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쓰여진 시(詩) / 박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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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굵게 쓰여진 시(詩) / 박얼서
오늘은 짧게 쓰여진 시(詩)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 한다. 내가 문학과 인연을 맺은지도 강산이 수차례 바뀔 만큼 큰 세월로 쌓였다. 그동안 8권의 시집과 2권의 에세이집을 세상에 내놨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창작의 여정 따라 이곳저곳 길바닥을 누비며,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묻고 따지다 보면, 매일매일 발길의 한계를 느끼는 편이다. 일모도원(日暮道遠)을 절감한다. 시작(詩作)의 갈증만 느는 셈이다. 자작시 한 편 함께 읽자.
막차 이미 떠났는데
시간표 앞에서 독백을 주고받는, 플랫폼
첫차 아직 멀었는데.
"박얼서 詩 '대합실' 전문"
주저리주저리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갈팡질팡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이유를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올려다 보는 시간표를 통해 대합실의 상황이 하루의 꼬리표처럼 클로즈업된다. 막차와 첫차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상황을 더욱 긴장시키고, 막차를 놓친 아쉬움 속에 어쩔 수 없이 첫차로 선택을 옮겨야 하는 조바심이 서로 맞서며 극단처럼 충돌하는 듯 해도, 대합실이라는 시제(詩題)를 통해 갈등의 중심을 단칼에 제압해버린 셈이다.
시(詩)가 지닌 능력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탐미 혹은 운율은 물론, 가장 짧은 형식을 빌어 가장 높은 극대치를 추구해야 하는 표현의 함축성이다. 은유나 풍자 속에 감쪽같이 숨겨두어도 낭중지추처럼 돌출되고 마는 아우라, 이는 숨길 수 없는 시의 본능이다. 타고난 천재성이다. 시(詩)야말로 세상 구석구석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문학 예술의 선봉으로서 표현 예술의 극치인 셈이다. 너와 나의 삶 속 깊이 시(詩)가 존재하는 이유다. 내가 이토록 시(詩)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종교학 시험에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기적에 대하여 논하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답안지를 적어가는 동작들이 민첩하다. 그렇지만 엉뚱하게도 창밖을 향해 딴눈을 파는 한 학생이 있었다. 이를 주시하던 교수가 “왜 답안지 작성을 않느냐"고 묻자, “별로 쓸 말이 없어서요”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학생의 답변을 들은 교수로선 그저 황당할 수밖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마침내 시험 종료 5분전이었다. 교실엔 교수와 학생, 이 둘만 남게 되었다. "단 한줄이라도 적어놔야 낙제를 면할 것 아닌가" 교수는 부탁이라도 하듯 학생에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학생은 곧 무언가를 적어 놓고 유유히 교실을 빠져 나갔고, 그가 남긴 답안지엔 이처럼 짤막한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물이 자신의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이는 곧 만점짜리 답안지가 되었고, 캠브리지대학교 개교 이래 최고의 전설로 남겨졌다. 단 한 줄의 촌철살인, 그때 그 학생이 바로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었다. 19세기 영국 문학을 꽃피우던 시인 바이런 말이다. 이처럼 짧게 쓰여진 문장일 수록 한 편의 시(詩)가 되어야 한다. 낱말보다는 함의로, 형식보다는 감동으로, 공감을 좇는 화살촉이어야 한다. 깊은 향기를 품어야 함이다. 맡겨진 사명이 크다는 얘기다. 사회적 책임감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의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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