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레기, 그리고 불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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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기, 그리고 불빛 속에서
ㅡ 권도진 ㅡ
2024년 2월 16일, 늦은 밤.
시계를 보니 11시쯤, 몸이 피곤해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든 건지, 꿈을 꾸는 건지, 아득한 가운데 어디선가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재가 났습니다.
화재가 났습니다.”
처음엔 꿈인가 싶었다.
그 말이 너무 반복되길래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그건 꿈이 아니었다.
화재 경보기의 경고음이 거실 가득 울려 퍼지고,
거실에는 까만 연기 자욱했고,
탄 냄새는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이게 뭐지?’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켜진 채인 인덕션과 그 위에 놓인 냄비.
‘아… 시레기…’
그날 저녁, 시레기를 삶으려고 인덕션에 올려두고는
그만 깜빡 잠들었던 것이다.
목조 주택인데,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급히 인덕션을 끄고
창문을 죄다 열어젖히고
선풍기, 환풍기, 돌릴 수 있는 건 다 돌렸다.
하지만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새벽 1시,
이 깜깜한 시골집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찌 다시 잠을 자나.
춥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겨우 잠시 눈을 붙이고
4시 반, 새벽 예배를 위해 다시 일어났다.
몸은 피곤한데
집 안 가득 시레기 탄 냄새는
마치 송장을 태운 듯, 진동을 했다.
그래도…
주말 부부로 지내는 중이라 망정이지.
남편이 함께 있었더라면,
그날 밤은 설교보다 더 길고 깊은 잔소리의 밤이 되었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참 큰일 날 뻔했다.
시레기 하나 삶다
한순간에 집을 태워버릴 뻔했으니.
나는 연기를 뚫고
살아남은 오늘을 또 하루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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