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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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길
정오에 점심 약속이 있어 일찌감치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 동안 시간이 서로 겹쳐 차일피일 약속을 미뤄 오다가 오늘에야 겨우 틈을 내었다. 먼 혈족 누님인 인숙이 누님은 옛날에는 우리집 이웃에 살던 마을에선 제법 예쁜 누님이었다. 그런 누님이 귀향해 살고 있는 동생을 보고 싶어 몇 번이나 전갈이 왔으나 그때마다 공교롭게 시간이 빗나가서 미안한 마음에 아내가 서울에 올라 가기 전에 인사라도 드릴려고 겸사겸사 부랴부랴 날자를 잡았다. 팔십 턱 밑의 누님이 어떻게 변했을까하고 달리는 차속에서도 소년처럼 들뜬 마음이 파노라마 같은 차창의 초겨울 풍경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기어드는 창가에 액자 속 모나리자 같은 갸름한 미소가 백발에 웃고 있었다. 기억을 찡그려 가며 다가간 옛날은 무심한 세월에 시들어 가는 한 송이 국화꽃이 되어 빙긋이 미소 짓고 있었다. 인숙이누임 맞제? 하며 앉는 나에게 아이고! 야야! 니가 이렇게 늙어 뿌랬나?! 하며 동물원에 새로 들어온 원숭이 보듯 요모조모 얼굴을 돌려가며 보고 또 보고 있었다. 길에 나서면 누임도 생판 몰라 보겠네! 참 세월이 무정타! 하니 얼핏 보이는 누임의 눈가에 이슬인지 햇살인지 반짝거렸다.
혼례식을 며칠 앞두고 신랑이 이미 결혼을 한 번 한 재춧자리라는 소문이 바람에 들려 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기가찬 누이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버렸다. 이 게 무슨 소리고 하는 친정 부모님도 기가 넘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시절에야 일단 정혼이 되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하고 이미 혼례식 날자까지 정해졌으니 기가 차고 맥이 찰 노릇이었다. 집안이 쑥밭이 되었다. 처절한 시간은 임박하고 23살의 누임은 본인이 그 시절에는 혼인이 늦은 과년한 처지를 인식하고 인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래도 신랑이 시청에 다니는 철밥통 공무원이고 집에서도 시집 못가 눈총 받는 처지이니 친정을 탈피하는 목적으로 우회의 결단을 내렸다.
남매를 낳고 참 행복하게 산 기억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 무렵 유학차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이후는 소문으로만 들었다. 남매가 초등에 입학할 무렵 청천벽력 같은 일이 찿아왔다. 그 시절 죽었다하면 폐병으로 죽는 것이 다반사여서 폐병으로 남편이 졸지에 하늘나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또 한 번 막막하고 캄캄한 세월이 이어졌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치마끈 졸라매고 살아온 길고 먼 세월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아이들은 잘 자라줘서 成家를 하고 대구에서 포항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라떼 한 잔을 머금은 누임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따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하얀 세라복의 누임이 그리워 졌다. 연꽃향기 그윽한 연못가에 살았다고 해서 우리는 누임이 살던집을 연지댁이라고 불렀다. 완고했던 아버지도 처절히 살았던 어머니도 이젠 모두 우리네 삶 앞으로 먼저 가셨다. 이제 우리야 죽기 전에 얼마나 자주 보겠냐! 시간 나면 자주 좀 보자! 하며 바라보는 누임이 쓸쓸해 보였다. 더 늙기 전에 누임을 만난 것도 참 행운이다 싶었다. 그래 우리 어릴적 마음으로 돌아가 꽃동네 새동네를 노래하며 오누이처럼 살아보자 하며 내미는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누임의 따듯한 온기가 초겨울 바람도 무색하였다.
댓글목록
안산님의 댓글

안녕하세요. 계보몽 작가님의 수필은 계속하여 읽고 있습니다만
답글이라는 게 서로에게 부담을 주는 측면이 있어서 답글을 삼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분의 누님과 여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만 누님들은 예전에 돌아가시고
여동생마저 며칠 전에 운명하여 이제는 육남매 중 남동생과 저만 남았습니다.
계보몽 작가님의 경우처럼 저도 유학차 고향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누님들이나
여동생의 삶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비보를 접하고 나서야 손남처럼
상가를 찾곤 했지요. 지나고 보니 후회도 많지만 다 지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이젠 저 자신의 일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인생이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계보몽 작가님의 내공이 담긴 수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계보몽님의 댓글

그러셨군요, 남매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먼저 가셨습니다 그려.
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세월,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겠지요.
지나고 보면 다 허무한 세월이지요.
귀향후의 제게는 프레미엄 같은 추억들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그 옛날 흘러갔던 기왓장 같은 기억들과 묵은 인연을 찾아 정을 나누고
본향에서 고요히 인생을 마감하려고 유언 같은 글들을 한 자 한 자
새기고 있습니다.
잔잔한 안산님의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물가에아이님의 댓글

가슴이 뭉클 합니다~
사람마다 완벽한 행복은 없는듯 합니다
神이 고르게 분배 하셨는지~~~
요즘세상은 물질 만능이라 깊은 생각 없이
별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이 젤 행복한듯 합니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것도 모르고~~~~~
가끔 계보몽님 글 읽으면
물가에도 수필방의 식구가 되어볼까 충동이 납니다예~
그런데 아직 용기가 없어예~
쓰고 싶은 글들이 너무 초라한 삶이고
빈약 한듯 하기도 글 솜씨도 재주 없고예 ㅎ
모든 사연들이 읽고 나면 영화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주셔서~
오늘도 행복하시길예~~~~~
계보몽님의 댓글

오늘도 수고로운 순례길 잘 다녀오시고 가벼운 결과로
돌아 오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의 길은 다 정해져 있다하니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듯요
받아들이고 내려 놓는 삶, 세월의 과제인 듯 합니다
적어도 마음의 병은 앓지 말자는 얘기지요
감사합니다 정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