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 소설·수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소설·수필

  • HOME
  • 창작의 향기
  • 소설·수필

☞ 舊. 소설/수필   ♨ 맞춤법검사기

 

 

모든 저작권은 해당작가에게 있습니다.무단인용이나 표절을 금합니다

바캉스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46회 작성일 16-09-03 00:03

본문



바캉스


 이것은 유리감옥에 갇힌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 유일한 위안거리는 
유리벽 너머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눈이 흐려 그렇게 멀리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눈뜬장님이라고 하는 건가요?

 지금은 여름입니다. 나는 속이 비칠 것 같은 하늘색 린넨 원피스를 
걸치고 있습니다. 허리에는 가느다란 가죽 벨트가 묶여져 있고, 
머리에는 남색 리본으로 장식된 하얀 페도라가 씌워져 있습니다. 
유리벽 너머의 사람들은 가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언제나 멈춰 서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한 여자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살짝 벌린 입이 귀엽고,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가 무척 예쁜 아이입니다. 아쉽게도 이 아이에게 맞는 옷은 
없습니다. 아이도 그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조금만 크면 입을 
수 있을 거야.’ ‘넌 매우 예쁜 아이란다.’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지만 이마저도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갑니다. 못내 아쉬운지 
한 번, 두 번 뒤돌아보고……. 이제는 흐릿해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요? 여름은 언제나 시간을 가늠하기 힘듭니다. 
바깥은 어느새 사람들로 꽤 북적이고 있습니다. 모두들 바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저녁의 사람들입니다. 몇몇은 이쪽을 힐끗 
쳐다보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한낮의 아이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바라보더니, 이 사람들은 가만히 서 있는 법이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어느새 가게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히고, 짤랑거리는 
열쇠꾸러미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옵니다. 나는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겠지요. 그래도 나를 비추는 은은한 조명 덕분에 외롭지는 않습니다. 
가게는 온전히 내 것이 됩니다. 이 시간이 되면 나는 낮에 보았던 것들을 
하나씩 되새겨봅니다. 오늘 그 아이는 꽤 귀여웠습니다. 아마 지금쯤 
자고 있겠지요.

 여름인데 이 정도 캄캄해졌으면 꽤 늦은 시간인가 봅니다. 지친건지 
취한건지 살짝 비틀거리며 걷는 여자가 보입니다. 옆에서 툭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습니다. 나를 슬쩍 바라보는 얼굴이 꽤나 
피곤해보이네요. 이 여자도 이대로 지나칠까요? 아니네요. 더 이상 
부끄러울 게 없나 봅니다. 여자는 선 자세에서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초점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중간 중간에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한숨을 내쉽니다. 이번에는 조금
크게 내쉬네요.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몸이 둥실둥실
뜨더니……. 바람인지 뭔지에 실려……. 가버렸습니다. 오늘밤은 
유독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아침이 왔습니다. 어젯밤은 제법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다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침의 사람들은 저녁의 
사람들과 닮았습니다. 모두 비슷한 옷에 비슷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은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막해보입니다. 
저녁과 달리 힐끔 쳐다보는 사람도 없네요. 
아침에는 원래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요?

 아침의 사람들이 사라지면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립니다. 
옷에게도 숨 쉴 틈을 주려는 건지, 오전에는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네요. 거리는 어느새 한산해졌지만 아침처럼 
살풍경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건 적막이 아니라 고요라고 하는 
것이겠죠. 이렇게 조용한 와중에 가끔 구멍에 쏙 빠진 것처럼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빈손으로 나가고, 
어떤 사람은 가게 이름이 적힌 하얀색 쇼핑백을 들고 나갑니다. 
쇼핑백 틈새로 하늘색 옷자락이 보이네요. 나중에 그 옷을 입고 
어디로 갈 예정인가요? 혹시 말로만 듣던 바다인가요? 바다가 
정말로 파란색이면 좋겠습니다. 바다를 등지고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당신은 무척이나 볼만하겠지요.

 벌써 점심인가 봅니다. 거리의 풍경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거든요. 
여름에는 식욕이 떨어진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모두 억지로 먹으러 가거나 먹고 나온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게 
먹기 싫은가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혹시 일을 
하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요? 물과 음식이 필요 없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겠지요. 

 점심의 사람들이 모두 지나가면 가게 주인도 점심을 먹습니다. 뒤쪽의 
별실에서 먹기 때문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밥을 먹는 소리만 들려올 뿐입니다. 손님이 오면 바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은 것이겠죠.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것이 어쩐지 나와 닮았네요. 오늘 점심은 무엇인가요? 맛있게 먹고 
있나요? 어쩐지 숨어서 먹는 것만 같네요. 벌써 다 먹었나 봅니다. 
뒷문을 열고 식기를 내놓는 소리가 들립니다. 뒷문이 있다는 것도 
소리로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점심을 전해주는 
것도 뒷문을 통해서입니다. 뒷문 밖의 풍경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분명 식기 말고 다른 것도 있겠지요.

 오전 내내 열려있던 정문이 닫힙니다. 아마 더워서 그러는 거겠지요.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나로서는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중요한 건 
손님들이니까요. 에어컨이라고 하던가요? 여름 한낮에는 그걸 
틀어놓습니다.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는 
걸 보면 분명 도움이 되는 물건이겠죠. 

 오늘은 햇빛이 유난히 강한 것 같습니다. 눈이 살짝 부십니다. 밖으로 나간 
가게 주인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나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 자세에서 
앞, 뒤, 좌우로 몇 걸음씩 옮겨봅니다. 종종 있는 일입니다. 곧 들어와서 
나를 점찍어놓은 자리로 옮기겠지요. 이번에는 뒤쪽입니다. 
한결 낫습니다. 

 어제 봤던 여자아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하늘색 원피스가 무척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모자인가요? 둘 다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이의 옷은 어제와 
변함없습니다. 양말만 바뀌었네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습니다. 약간 위험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가요? 눈빛이 점점 
흐려집니다. 너무 흐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가슴이 작게 부풀어 오르고……. 한숨을 내쉽니다. 

 한낮의 아이는 가고 저녁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사람들의 
발이 잘 보입니다. 무수한 발들이 지면에 닿을 듯 말 듯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꿈은 마네킹의 금기입니다. 그래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한낮의 아이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가혹한 일인가요?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674건 25 페이지
소설·수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954 김상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60 0 08-28
953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3 0 08-29
952 청산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95 0 09-13
951 청산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46 0 09-15
950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92 0 08-29
949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24 0 08-29
948 아무르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0 0 09-04
947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99 0 09-08
946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7 0 09-10
945 강촌에살고싶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62 0 09-12
944 청산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17 0 09-13
943
결심(4) 댓글+ 1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7 0 08-29
942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1 0 09-03
941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68 0 08-30
열람중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7 0 09-03
939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9 0 09-01
938 양승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91 0 08-30
937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4 0 08-31
936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9 0 09-17
935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21 0 09-18
934
사랑 댓글+ 1
구식석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9 0 09-18
933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3 0 09-18
932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36 0 09-19
931 시몬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91 0 09-23
930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13 0 09-24
929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3 0 09-25
928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4 0 09-26
927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54 0 09-26
926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9 0 10-01
925
그림자놀이 댓글+ 1
동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74 0 10-01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