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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녀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집에 없었죠. 물론 그녀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간 것입니다. 그녀는 집에 없지만 왠지 꼭 가 보아야 할 것만 같았거든요.
그녀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바로 옆집에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소꿉친구였죠. 초등학교 1, 2학년 때에는 아침마다 둘이 손을 꼭 붙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3, 4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냥 어깨만 나란히 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애가 시간 맞춰 나오지 않는 날이면 혼자 가는 날도 있었구요. 5, 6학년 때에는 다시 같은 반이 되었지만 솔직히 다른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까 봐 학교 갈 때도 따로 가고 학교에서도 서로 외면하고 지냈답니다.
중학교는 서로 다른 학교를 배정받았습니다. 서먹서먹한 가운데 졸업식을 마쳤죠. 그 때 내가 한 말이라고는 단지 “잘 가!” 한 마디였습니다. 그 애가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중학교 때 저의 집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 가는 날이 일요일인 데도 불구하고 그 애는 나와 보지 않았습니다. 조금 섭섭했습니다. ‘괘씸한 아이 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네 집이 언제 이사 갔는지는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 때는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대학교 때 목련꽃이 화사하게 핀 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도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그녀의 얼굴 윤곽은 헤어질 때 그대로였지만 아주 긴 생머리에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자랄수록 예뻐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때 나는 대학 입시에 한 번 실패를 하여 그녀보다 한 학년이 아래였습니다. 나는 신입생이었고 그녀는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내가 한 학년 높으니까 이제부터 나보고 누나라고 해!” 했습니다.
“예, 누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에이 바보.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러게. 나는 바보인가 봐~”
“그것도 내가 한 말 아니야?”
“그러게. 나는 진짜 바보인가 봐~”
우리는 마주 보며 킬킬댔습니다.
사실 내가 기꺼이 바보가 된 것은 그녀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었죠. 그만큼 그녀는 근사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 날은 그녀의 집에 먼저 갔습니다. 그 집이 오늘 가고 있는 바로 그 집입니다. 그 집 어르신들도 나를 반가이 맞이해 주셨습니다. 다음번에는 그녀가 우리 집에 왔습니다. 우리 집 어르신들도 그녀를 반가이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참 행복했었죠. 그녀의 비밀 아지트도 몇 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간 남자는 자기 아빠 빼고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우쭐했었습니다.
그녀는 말을 아주 예쁘게 했습니다.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들렸고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저절로 내 몸이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무얼 그렇게 빤히 들여다 봐?”
“네 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몸이 네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에이, 바보. 그런 말이 어딨냐?”
나는 그녀에게 또 바보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바보가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만의 바보라면 말이지요.
그녀의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평소처럼 그녀가 반갑게 문을 열어 주고, 따뜻한 찻물을 내어 오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 오늘 당연히 그런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대충 짐작하고 가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리겠습니까?
멀리 그녀의 집 뾰족한 초록색 지붕이 보였습니다. 지붕 밑의 다락방. 조그만 창문이 달려 있는 그 다락방이 그녀의 아지트였습니다. 나도 몇 번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다락방. 그녀는 그 다락방에서 밖을 내다보고, 꿈을 꾸곤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말로 내가 그 꿈의 주인공이 될 수 없겠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작고 예쁜 입술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조금 슬펐지만 내미는 입술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에겐 첫경험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첫경험.
그녀의 아지트는 두꺼운 갈색 커어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갈색을 참 좋아했습니다. 코트도 갈색 코트, 머플러도 갈색, 장갑도 갈색, 구두도 갈색 …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녀의 마음만은 제발 갈색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
“그러면 무슨 색으로 할까?”
“갈색 말고 올색.”
그녀는 킥킥 웃었습니다.
“바보. 그런 색이 어딨어?”
“없긴 왜 없어? 내가 제일 좋아 하는 색인데…”
“올색? 아, 오렌지색?”
“맞아!”
나는 오렌지색을 참 좋아했습니다. 오렌지색 티셔츠를 즐겨 입었고, 오렌지색 오렌지도 내 입맛에 꼭 맞았습니다. 밖에서 그녀를 만날 때면 나는 항상 오렌지주스를 주문하곤 했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는 “이런 오렌지 귀신!” 하고 놀려 대곤 했었거든요. 그녀는 “오렌지색 마음? 한번 생각해 볼 게!” 아주 선선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요즈음 조금 변한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내 곁을 떠나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며칠 째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그녀 방의 전화기에서는 “외출 중이오니 용건이 있으시면 메시지를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삐~~~” 하는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거든요. ‘그럴 그녀가 아닌데…’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며칠씩이나 사라질 그녀가 아닌데…’ 아주 슬펐습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곤 했었습니다. 특별히 꼭 꼬집어서 ‘이건 아닌데…’라는 것은 없었지만 사람에게는 예감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녀의 마음이 내 곁에서 떠날 것 같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그녀의 행동들이 모두 나를 피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불행히도 오늘까지 그걸 확인해 볼 용기가 나에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기어이 …
마침내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섰습니다. 그녀가 숱하게 드나들던 곳, 가끔 내가 드나들던 문,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듯 했던 사자 머리 손잡이.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마음만 확인해 보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글 돌았습니다. ‘집에 그녀가 있으면, 집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고, 더 이상 비참해지기도 싫었습니다.
사자 머리를 하고 있는 대문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대문을 살짝 밀었더니 스르르 문이 열렸습니다.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마 들어가기 싫었지만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마치 내 다리가 아닌 듯 머리는 들어가기 싫은데 몸은 벌써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먼저 거실 유리창 너머로 눈길이 갔습니다. 거기 그녀가 보였다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든지 그대로 뛰쳐나왔을지 모릅니다. 다행히 거실에는 그녀의 어머니만 보였습니다. 이젠 현관문을 열 차례입니다.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저의 마음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터질 때 터지더라도 현관문은 열어 보고 터져야 했습니다.
현관문은 밖으로 잡아당겨야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도 그렇게 잡아당겨서 열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녀의 것이잖아요? 사람의 마음은 억지로 잡아당긴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게 평소 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여튼 현관문을 열기까지 나는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넘겨야 했습니다. 그 때 나는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멀고 험할지라도 그 고비만 넘기면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그 고통의 순간이 펼쳐지는 순간, 뒤에서 “쾅!” 하고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대문을 열어 놓았어?”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옥구슬같은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돌아다보니 그녀가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며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아유 힘들어!”
내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흘러 나왔습니다. 내 입에서는 한숨이 폭폭 새어 나왔습니다. 나는 바보입니다. 그녀만을 위한 바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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