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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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버스안은 침울했었고 기가찬 얼굴 멍한 얼굴 착잡한 얼굴들이 서로의 눈길을 피해 가며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슬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간간히 대통령 서거라는 깊게 잠긴 아나운서의 멘트만이 적막처럼 흐르고 있었다. 장장 18년을 통치하던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것이었다. 그것도 남산의 부장이던 아끼던 고향동무에게 무참히 시해를 당한 것이어서 더욱더 충격이 컸었다. 아내를 잃고 고독한 세월을 보내던 대통령이 갓 예순을 넘긴 나이에 아내를 따라 가 버린 것이었다. 새벽에 비상계엄선포가 뒤이어 전국에 뿌려졌고 미아리에서 종로3가까지 달리던 출근버스가 한 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21세기 초반 느닷없는 45년 전의 기억이 밀물처럼 소환되었다. 아! 이게 뭐지! 해보지만 사실은 현실이었다. 적 침투용 헬기가 어둠을 뚫고 의사당 위를 나르고 유리창을 부수며 의사당 안을 침투하는 군인들을 보며 아닌 밤에도 유분수지 홍두께 같은 상황을 보며 아연한 마음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잘못은 만백성이 다 알고 있고 숫자로 밀어부치는 세력의 힘겨움도 이해를 하겠지만 대명천지에 총칼을 들고 덤비는 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을 벗어나긴 죽어도 힘들 것이었다. 서로의 야욕을 한 움큼이라도 내려 놓지 않으면 근성이 뻔한 민족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겠다.
계엄이 지나고 나면 세상은 늘 예전처럼 흘러가겠지만 좌우 승냥이들의 태도를 보면 미래사가
캄캄하다. 독을 품었다. 사람의 마음이 보이질 않는다. 다 내가 옳다. 알량한 사상의 차이로 아버지도 없고 반도의 미래도 없다. 한쪽을 맡겨 놓으면 지들이 다 해 먹고 또 저쪽을 맡겨 놓으면 지들끼리 마음 놓고 해 먹는다. 민중은 안중에도 없다. 립서비스만 요란하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얘기다. 진흙탕에 뒹구는 놈들을 양민들이 어찌 구분하랴. 이래저래 배알이 뒤틀린다.
모두 발가 벗겨 혹한의 칼바람에 내어 걸고 싶다. 군에서 한 겨울 찬바람 부는 오밤중에 연병장에 도열한 팬티바람의 기합이 언뜻 생각난다. 요즈음은 얼차려라고 고상하게 바꿔 부른다지만 당시의 기합은 사람이 기암을 초풍할 정도로 힘들었다.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벌리고 엄동설한의 벌판에 서 봐야 겨드랑이 밑으로 지나는 바람이 진짜 칼바람인줄 알런지 그제야 정신을 차릴런지...
몸도 마음도 벌써 엄동설한이다. 이 강철 같은 겨울이 점점 더 추워질 것 같다. 보일러 온도를 1도 더 올려야겠다. 늙으니 주책없이 추위를 더 탄다. 그날 그날 별 일 없기를 기도하며 산다.
댓글목록
물가에아이님의 댓글

물가에가 한양에첫 입성한날이 생생합니다
밤열차 타고 새벽 서울역 내렸는데
서울 시민들 손에 손에 뭔가를 들고서
육교를 오르면서도
읽고 신호를 건너면서도 읽더라고예~
그래서 속으로 그래도 서울 사람들은 다르네
바쁘니 이렇게 라도 읽고 싶은것 읽는구나 했지예~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도 마찬가지
앉으나 서나 모두 들고 읽는것
어깨 너머로 궁금을 풀으보니 " 대통령 유고"라는
대문짝만한 글씨~
아무것도 모르고 밤을 지나 도착한 서울 풍경
계보몽님의 댓글

정아님도 서울생활 경험이 있으셨네요
요즘의 기막힌 상황을 보면서 그 때가 언뜻 생각이 납니다
동네 패싸움 같은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기가차서 말도 안 나옵니다
먼 바닷길 여행 여독에 지쳐 있을듯 하네요
편안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