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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말하다(84 회 마지막회ㅡ 1)ㅡ유, 불, 천이 조화를 이룬 천진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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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427회 작성일 16-07-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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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오묘하게

조합을 이룬 천진암ㅡㅡㅡㅡ마지막회1

                                                  계영      이상근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닌 30여 년을 공사하고도 아직 주차장과 대성당 터밖에 닦지 못했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큰 대성당이 들어설 3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가 장관입니다. 주차장 옆에 작은 성당이 있지요. 내가 다니는 신흥동 성당에 계시던 보좌신부님이 이 천진암 성당에서 근무한다는 말을 듣고 인사드릴 겸 아내와 함께 찾았으나 부재중이라고 합니다.

우리 집은 대대로 불교집안으로 결혼할 때도 아내가 천주교신자라 해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물론 아내도 부모님 생전에는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는 다짐 하에 결혼을 했으나 집안이 편치 않을 때는 [예수쟁이]가 들어온 탓이라고 어머니는 아내에게 돌리더군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개종을 권했으나 나는 응하지 않았지요. 오랜 세월동안 내 몸속에 흐른 불교의 피가 쉽게 허락하지 않은 탓일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종을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동생 사업에 아버지가 보증을 서 살던 집이 차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집을 온전하게 갖고 있는 동생은 부모님을 끝까지 책임지기로 하고 모셔갔습니다. 자기 집을 팔아 빚을 갚으면 이혼 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는 동생 내외의 협박에 아버지가 굴복한 셈이지요. 나는 어느 상가 지하의 셋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2년여 고생 끝에 분양받은 아파트의 입주 날짜가 다가오더군요. 기뻐하기 보다는 초조하게 쫒기는 듯 하던 아내는 입주하기 일주일 전 동생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아파트로 부모님도 같이 모시고 입주하겠다는 것이지요. 나는 고마워서 고개를 숙였고 동생들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제수씨의 갖은 구박을 목격한 아내의 결단이었습니다. 참으로 모진 구박이었습니다.

일 년 정도 살아보고 모시라는 친구들의 조언도 있었으나 새집에 맛들인 후에는 다시 모실 자신이 없어 아예 입주할 때 사고치기로 했다는 후일담도 털어놓더군요. 역시 내 아내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돌아오신 부모님은 아내에게 성당에 나가라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수시로 성모상을 깨끗이 닦는 것으로 마음을 표시했지요. 아내와 아이들은 이제 떳떳하게 다닐 수 있었으나 나는 아직도 부모님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집 한 채와 바꾼 신앙이라고 나는 아내를 놀렸지요.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대세를 받았고 뒤이어 어머니도 영세를 받고 제일 늦게 내가 입문을 했습니다. 아내 한 사람으로 인해 뿌리 깊은 불교집안이 천주교로 개종했으니 한 여인의 노력이 이처럼 대단한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요. 아내의 이러한 지혜가 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천주교 불모지에서 신앙을 일으킨 천진암의 역사와 우리 집안의 천주교 개종사건은 어딘지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더군요. 처음 와 본 천진암이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광장을 지나 천진암(일명 천진사)터로 가는 길은 약간 가파릅니다. 뒤에 따라오던 아내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더니 멈추어 서더군요.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고맙다고 합니다. 영문을 몰라 돌아서서 바라보았습니다.

첫째는 나를 계속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고, 둘째는 온 가족이 내 뜻대로 신자가 되어줘서 고맙고, 셋째는 시부모님을 끝까지 내가 모실 수 있게 만든 징그럽도록 완고한 당신의 그 고집이 고마워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기껏 전세 살면서 고맙기도 하겠다.” 하면서 나는 웃어 넘겼지요. 당시 나는 또 다른 동생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경험 없는 사업을 인수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방황 할 때였습니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내의 말이 싫지는 않더군요. 앵자봉 단풍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아름답습니다.

천진암 터는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터전으로 보아서는 매우 작아 보이더군요. 이 작은 암자가 있던 바로 이곳이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의 발상지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벽 선생은 어떠한 연유로 불교 암자인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금세기에 들어 천주교와 불교계가 유난히 가깝게 지내고 있지요.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화목을 도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아마도 이런 전통적 인연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릅니다.

천진암(天眞菴)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워낙 작은 산골 암자였던 탓일까요. 그러나 다행히 천진암 홍보서에 천진암은 고조선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단군영정인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 각 혹은 천진 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고 하였습니다.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은 광암 이벽을 위시한 강학회원들이 하늘 뫼(天山)라 부르며 숭배하던 산입니다. 이곳에서 발원한 계곡을 끼고 멀리 퇴촌읍내와 팔당호가 한눈에 보일만큼 전망이 좋습니다. 비록 불교 암자지만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이제는 신도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일본에서도 초기 천주교가 탄압을 받을 때 관음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다 하지 않습니까. 천주교 신자들도 이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은 갖추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심산구곡에 위치한 천진암으로 광암 이벽이 들어와 자리 잡자 그를 흠모하여 처음부터 강학회에 참여한 사람은 만천 이승훈, 직암 권일신과, 선암 정약종 등 3명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 후 대학자인 녹암 권철신이 합류하면서 일반 학문부터 서양의 신학문까지 섭렵하는 학회가 되었지요. 권철신과 권일신은 형제이며 정약종은 당대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의 친형입니다. 이벽을 포함한 이들 5인은 천주교 창립 5성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잠들어 있는 천진 암은 그래서 천주교 최고의 성지가 되었지요.

처음엔 실학의 모임이었으나 이벽은 처음부터 천학(天學)에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5년여를 계속하는 가운데 이벽은 천학을 천주교로 승화 발전시키기에 이르렀지요. 막연히 [하늘]이라고 통칭하던 우리민족의 오랜 개념을 깨고 하늘을 존재하는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최초의 신앙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벽의 가장 큰 업적은 이승훈을 북경의 천주교회에 파견하여 영세하도록 한 점입니다. 정식으로 로마교회로부터 전승하여 받고자함이었지요. 이승훈은 북경의 북천주당(북당)에서 프랑스인 주교인 그라몽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아 한국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귀국한 이승훈은 곧바로 이벽에게 영세를 했지요. 이벽은 권철신 형제는 물론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영세를 하여 한국천주교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당시에는 태양력이 조선에 도입되기 전이었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01), 초이레(07), 열나흘(14), 스무하루(21), 스무여드레(28)의 일주일 단위로 나누어 임시 주일을 정했지요. 지금의 일요일을 주일로 한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성직자 없이 자생한 조선의 천주교를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노력한 흔적입니다.

천진암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오자 이벽은 5년여의 천진 암 생활을 청산하고 한양 수표교 인근의 자택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지요. 천진 암에서의 연구와 저술활동을 토대로 본격적인 포교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벽은 원래 전형적인 양반가문이었습니다. 노론이 득세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자 벼슬길을 마다하고 실학에 전념하던 선비였지요. 그래서 수표동에 있는 이벽의 집은 일반 상민과 중인 계급의 신도들이 출입하기에는 주위의 이목이 번거로웠습니다.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고 모임을 갖기도 불편하고 힘들어 명례방 (명동)에 있는 제자 김범우의 집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김범우는 중인 계급의 한의원이며 유능한 통역관이기도 했습니다. 장소가 의원이므로 양반과 상민들의 출입이 자유롭고 집회를 하기에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야 비로소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는 이른바 [형제][자매]의 진정한 신앙의 터전이 마련된 셈이었습니다. 고관대작의 부인에게 자매님이라 부르며 양반들이 상민들에게 형제님하고 불러주니 경천동지할 변화가 아닙니까. 천주교는 급속도로 전파되었지요. 일등공신은 다섯 성현의 부인들이었습니다. 한자로 된 성서와 책들을 쉬운 한글(언문)로 번역해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이 있던 터는 바로 한국 천주교의 중심, 지금의 명동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으니 우연만은 아닌 것 같군요.

초창기 활동이 모든 백성의 축복을 받는 신앙생활은 아니었습니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수백 년을 내려온 조선이었지요. 백성의 주인은 오직 왕 뿐이며 백성은 왕의 자식으로 굳어진 왕조사회였습니다. 그런 조선이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어찌 용납이 가능 하였겠습니까. 점차 눈에 보이도록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광암 이벽은 당연히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경주이씨 문중에서부터 난리가 났지요. 아버지는 이벽을 집안에 감금시키고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회유했습니다. 아예 아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로 위협까지 했으나 허사였지요. 식음을 전폐하는 단식과 철야기도와 묵상으로 버티던 이벽은 탈진상태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간절한 설득을 외면한 채 집안에 감금된 지 14일 만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른바 [을사박해]라고도 하는 최초의 탄압에서 한국천주교 역사에 사실상 최초의 순교자는 이벽이었습니다. 천주께 드린 최초의 제물이기도 했지요. 다산 정약용이 선학(仙鶴)이라 부르며 신선세계의 학에 비유했던 고고한 성품의 이벽이었습니다. 신라 법흥왕 때 불교의 이차돈이 순교한 사건과 버금가는 한국종교사에 길이 빛날 이벽의 순교였지요. 편협한 정치가 부른 비극이었습니다.

이벽의 순교사건을 계기로 조정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명례방 임시성당의 주인인 김범우가 경남 밀양 땅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결국은 절명하였습니다. 이벽에 이어 두 번째 제물로 바친 순교였지요. 또 한 차례 조정에서는 한양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신해박해의 서곡이 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조정과 사대부에서 천주교를 탄압한 이유는 정치적 사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봉행이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유사 이래 어느 왕조,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는 충과 효의 근본으로 삼아 왔지요. 아무리 가난한 상민도 부모의 제사와 명절 때 차례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벽을 비롯한 지도층도 가문대대로 이렇게 살아왔으며 당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성서에 하느님은 유일신으로 그분 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말라했습니다. 엎드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권일신은 일찍이 제사가 문제시 될 것을 우려해 북경에 있는 천주교회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세히 알아오게 했습니다. 조선은 동양문화권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문화를 가진 민족입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조선의 문화를 모르는 서양인 주교는 제사봉행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경 주교의 명령을 선포하자 조선 천주교계는 혼란스러워졌지요.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부모와 선조의 제사까지 배척하라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조정은 물론이요 가장 힘이 되어야 할 양반사회가 등을 돌렸습니다. 탄압의 조건과 명분을 만들어 준 셈이지요. 이를 빌미로 조정에서는 또 다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는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성직자 없이 자생적으로 꽃피운 자랑스러운 종교입니다. 모든 교리와 규율을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했으면서도 가장 예민한 부분인 제사문제를 왜 피해가지 않았을까.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이승훈과 권철신, 그리고 정약종 등이 순교한 신유, 기해, 병인박해 등 수없는 탄압의 길목에서 죽어간 수많은 신도들의 희생을 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너무 아쉬워 한 신자의 입장에서 토로하는 푸념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나도 신혼 초에 겪어온 처가와의 제사에 관한 갈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 사건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하여 권일신이 체포되었습니다. 임금은 그의 높은 학문과 고고한 품성을 잘 알고 있었지요. 사약을 내리라는 상소에 윤허를 미루고 그가 천주를 배반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했다는군요 추천0

댓글목록

김광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제가 1993년에 쓴 <소설 윤유일>이란 제목이 붙은 소설이 생각이 납니다.
중국 신부 주문모를 모셔온 분이고 북경을 10여차례 걸어서 다녀온 분이지요. 이번에 복자 품위에 올랐어요.
20여년전에 지금은 세상에 없는 황석두 루가 서원 한종오 사장과 천진암 중국 열하 다녀오던 생각이 납니다.
인터넷에 소설 윤유일이라고 치면 나오지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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