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아내가 간다
아내의 한달살이가 내일 모레 끝이 난다. 이번 시골 한달살이는 별 다툼 없이 무난히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촌놈과 도회지 처녀의 50년 결혼생활은 한 마디로 전쟁 같은 삶이었다. 가부장적인 남편에 초현실적인 아내의 사고방식은 사사건건 불꽃을 튀기며 살아왔다. 결론적으로 보면 은퇴하기 직전까지는 내가 이 결혼에서 점령하고 살았다고 한동안은 자부심이 충만했지만 은퇴하고 보니 폐허된 전장 위에 부하들을 다 잃은 초라한 몰골의 패장의 모습만이 거기 서 있었다. 아내는 복수혈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장수처럼 그 위엄이 옛모습이 아니었고 사사건건 논리로 지배하려 든다. 니가 그 만큼 했으면 이제는 응분의 댓가를 치를 때라는 눈초리가 시퍼래서 그져 알아서 기는 형국이다. 한때는 참 사랑스럽고 풍요로운 여인이었는데 어쩌다가 저리 됐나 싶어 생살을 꼬집어 보면 아! 이것이 다 인과응보의 소산이구나 하고 금방 깨달음이 와서 가자미 눈으로 늘 안전한 곳을 살핀다.
아내가 내려오면 한 달 동안의 청구서를 내민다. 그것은 아내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특히 먹성이 좋아 맛집을 꼭 수배를 해서 내려 오신다. 젊을 때야 쉬운 일일테지만 나이들면 움직이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래도 한달에 한 번씩 오는 손님이라 그리고 그렇게 약속을 하고 한 달씩 살기로 했던터라 대장부 약속을 소홀이 할 수가 없기도 하다. 이번 달 청구서는 여행의 계절임에 청구내용이 넘치고 넘쳐나 과연 무너진 삭신으로 다 해 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처음부터 진을 뺐다.
그 중에 한려수도 여행 일주일이 들어 있었고 그 여행에서 나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줄 알았다. 노구에 폰으로 일일이 숙박을 에약하고 맛집을 찾아내고 명승지를 찾아 자가용으로 모시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취미가 여행인 아내인지라 그 열정과 호기심을 막을 길이 없었다. 수 많은 취미가 널려 있는데 하필이면 여행을 좋아해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하고 속을 끓여 보지만 다 무소용이고 한 달 동안 잘 모시겠다는 약속때문에 그져 눈치만 살핀다. 지은 죄가 많으니 속으로 그냥 삭이는 것이 상책이라 묵언수행을 하는 편이다.
아내는 또 해수탕을 좋아해서 일 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다. 아내는 해수탕에 들어가면 거의 3시간을 유유히 즐기신다. 늦은 아침을 먹고 해수탕에 들어가면 오후 한 두시 쯤 나오시니 나는 늘 허기가 져 초췌한 얼굴로 차에서 기다린다. 도대체 서너시간을 무얼 하시는 지 나는 도저히 이해불가다. 남자들이야 물 몇 번 끼얹고 온탕에 5분 냉탕에 오분 타올로 비누칠 하여 삭아진 삭신 고이 씻어내도 20분 안에 거의 마무리 한다. 그러니 한 시간이면 족하다. 나머지 두 시간 이상이 지겨워 계란도 까먹고 싫어하는 음료수도 마셔가며 시간을 보내도 하세월이다.
아내의 식도락도 거의 도전적이어서 새로운 것에 집착한다. 이를테면 활복을 고집하면 활복을 꼭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계절이 활복의 계절이 아닌데도 활복을 찾아 다닌다. 지난 겨울에는 물곰탕에 맛을 들여 늦은 봄까지 물곰탕만 먹었다. 갈치조림으로 반년을 보냈다면 물곰탕으로 반년을 보냈다.
먹고 싶은 걸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가 하고 내심 저 것도 내탓인가 하고 고민을 했을 때도 있었다. 어쨌던 옛날의 아내는 아니었다.
몸무게에 목숨을 걸면서 근심걱정을 하면서도 많이 드신다. 드셔도 너무 많이 드신다. 그만 드셨으면 하는데 뱃살이 없으면 허리가 구부러진다는 핑계로 그져 드신다. 갸웃하면서도 아내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서 좀 줄이는 게 어떠냐고 하면 먹는 것 갖고 되게 그러네 하고 눈을 부라려 힐끗 움츠린다. 그래 건강하면 됐지, 저 나이에 저 정도면 건강한 거야 하고 자위하며 먼 산을 본다.
그래도 낼 모레면 떠난다니 아쉽기도 하다. 늙은 나이에 혼자살기가 간단치는 않지만 또 홀로살기가 시작 된다. 새롭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 보리라. 아내가 또 해외여행을 간다니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어 본다. 삼복이 가까워 와도 우리는 훨훨 홀가분하게 한달을 살아보리라. 아침 햇살이 눈부시지만 아내의 아침 밥상이 더욱 눈부신다.
댓글목록
아이스킨님의 댓글

부부는 그게 탈이죠 서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거
참말로 그것 좀 없어지면 좋을것을 어쩌면 좋데유
계보몽님의 댓글

옛날엔 그런일이 조금 있었지요
시방은 언감생심 상상도 못해유 ㅎ
스님처럼 산다니까유
감사합니다 아이스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