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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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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22회 작성일 15-10-2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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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열정과 집착




“팀장님, 저 퇴근할게요!”

은서는 웹디자인어와 통화가 길어져 동료들이 다 퇴근한 후 하루 업무를 마감했다. 홈페이지를 단장하기 위해 터득해야할 지식이 많아 프로그래머와 웹디자인어에게 조력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세요.”

영주도 퇴근하려는지 책상 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은서의 퇴근 인사에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영주는 흘려듣던 말을 뒤늦게 깨달은 듯 고개를 처들었다.

“이봐요, 한은서 씨!”

은서는 문을 닫다가 도로 열었다.

 

 

“예, 팀장님!”

“앞으론 퇴근 보고는 하지 마세요!”

“옛?”

“시간 되면 그만 일 끝내고 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내 방에 들어와 퇴근 인사하는 거 봤나요?”

“아, 아니요!”

“자율적으로 근무하세요! 근무 시간에 농땡이 깐 인간들이 꼭 업무 시간을 연장해 열심인 척 한단 말이야!”

영주의 황당한 소리에 은서는 뒷통수가 뻐근했다. 주먹만한 불길이 치밀어올랐지만 은서는 꾹 눌러 참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근무 태만이 여기서 왜 나와! 그것이 영주의 이유없는 미움의 일환일지라도 부단히 노력하며 보낸 하루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것 같아, 사무실을 나오는데 설움이 왈칵 밀려왔다. 정말이지 당장 영주에게 달려가 반박하고 싶을 만치 원통했지만 대적할 처지가 아니었다.    견디자.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부하 직원으로 대우해 줄 거야. 꼭 필요한 직원이 되는데 전력을 쏟자고. 영주의 생트집을 자장가로 삼아 보자고.

 

 

회사 바깥으로 나오자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비명을 내지르던 가슴속이 좀 트였다. 어스름이 스멀스멀 잠입하고 있는 건물 앞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도로를 등지고 들어서던 차 한 대가 끽 하며 멈추었다.

“벌써 출근 시작한 겁니까?”

차창이 내려가며 보이는 얼굴은 면접관이었던 K 마트 사장 김빈우였다. 은서는 공연히 그날 일로 뜨끔해 말없이 고개로 인사만 했다. 빈우의 편협한 사고로 인해 조심스러워야할 자리에서 발끈해 불합격 통보를 받을 뻔 했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었다.

 

 

“떨어질 줄 알았죠?”

은서는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곧바로 걸음을 옮기는 데 빈우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돌아보니 빈우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냐고요?”

빈우의 목소리가 왠지 유쾌했다. 비즈니스 정장차림의 그는 목소리에 비해 다소 얄미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은서는 예상과는 달리 그가 점수를 후하게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순간 스쳐갔다.

 

 

“솔직히 그랬어요. 사, 사장님께서 응징할 거라고 여겼죠.”

“응징이요? 뭐 그럴가도 생각하긴 했지요. 하지만 성급한 판단을 한 내 자신을 응징하기로 했답니다. 베스트통신 사원이 된 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허심탄회한 자기 고백만큼이나 표정도 환했다. 은서는 산뜻하게 그날 일을 정리하는 빈우의 처신에 어떤 앙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부서는?”
“홍보팀이에요!”

“아, 그래요. 왠지 반갑네요. 차가 아직 없는 것 같은데, 내 차에 타세요. 금방 되돌아 나갈 거거든요. 가던 길에 내려주던가, 뭐 그럴게요.”

 

 

“괜찮아요. 그럼!”

다른 뜻이 없을 것 같은 빈우의 제의였지만 그의 차를 탈 마음은 없었다. 은서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발길을 돌렸다.

“내 차에 동승하면……”

빈우가 은서의 팔을 잡고 세우며 말을 이었다.

“홍보팀에서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래요!”

은서가 무슨 소린가 싶어 돌아보는데, 빈우의 등 뒤쪽으로 영주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영주의 쏘아보는 눈빛이 얼굴을 꽤뚫을 것 같았다.  

“그것 놔, 빈우 씨! 우리 회사에 와서 이 무슨 추태야!”

영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고보니 빈우의 손이 아직도 팔을 잡고 있었다. 은서는 죄 지은 것없이 당황하며 팔을 뿌리쳤으나 빈우가 더 세게 움겨쥐었다.

 

 

“재밌군. 영주가 질투를 다 하다니, 하하하!”

“그 팔부터 어서 놔! 빨리!”

“영주가 화 내는 걸 보니 즐거워지는데. 한은서 씬 어떠세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세요! 무례하게 이 무슨 짓이에요. 어서 놔요!”

은서는 난처하고, 빈우의 유치한 노리개로 전락한 것에 분개했다. 대체 두 사람은 무슨 관계지?

은서가 벌컥 화를 내자 비로소 빈우는 팔을 놓았다.

“미안해요, 한은서 씨! 영주가 질투하는 거 처음 봐서, 그 신선함에 한은서 씨가 기분 나빠하는 걸 몰랐어요.”

빈우가 미안해하는 모습을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영주가 빈우의 차 문을 소리나게 열어젖히며 말했다.

“안 갈 거야!”

 

 

“나중에 밥 한 번 사 드릴게요. 좀 친해져 보라고 내 차를 타라고 했는데, 큰일날 뻔 했네요, 훗훗훗. 그럼 나중에 봅시다!”

빈우가 재빨리 속삭이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느긋하게 차로 걸어가 올라탔다. 은서는 이 일로 영주의 심통이 심해질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남자니?”

강혁이 실내포장마차로 들어서는 도현을 보고 눈이 커졌다. 은서는 쉬는 날이라고 집에 와 있는 강혁이와 밥을 지어 먹고 이곳으로 왔다. 도현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아 문자를 남겼는데, 도현이 뒤늦게 그것을 읽고 달려온 것 같았다.

“응, 장도현 씨야. 어떻게 단 번에 알아 보니?”

은서는 도현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잖아. 인물이나 이미지, 성격 등이 고루 좋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 잣대로 보니 딱 저 남자 같더라.”

“나 보다 더 날 잘 아는 것 같아 오싹한데, 헤헤.”

도현은 호텔 내 크리스탈홀에서 행사 준비를 독려하느라 오후부터 분주하게 보냈다. 국무총리가 주최하는 만찬 행사가 저녁 7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 모나코 대통령을 모신 자리여서, 경호원들과 사복경찰들이 호텔 요소에 배치되었고, 개최 홀엔 금속탐지기가 동원된 수색과 출입 통제가 실시되었다.

시간이 임박하자 백여 명에 육박하는 참석자들의 테이블에 음식들이 날라지기 시작했다. 도현은 국무총리 비서실에서 나온 직원 한 명과 모나코 경호원팀에서 착출된 경호원 한 명, 이렇게 셋이서 홀에 서빙되는 모든 음식을 미리 시식했는데, 독국물이나 해를 끼칠 이물질이 투입되었는지 점검하는 필수 코스였다.

 

 

만찬이 시작되자 참석자들의 만족도를 체크하기 위해 뒤쪽에 선 도현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같이 참관 중인 행사매니저에게 리필이 필요한 테이블에 서빙 직원을 보내라는 지시 등을 내렸다.

도현이 그러는 사이에 그의 사무실 책상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도현이 휴대폰을 빠뜨리고 나가는 바람에 은서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다. 9시에 행사가 끝나 사무실로 돌아온 도현은 은서가 보낸 문자를 보고 답신 보낼 겨를도 없이 서둘러 퇴근했다.

은서는 동네 어귀의 포장마차에 있으며, 좀 기다려 보고 안 오면 집에 들어갈 거라는 내용이었다. 친구와 술 한 잔 하는 중인데, 그 친구에게 도현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덧붙였다. 부재 중 전화에 은서의 전화가 여러 통 있었다. 연락이 안 되자 문자로 대체한 것 같았다.

 

 

도현은 차를 몰며 별장에서 안은 은서와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행위는 아니었다. 꽃샘 추위가 완전히 사라진 완연한 봄 날씨였고, 야외에서 식사하는 것이 꽤 분위기 있을 것 같았다. 은서에게 멋지고 분위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별장 관리인에게 저녁 식사 준비를 부탁하게 되었다.

왜 춤을 추자고 했었지? 도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은서가 별장이 인상적이라고 했고, 그 말에 성장하면서 간직된 별장에서의 추억 몇 가지를 말해 준 것 같았다. 여름에 별장 뒤편 수영장에서 선탠의자에 누워 있다 잠이 들어 새까맣게 탄 일이며 겨울에 수북히 쌓인 눈 때문에 별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지냈던 일, 친구들과 벌인 몇 번의 파티와 가끔 혼자 찾아와 산림욕을 즐기다 간다는 얘기들이었다. 얘기를 듣는 은서의 눈빛이 너무나 맑았고, 간간히 짓는 미소가 너무 예뼜다. 만지고 싶었다. 그녀의 볼을 쓰다듬고 눈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그녀를 가슴에 안고 싶었다.

 

 

도현은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대신에 춤을 추자고 말했다. 은서가 경계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녀 역시 앞지르는 생각은 하지 않아 보였다. 그냥 같이 춤 추자는 거야. 둘 다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의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은 그녀와 손을 잡았다. 천천히 스탭을 밟는데, 그녀에게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매우 유혹적이고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도현의 몸을 그녀에게 점점 밀착시키도록 한 것 같았다. 이윽고 어떤 욕망의 집대성 같은 매혹에 사로잡히자 도현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달콤한 그녀의 입술은 아득한 그리움에 불을 지피웠다. 그녀를 더 알고 싶었다. 그녀의 몸의 굴곡을 느끼고 싶었고, 도현은 행동으로 옮겼다. 손을 통해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부드럽고 풍만했고 깊었다. 입술과 혀로 그것을 다시 느꼈을 때, 도현은 은서의 모든 것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이슬에 젖은 꽃잎을 헤치고 슬며시 들어가자 따스한 무엇이 촉촉하게 감쌌다. 도현은 그것이 은서라고 생각했다. 애무로는 만져지지 않았던 은서의 깊은 곳이 듬뿍듬뿍 도현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도현은 은서와 함께 있는 남자로 보고 내심 화가 솟구쳤다. 친구라기에 당연히 여자친구일 줄 알았다. 면 바지에 후드티를 입은 남자는 은서와 연인처럼 잘 어울렸다. 자신 못지 않은 키에 쩍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신체의 소유자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은서의 소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도현은 둥그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의 가운데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고아원에서부터 알고 지낸 친구에요. 도현 씰 보고 싶다고 해서 불러냈는데, 괜찮죠?”

도현은 질시 어린 감정을 야기시키던 강혁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대신에 막연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려운 시기를 의지하며 같이 성장해 온 두 사람의 지난 모습들이 간접적으로 저장된 기억속 영상들로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렇게 만난 사이라면 동성 같은 친구일 것이다. 도현은 강혁에 대한 경쟁심을 완전히 접었다.

 

 

“이런 친구 있으면 있다고 말해 주지 않고. 강혁 씨 라고 했죠? 인상이 참 좋으십니다.”

도현은 별장에서 관계를 갖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그와 사랑을 나눈 짓은 성급하고 정숙하지 못한 행위였다. 자책감과 후회가 밀려들긴 했지만 그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 격정적이었었고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냉정하게 돌아보면 중단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에 대한 알 수 없는 믿음이 몸이 느끼고 원하는 대로 사랑하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은서는 그와의 첫 관계를 소중하게 회상했다.

“도현 씨도 만만치 않은데요! 세르비아호텔 기조실장님이라고요?”

강혁은 내심 은서가 걱정되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훤칠하고 환한 데, 은서에게만 충실할 수 있는 남자일까 라는 의문이 피어났다.

 

 

“예, 그렇습니다.”

“젊은 나이에 직책이 높군요, 장도현 씨.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강혁은 세르비아 호텔 회장의 성[姓]이 도현이와 같은 장 씨 라는 것이 불현듯 스쳤다. 세르비아 호텔이 어떤 곳인가를 강혁은 나름대로 알아 보았다. 주변인들이 알고 있는 그 호텔은 별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이라는 것과 회장 성함이 장철옹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땐 회장의 성과 도현의 성이 같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이곳에 들어와 은서를 통해 도현의 이름을 알게 됐고, 도현이완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의 이름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의 직책과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그 의문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그냥 제 생각인데요, 그 호텔 회장님과 연관이 있는 분이 아닌지 싶어서요?”

은서는 강혁의 질문에 당황하는 도현을 보고 자못 놀랐다. 많은 기업들이 능력과 성과 위주로 승진과 연봉를 책정하고 있는 추세여서 도현이 직책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하하, 예리하시네요.”

도현은 굳이 숨기고자 했던 얘기가 아니어서 순순히 인정했다. 이 상황에서 부인하면 은서에게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결국은 밝혀질 사안이지 않는가.

“놀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은서와 강혁의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고 도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현 씨…….”

“설마 하고 물었는데, 이럴 수가!”

“난 그저 봉급쟁이일 뿐입니다. 지분이 좀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우리 고모거든요.   회장이신 우리 아버지 역시 약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고요. 이런 비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그 호텔의 유일한 상속자라고 말들 합니다.”

도현이 계면쩍은 낯빛으로 자랑할 일이 못 된다는 듯 말했다.

은서는 겸손한 도현의 태도에 부담감이 좀 수그러들었다. 도현이 호텔 회장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까닭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낀 은서였다.

“고모님이 주인이라니요?”

강혁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추궁하듯 물었다.

 

 

“흠, 이런 얘길 누구에게 해 본 적이 없는데…… 강혁 씨가 꼭 은서 씨 친오빠 같습니다. 의문점을 소상히 밝히지 않으면 은서 씨와 사귀는 걸 용납하지 않을 듯 하군요.”

“예, 그럴 수도 있죠.”

강혁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은서는 얼굴이 굳어 있는 강혁을 보고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나중 일, 두 사람이 잘 돼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될 경우를 강혁은 미리 점검하고 있었다. 속 깊은 강혁인 줄 알지만 도현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싶어 은서는 조바심이 났다. 그런 부분을 논하기엔 도현이와 만난 기간이 너무 짧지 않은가.

“전 은서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목숨 걸고 막을 겁니다. 복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은서와 먼 약속 따윈 하지 말아야 할 도현 씨라고 생각하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강혁 씨. 은서 씬 내가 선택했습니다. 내가 은서 씨와 무슨 약속을 했거나 앞으로 한다면 강혁 씨처럼 나도 목숨 걸고 지킵니다. 은서 씰 아무 의미 없이 만날 만큼 철없는 나이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행동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답니다. 그러니 안심해도 될 겁니다.”

“부디 지금 한 말 반드시 이행해 주기 바래요. 난 은서가 결혼하기 전까진 은서를 보호해 줄 생각이에요. 은서가 이제 고아원 시절의 그 은서가 아니라고 해도 내겐 여리고 안쓰럽거든요.”

“강혁아…….”

은서는 강혁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좋은 친구였고, 동성처럼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혁의 마음속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연민……. 고아원 마당에서 강력하게 새겨진 그녀에 대한 연민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것 같았다.

“고마운데, 너무 그러진 마. 우린 그냥 친구잖아.”

은서는 도현이 강혁을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수위를 조절하는 차원에서 말했다. 자칫 강혁의 감정이 사랑으로 비춰질 염려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니까 이러는 거야. 네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돼서. 도현 씬 이해하시겠어요?”

“물론이에요. 은서 씨에게 이렇게 든든한 친구가 있어 되러 기분 좋은데요.”

도현이 괜찮다는 듯 쳐다보자 은서는 조바심이 좀 가셨다.

“이해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래, 고모님이 실질적인 호텔주인이란 소린 무슨 의미에요?”

“아, 예. 그 얘기하다 말았죠. 음, 그러니까, 세르비아호텔은 고모부의 호텔이었어요. 고모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그 호텔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더군요. 아마 그 사건으로 고모와 고모부가 이혼하신 것 같아요. 불행히도 고모부는 이혼 후 얼마 안 돼 돌아가셨답니다. 고모는 고모부를 불쌍히 여기셨어요. 부도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거라고 말했죠. 이혼 후 고모는 부동산중개업을 했어요. 거의 무일푼이었던 고모지만 수완이 좋았던 것 같아요. 부동산중개업으로 번 돈과 융자를 한 자금으로 땅을 샀답니다. 그 땅이 개발지역에 포함돼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대요. 고모는 그 돈으로 고모부를 추도하는 마음으로 세르비아호텔을 사들였답니다. 하지만 경영 일선엔 나서지 않았죠.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에게 호텔 운영을 맡겼어요.

 

 아버진 동업자에게 무역회사를 넘기고 호텔경영에 전념하게 되었답니다. 고모는 곧 지금의 고모부를 만났고, 하와이로 이민가셨죠. 하와이에서 고모부와 관광호텔을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르비아호텔 지분은 그대로 소유하고 계시면서요.”

은서는 어딘지 귀에 익은 듯한 도현의 얘기에 가슴이 아팠다. 가정부아줌마에게 들었던 아버지 호텔 얘기가 스쳐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했단 소리는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싸우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고, 은서는 막노동을 하고 돌아와 잠에 곯아 떨어진 아버지에게 엄마의 대해 차마 물어보지 못했었다.

“은서 아버지도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대요. 은서가 어렸을 때요. 인연인지 하필 호텔에서 근무하는 남자를 만났네요, 그러고 보니까.”

강혁이 새삼 깨달은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