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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박과 매미와 먹구름이 물러가고
포도와 귀뚜라미와 청천에 입과 귀와 눈을 내어 줍니다.
너무 바빠서 그 태풍과 폭우에도 마음 한자락 적실 짬이 없었는데
가을은 유독 사람의 마음을 깃들고 싶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주방에서 물일 하는데 맞춰 입는 작업복이지만
긴 팔을 입어 볼까, 짧은 팔을 입을까, 아니면
작년 가을에 사두고 눈으로만 입던 초록색 줄무늬 옷을
입을까, 늘 씻고 벗고 두 장의 티셔츠로 고민을 줄였었는데
가을은 별로 춥지도 않은데 괜히 두르는 스카프처럼
팔자에 없는 여유와 멋을 재촉 합니다.
매미가 거리와 숲속의 나무에 깃들어 있던 것들과는 달리
귀뚜라미는 사람 사는 온기에 깃들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방의 찬냉장고 밑에도 적어도 세 마리 이상의 귀뚜라미가
화음을 맞추고 있습니다. 커다란 물통의 물을 확 들어붓고서야
주방일을 마무리 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호스를 들고 조근조근
바닥을 청소 합니다. 제가 쏟은 폭우에 쓸려서 저 예쁜 화음들이
하수구로 쓸려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먹고 살거라고
큰 칼을 들고 고무 찰흙 덩이를 썰듯이 생고기 덩어리와 눌러놓은
소머리를 썰지만, 그 드센 칼질로 인해 제 분주한 마음에
근근히 한 뼘 남아 있는 계절의 자락마저 잘려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을이 오자 이곳 찜질 숯굴방에도 손님이 많이
늘었습니다. 추석에 장만했던 음식들을 알뜰살뜰 싸들고 와서
땀을 많이 흘리고 나온 막간의 평상에서 먹는 사람들도 늘었고
숯불에 구운 삼겹살을 먹으려고, 짬짬히 부추를 가리는 저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손님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들 아닌가 하는 인간적이고 자조적인 고백을
좋아하지 않지만 의식주라는 단어는 식 주 의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미북 회담이라하고 북한에서는 북미 회담이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쓰는 말에 각기 더 우선하고 싶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먹는 것은 사는 것을 우선하고, 옷을 입는 것은 그 이후의
아침에 고민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굳이 식을 앞세우지 않고
의를 앞세운 것은 인간을 인간에게 더 나은 존재로 전달하고 싶은
누군가의 배려인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먹고 살려고 오는 손님들의
입을 온 종일 쳐다보는 일을 하는 저로서는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들이
너무나 힘겹고 위태롭고, 시계 속의 톱니바퀴들처럼 부속 하나하나는
느낄수도 알 수도 없는 목적에 갇혀서 일생을 소모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바깥에서만 볼 수 있는 시계를 돌리며 서로 맞물려서 끽끽
대며 녹슬어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굳이 그 산골까지
혼자 와서 점심 한끼를 먹고 일어서는 손님들은 그 순간에도 세상이라는
내부와 톱니를 맞댈거라고 휴대폰을 보고,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밥을 먹습니다.
아! 또 출근 시간 입니다.
이 일기를 이을수 없을지 오늘 밤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살려고, 딱 그만큼만 하는 일들이 너무 힘겨워서
방전이 다 된 휴대폰처럼 까무룩까무룩 졸다가 쓰러져서
잠을 자면 언제 이 일기가 다시 이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다음 일기가 이어질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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