재미 있는 일들을 한 번 해볼 육체가 없는 것이다. 내 손과

내 몸을 사용해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노랗고 예쁜 지단을 한번

구워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실재를 느끼고 그기에 참여 하고 싶은 것이다.

나라는 물질적인 존재를 사용해서 그의 사랑을 실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가 부실한 노인들에게 나의 손을 이용해서 더 총총 다진 나물을

먹이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 가득하고 넘치고 흐르는 사랑이 물질이 된

것이 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줄에 매달린

새 장난감이나. 츄르를 사 줄 때 고양이가 자라서 내게 무슨 제사라도

지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그저 즐겁게 놀고, 맛 있게

먹는 것을 보며 고양이의 행복에 참여하고 싶듯이 그 또한 다만 그가

주는 것을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길 바랄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신과 단절 된다는 것은 신의 그러한 순수한 목적과 단절 되기 때문에

외롭고 힘겹고 매사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고양이가

나를 따르면 더 좋겠지만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고양이 소주를 만들지는

않듯이 신 또한 그의 사랑하는 피조물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낼 지옥을 예비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노동이

내 안의 신이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신이 난다.

무거운 것도 무겁지 않고, 힘겨운 것도 힘겹지 않다. 늘 생각하지만

신이 내게 주지 않는 것은 내게 해로운 것이다. 고양이가 아무리 먹고

싶어 해도 양파에 절인 고기와 간이 된 생선과 쵸코렛 따위를 주지

않듯이, 돈이나 사랑이나, 명예나, 이름이나 예쁜 얼굴도 내게

해롭거나 조금 지나면 내게 짐만 되는 것들이다. 나는 신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직접 사람이 되어 느껴 보고 싶었다는 것을,  육체라는 작은 병 속에

담겨서 자신이 만든 세상을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것을, 나 또한 가끔

날마다 밥을 주어도 나를 경계하는 고양이들을 보며 내가 고양이가

한 번 되어 보고 싶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에 이해 할 수가 있다.

세상의 빛이 되려면 먼저 그 안에 빛을 품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서 우리가 아무런 빛도 느낄 수 없다면

그들은 등불이 꺼진 등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을음이 너무 많이 앉아서 아무것도 비출 수 없는 등피인 것이다.

오히려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가 짝을 찾으며 내뿜는

빛이 더 밝다면 누가 그 등을 문간에 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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