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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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무준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초여름답지 않게 흐릿한 날씨. 낮게 깔린 회색 구름 아래, 그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올해 여든. 집에서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을 달려야 겨우 도착하는 사무실. 무준의 아내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 역시 일흔다섯. 남편의 고단한 출퇴근길을 매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무준은 단 한 번도 나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무언가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믿어왔다. 다만 몸이 먼저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흔 즈음 시작된 당뇨는 십수 년간 그와 함께했다. 그 위에 심근경색과 녹내장까지 겹치며 몸은 점차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고, 손끝의 감각은 무뎌졌다. 계단 하나 오르내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준은 알고 있었다. 말은 않지만, 사무소장도, 젊은 직원들도 이제 그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2년 전부터는 바쁠 때만 출근하며 대부분 재택근무로 지내왔지만, 고된 날이면 고스란히 주변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준이 지금의 사무실에 들어온 것은 2002년. 이전 직장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집 가까운 곳을 찾다 다시 얻게 된 자리였다. 당시엔 사무소장과 직원 둘, 그리고 무준. 넷이 전부였다. 손님은 대부분 소개로 찾아왔고, 사무실은 늘 빠듯했다. 그래도 네 사람은 소소한 기쁨을 나누며 지냈다. 가끔 맛집을 찾아가고, 경치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다니며 웃을 일이 많던 시절도 있었다.
쉰여섯의 나이에 새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무준에게 두 번째 삶이었다. 석산 사업 실패 후 친구 사무실을 찾았다가 우연히 시작된 이 일이, 어느덧 그의 삶에서 가장 오래된 직장이 되었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법전을 펼치는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날, 무준은 사무소장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장님, 저 이제 그만하려고 합니다. 몸도 그렇고, 눈도 잘 안 보이네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소장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장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거동이 되실 때면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얼굴 보여주세요. 사무실의 고문으로라도."
그 말에 무준은 작게 웃었다. 일상은 끝났지만, 관계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만 매일 아침, 두 번씩 갈아타야 했던 출근길은 오늘로 끝이었다.
퇴근길. 무준은 버스 창밖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 개교기념 마라톤 대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런닝셔츠 하나로 달렸던 젊은 날의 자신. 말수는 적었지만 친구가 많았던 소년 시절. 지금도 몇몇 친구들과는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옛 시절을 나눈다.
버스가 아파트 정류장에 멈췄다. 무준은 벨을 누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익숙한 길인데, 오늘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엔 젊고 고왔던 아내가 종종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와주었었다. 지금도 그녀는 여든의 남편을 위해 식탁 위에 따뜻한 저녁을 차려두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보, 고생 많았어요."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아내의 주름진 손이 무준의 굽은 듯한 등을 토닥였다.
그 리고 무준은 아내를 향해 조용히,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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