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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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일등
서울대를 장학생으로 입학해 우수한 실력으로 졸업한 뒤,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청년을 나는 알고 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저 부럽다는 생각뿐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수려한 외모, G대학 총장을 지낸 아버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형, 어느 것 하나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영어실력 하나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런데 그와 알고 지내는 가운데 그가 의외로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대학에서 공부 할 때도 그랬다고 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춘 젊은이라면 공부하느라고 술과 담배는 아예 거리가 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이 만나 술을 마시게 되는 날이면 그는 소주 두 병, 나는 한 병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내 곱절을 마시고도 그는 별로 취하지를 않았다. 그 비결이 궁금해 어느 날 물었더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긴장? 나하고 술을 마시는데!"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자신은 늘 긴장 속에서 산다고 했다.
"긴장 속에서 살 다니? 그건 또 무슨 말?"
뜻밖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뒤를 잇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해가 갔다.
중학교시절 그는 다른 과목은 다 전교 일등이었는데 영어가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궁리를 한 끝에 영어교과서를 아예 통째로 외우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어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고 했다.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다니. 그 이후, 그는 영어마저 전교 일등을 차지해 전 과목 일등이 되었다. 결국 자기가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들이 항시 자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어서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산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신은 어린 나이지만 지금까지 공부 때문에 마음 편히 세상을 산 날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항상 불안한 가운데 쫓기듯이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술을 마시게 됐고 담배도 줄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세상을 나름대로 편하게 살아 온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럼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일등을 고집 해 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형이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어딜 가나 일등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형을 본받아 자신도 당연히 그래야했고, 또 집안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이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서울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다. 학교를 오직 일등만을 하기위해서 다니다보니 모두가 경쟁자라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속내를 들어 내놓고 이야기 할 변변한 친구 한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고 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인생의 목표가 공부가 전부인가? 아니, 일등인가?
그것은 아니다. 일등을 하면서도 그토록 불안한 정서로 세상을 살 바에야 무엇 하러 일등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불안하고 고독한 일등을 내주고 마음을 열고 친구들을 사귀며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닌가. 학문으로 인격을 완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때문에 불안 속에서 살아야했다니,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되어 있었다.
사람에게는 각기 타고나는 재주가 있다. 그에게도 공부 말고 또 다른 재주가 있었을 것이다. 일등이 아니면 어떤가, 마음 편히 학업을 끝내고 다른 재주를 찾아서 갈고 닦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세상에 잘 난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잘 났다고 해서 잘난 만큼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큰 틀에서 보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일등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오늘은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일등의 자리에 올랐지만 항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 자리를 내준다고 해서 인생에 패배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로인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 때문에 새로운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따듯한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창백한 그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이후, 나는 가끔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잘 난 사람이 되려고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인생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그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라.”
행복은 높은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받아드리고 느낄 수 있는 가슴만 있다면 파란하늘 가을 들녘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나는 것을 보고도 얼마든지 행복해 할 수 있다. 가슴을 꽁꽁 닫아걸고 어찌 그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가슴을 열고 세상을 맞을 때, 비로소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수려한 외모지만 자신을 음습한 세상에 가둔 채 외롭고 고독한 길을 홀로 가고 있는 그가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댓글목록
요소님의 댓글

자신이 만들어 낸 감옥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처럼 보이네요.
무조건 잘 해내야 한다.... 나는 더 잘 나야 한다... 성공해야 인정받는다.....
우린 삶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ㅠㅠ
요즘 제 고민들.... 이네요.
슬픈 현실은 젊음, 외모, 학력, 재력, 권력으로 평가되는 삶의 성공여부들....
누구처럼 사는 게 아닌 순수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흔히 '바보'라고 하는 삶이 더 멋지다는 것을 이젠 우리 스스로 일깨울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도일운님의 댓글

님이나 저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대끼는 현실 속에서는 그것이 쉽지가 않겠지만, 허나 부질 없는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바보
낮에는 돈 벌고
밤이면 시를 쓴다
그리고 엎드려 운다
빛바랜 세월 한 장을
가슴에 안고
바보라고 하는 말에 문득 옛날에 써논 시 한편이
생각이 나는군요. 가슴아픈 세월이었지만 그리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기도 했답니다. 행복은 이렇게 아픈가운데서도 찾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