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회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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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회의 정석
400년 연못의 매각관계로 임시 문회가 열렸다. 대문중의 支派인 이요당파 종문회인데 이요당공의 두 아들의 후손들이 오랫만에 현양재에 모였다. 첫째 아들이 종손이지만 전력권지공파라 하여 조선시대 하급 벼슬을 하셨고 삼형제를 두셨다. 둘째 아들은 오봉진사공파라 하여 할머니 셋에 둘씩해서 여섯 형제를 두었는데 그 오봉공의 둘째 아들이 시암공이라하여 예조정랑을 지내셨고 다섯째 아들 支下에서 병조좌랑의 벼슬을 이루니 오봉공의 위세는 손자대에서부터 근 300년을 이곳 집성촌인 남산을 호령했다. 그러니 큰 댁인 종택이 있는데도 종가처럼 군림했고 종가를 무시하는 처사가 근래까지 이어지는 참으로 희한한 파문중이였다. 그러니 한 번씩 하는 문회가 그런 저변에 깔린 정서들 때문에 은연중에 갈라 앉게 되고 심지어 오봉공의 다섯째 여섯째 후손들은 서자의 입장이라 그 시절 오봉공 댁에 기제사도 참석 못할정도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이즈음에도 만나면 제법 서머서먹한 연출의 어색한 모습이 내 기분탓인지는 모르겠다. 주인인 내가 몸소 느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제야 서차관계를 논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지만 이곳 동도지방은 아직도 그냄새가 여기저기 배어 있다.
2년여에 걸쳐 종토인 연못을 국가에 매입신청 요청에 대응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이요당파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 처음에는 담당공무원의 제의가 마뜩찮았으나 사적지인 연못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폐못이 되어가는 과정이 안타까워 몇 번을 사적 담당자와 면담을 했지만 별무소용이고 근본적으로 연못이 문중의 재산이니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사적관리소의 최종 입장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요당 정자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넘겨줘도 우리 못이고 정화작업을 해서 단장을 해놓으면 우리 정자가 더욱 더 빛날 것이고 우리 동네도 옛 연꽃향기 그윽한 마을로 탈 바꿈할 것이고 혈족들도 풍요로워 질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이 일을 도무지 마다할 하등의 이유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 매입을 신청하면 얼마를 문중손에 쥐어줄 것이냐 하니 수 억의 금액을 제시하여서 그 길로 뜻 있는 종친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쫓으니 대다수가 찬성을 하는 바이였다.
선조의 피 같은 위토이니 지키자는 쪽과 빈곤한 문중재정의 미래 100년을 본다면 이런 기회도 없다는 절박한 쪽이 엎치락 뒤치락 끝 없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네 심장 같은 땅을 팔아서 후세에 무슨 이득이 있을 것인가 하는 명분유지파의 피 튀기는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니 너희들은 객지에서 문중이 어려울 때 십시일반으로 본향의 종친들이 호주머니를 털 때 뭘 했느냐는등 미래발전파 종친들의 아우성이 소나기처럼 난무했다. 양쪽 말씀들이 일일이 다 맞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관공서와의 일이다보니 이 번 달 말에는 매입신청서를 접수하기로 약속을 한 터라 큰 난관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금액이 작은 것도 아니고 까딱하면 공무원의 모가지가 달린일이라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누차 만나서 몇 번의 회의가 있었고 만장일치로 가결 된 일들이 객지에 살고있는 오봉공파 주손의 종반들이 무더기로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끝 없는 논쟁이 두 시간을 이어졌다. 바위와 계란의 싸움이었다.
주인이 일어섰다. 시월 묘제 때 담판을 짓지요. 요즘 문회도 민주적 절차로 운영 되기때문에 시월중순 묘제 현장에서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라고 주인이 얘기했다. 숨 죽인 듯 고요한 회의장이 냉기만 피어 올랐다. 한 치도 양보 없는 쌍방의 종친들이 싸움을 다음으로 미루자는 듯 슬며시 그러지요 했다. 전쟁의 포화로 화염만 자욱한 폐허에서 그래도 자기들의 의견을 심사숙고해달라고 마지막 당부들이 이어지고 재실을 일어선다.
20여명의 사람도 통일 된 의견을 내걸지 못 하는데 그 것도 피붙이들인데도 이러니 나라의정치는 얼마나 힘들까하는 하얀 생각이 머리를 맴돌며 현양재 마루턱에서 세월이 휘청 거린다. 돌아가신 先考가 유난히 그리운 아침이다. 하늘이라도 맑았으면...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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