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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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술
우리 부부의 최대 난제는 일상에 쌓인 불만을 풀어낼 때 마주 앉아 대화하는 기술이 서툴다는 것이다. 반 세기를 함께 살아가지만 아직도 마주 앉으면 대화보다 싸움에 가까운 대화가 이어진다. 미리 서로에 대한 감정을 갖고 적개심으로 마주 앉기 때문이다. 마치 소년 소녀처럼 싸운다. 나는 언제나 비교적 이성적으로 대하자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지만 아내는 앉자마자 자기의 감정을 홍수처럼 쏟아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일들인데도 아내는 내일이 없는 듯 눈물부터 주르르 흘려 대화도 시작하기 전에 주눅이 든다. 그러니 수평적인 대화는 커녕 아내를 달래다 끝나는 게 우리부부의 대화법이다. 기대하던 권투경기에서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KO로 끝나는 그런 느낌의 대화법이다.
아내는 자기가 좋으면 꼭 주변에 있는 지인들에게 공유하고 좋아하기를 바라는 성격이 있다. 이를테면 설악산 자락에 살고 있는 가평친구가 보내준 흑염소즙을 먹고 작년에는 감기 한 번 안 앓았고 나날이 오르던 당뇨수치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조금씩 걷던 길도 지치지 않는다는 것을 주변 지인들에게 판매사원처럼 소개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득을 챙겨 하는 것은 아닌 걸 알지만 그런 일을 자주 보아온 나로서는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을 여보! 요즘은 건강정보들이 홍수처럼 넘쳐나서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 고마해라! 하면 안색이 순식간에 변한다.
어제는 팔십도 넘은 뒷집 아지매가 새댁도 왔고하니 점심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마침 아내와 나도 백수이니 가뭄에 단비 만난 듯 흔쾌히 약속을 받아 모시고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창가에 날리는 단풍잎들을 보며 두 여인은 가을여인처럼 들떠 있었고 들판을 나르는 철새들을 보며 소녀처럼 즐거워 한다. 가는 길 차 속에서는 팔십 노인의 한 맺힌 청상의 세월이 한탄처럼 이어졌고 이 좋은 세상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긴 탄식이 독백처럼 이어졌다. 이에 아내도 감화가 되었는지 시어머니 시고모들까지 끌어들여 내가 모르는 희한한 이야기들을 한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여보! 고마해라 하니 안색이 순식간에 변한다.
순번을 기다려서 겨우 자리잡은 모처럼의 가을어탕은 매콤하고 깔끔했다. 허접한 일상의 삶을 시원하게 씻어주고 돌솥밥 누릉지 숭늉은 옛 가마솥맛을 소환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밥상의 찬들은 다 사라지고 시원하게 들이키는 매운탕은 가을의 진미를 흠뻑 땀으로 젖게 했다.
자리를 옮긴 카페에서도 시어머니 시고모 죽이기는 2시간이 넘도록 이어졌고 이제와서 저런 얘기에 저렇게 신이나 하는 것을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 할 것이었다. 이제 좀 끝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세시간을 넘을 즈음 우리 다음에 또 이야기 하자 하고 일어서는 두 여인. 여인들의 마음은 죽어도 이해불가였다.
아내가 거실을 들어서자마자 탁자에 앉더니 대화를 청한다.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화창한 가을을 만끽하고 돌아온터라 만무심으로 앉는 나에게 느닷없이 아니! 당신은 왜 내가 무슨말을 하면 고마해라! 고마해라! 하는데 내가 시골와서 살면서 지인끼리 이런저런 얘기도 못하면 무슨정으로 살란 말이야! 하고 쏘아 붙이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유분수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아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아내와의 대화는 차근차근이 없다. 속사포처럼 자기 속내만 털어 놓고 일어서는 형태다. 상대방이 틀렸으니 상대방의 의견은 들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내의 루틴이다. 대화의 룰은 애시당초 없고 휫슬을 불기 전에 미리자기가 혼자 볼을 몰고 상대방 골문에 차 넣고 환호를 지르는 모습이다. 찬바람이 이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참 여자의 마음은 불가사의다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사태가 가라 앉으면 조용히 아내와의 대화법에 대한 룰을 설명해서 그 룰을 지키며 대화하고 싶다. 그래서 이상적인 노부부로 살다 가고 싶다. 문득 아내의 대화법이 젊은 날의 내 조급한 성격때문에 저렇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책도 해 보지만 가을 하늘이 저러히 푸르니 희망도 있으리라 자위한다. 세상에 일방적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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