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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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름답게, 그렇게
“은서 양을 챙기셔야 할 시점 같습니다, 회장님.”
김 비서의 어조에 간절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며칠 간 미국 본사에 다녀 온 강 회장은 은서의 근황을 알아 보기 위해 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김 비서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은서의 후견인이라고 하고 포섭해 놓은, 미애라는 베스트통신 홍보직원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 직원이 은서의 직장 스트레스가 정도를 넘고, 퇴사 압력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고 했다.
상사가 은서가 교제 중인 남자를 트집 잡는다는 말에 김 비서는 강혁에게 전화를 걸어 은서가 사귀는 남자가 누군지 확인했고, 그 남자와 은서의 상사가 예전에 애인 관계였던 것을 빈우를 통해 밝혀냈다.
빈우가 은서의 상사와 교제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김 비서는 빈우 사무실에 들러 박영주 팀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넌지시 물었고, 빈우는 그녀와의 사이가 시큰둥해졌다며 그녀가 과거 남자에 집착하고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했다. 바로 그 남자가 현재 은서와 교제 중인 남자라며, 은서의 상사가 은서를 핍박하는 이유도 그것이라고 김 비서는 진단했다. 때문에 강영주의 핍박은 집요하고 끈질길 것이고, 은서는 강 회장의 기대와는 다른 불필요한 경험만 그곳에서 하게 될 것이기에, 지금 이 시점이 은서를 챙길 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예, 회장님. 따님을 나쁜 환경에 그만 두셔야 합니다. 회장님의 의도는 알지만 그것이 은서 양을 해치는 것이라면 쌓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경력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나도 생각을 바꾸어야겠군요. 알았어요. 그런데, 은서에게 사귀는 남자가 있단 소리는 금시초문이네요?”
강 회장은 빈우의 여자 관계가 트러진 것 같다는 김 비서의 보고를 경청하면서 내심으로 반색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빈우가 은서와 자연스럽게 친밀해지도록 은서의 거처를 그의 아파트단지 내에서 물색했었다. 하지만 매물로 나온 집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주고 아파트 두 채를 사들여야 했다. 그러나 가치 있는 투자였다. 아파트 관리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안면을 트고 지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빈우의 상대 여자가 워낙 막강한 배경의 소유자라 자만할 수는 없지만, 은서의 외모와 호감 있는 인상, 강한 의지력을 가진 눈매와 턱선, 긍정적인 성격이 빈우의 환심을 살 정도는 될 거라고 강 회장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빈우가 은서를 좋아하고 상대 여자를 정리해 준다면 금상첨화일 테지만, 강 회장의 목표는 은서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 빈우가 평민인 은서에게 호감을 갖는 정도면 되는 것이었다. 빈우와 그 상대 여자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둘이 자연스럽게 갈라서지 않는 이상, 억지로 빈우의 마음을 돌려 은서의 짝으로 만드는 것은, 빈우가 은서에게 순수한 행복을 줄 수 있을지에 관해 의문을 갖게 할 것이었다.
행여, 그러나 내심 바라는 대로, 두 사람이 갈라서면 빈우는 호감을 품은 은서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지대해, 그 인연만 만들어 놓은 강 회장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서가 베스트통신 회장 딸이 예전에 사겼다는 남자와 교제 중이라는 것이었다. 은서를 찾아낸 시점까지 은서의 신상 정보는 완벽하게 수집되었었고, 강혁이 이외에 남자는 대학시절에도 없었었다.
“최근에 만난 남자 같습니다.”
“그렇겠죠. 우리가 몰랐을 리 없잖아요. 궁금하네요. 상대가 누굽니까?”
“강혁 군이 만나 봤다는데, 은서 양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남자였답니다. 여기서 진지 라는 것은, 남자의 배경이 은서 양과 너무나 차이가 나서, 남자의 의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강혁 군의 면밀한 관찰의 결과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은서가 교제하고 있다면 믿을만한 남자일 겁니다. 힘들 게 살아온 은서의 통찰력과 분별력이 크게 작용했을 테니까요. 정말 궁금해요. 그 남자 누구죠?”
“세르비아 호텔 회장의 아들로, 현재 그 호텔 기조실장입니다.”
“어, 어느 호텔이라고요?”
강 회장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세르비아 호텔입니다. 왜 그러세요, 회장님?”
강 회장은 아연실색해 말을 잇지 못했다. 은서에게 세르비아 호텔 가[家]는 원수 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은서 아버지의 호텔을 그 집안이 음모를 꾸며 갈취한 것이라는 소문을 미국에서 들었었다. 은서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장씨 가에서 호텔을 매입했는데, 일시적으로 호텔을 관리하고 있던 채권단의 큰 손이 은서 아버지와 이혼한 장 여사의 고향 선배 아버지로 밝혀져, 그 내막이 의혹을 사게 되었었다. 그후부터 머지 않아 장 여사의 파렴치한 행각이 교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은서 아버지가 딸의 생모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장 여사는 이혼을 결심하고 그의 재산을 가로챌 궁리로 음모를 꾸몄고, 유령 회사를 설립해 발행한 수표와 어음을 큰 손을 중심으로 조성한 채권단에게 뿌려 지급 보증인으로 세운 세르비아 호텔을 일거에 함락시켜 버렸다고 했다.
그들의 음모가 없었다면, 세르비아 호텔의 상당수의 지분은 은서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은서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비운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또 은서의 아버지가 비명 횡사한 데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은서는 사귀는 남자가 그런 집안의 자식인지도 모르고 불행을 딛고 의연하게 살아온 마음을 거짓없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자기 아버지의 재산으로 배 불리 먹고 있는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한과 복수의 심정이 충천할 집안에 기웃되는 것 자체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고 수치일 것이 자명한 데, 그것을 알 리 없는 은서는 불운하게도 그 집안 자식과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막아야 할 것이었다. 그 집에서도 은서의 신상과 배경을 알면 받아드릴 리 만무했고, 결말은 자책감과 사랑에 대한 상처로 고통만이 남을 은서일 것이다.
“김 사장를 불러 줘요, 김 비서?”
“왜 그러세요, 회장님?”
“은서를 만나야겠어요. 김 사장에게 은서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하도록 할 목적이 생겼어요.”
베스트통신 빌딩 진입로에 도현의 차가 30분 전부터 주차해 있었다. 집에서 일찍 들어오라는 전화가 있었지만, 도현은 은서의 마음을 돌려 놓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여서, 귀가를 재촉한 적 없는 어머니에게 일찍 들어오라는 연유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은서가 사표를 내고 그만 두라는 의미를 알아차렸기를 도현은 바랐다. 영주가 있어 그곳을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은서와 결혼할 거라는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앞 일을 책임지고 추진해 나갈 각오가 서자, 은서에게 그 마음을 전달할 실질적인 행동이 절실하다고 도현은 판단했다. 신뢰감을 주면 은서도 따라 올 것이리라.
도현은 그렇게 생각의 일단을 보여 준 것으로, 밤을 꼬박 새우며 굳힌 마음의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은서를 내려 주고 회사로 출근하면서 생각했었다. 이제 은서가 퇴근해서 나오면 강제적으로라도 차에 태워 별장으로 데려 갈 예정이었다. 늦은 밤에 서울로 귀경하는 차가 없는 곳에 은서를 데려가서 약속을 받아낼 것이었다. 카페나 자기 집에서처럼 대화가 단절될 수 없는 고립된 곳에서 은서를 어떻게든 설득해 낼 것이었다.
아니다, 카페에서는 크게 잘못했었다. 그 자리에서 그 딴 건 우리 사랑에 별개 문제라고 은서를 위로하고 사랑의 마음을 보여줬어야 됐었다. 그러지 못한 건 은서를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은서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것이 이별의 사유가 되는지, 도현은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따져 보고 있었던 거지, 은서에게 본능적인 반감이 밀려들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술집으로 향한 데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을 은서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침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마음이 변화지 않았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그로부터 다시 은서의 마음이 되돌아오는 계기가 되어, 퇴근 때쯤이면 그녀가 이별을 말했음에도 수긍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바람은 은서가 대화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억지로 차에 태워 데려가는 것보다 그녀가 순순히 차에 오르면 대화가 훨씬 수월하게 풀려나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계획은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도현은 은서가 너무나 필요했다. 그녀가 마음을 정리했다고 말하기 전까지 가식적인 모습은 찾을 길이 없는 은서였다. 은서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음을 돌이켜 보면서 도현은 그녀에게 있는 임신할 수 없는 결점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 동안의 자신의 태도는 위선에 불과한 것이며, 은서에게 받은 기쁨과 위안들 앞에 수치스러움을 면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인간이 될 것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은서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는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자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은서가 없는 자신을 그려보았을 때, 그 막막함과 상실감과 슬픔은 비견할 데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은서에게 느낀 정은 사라진 고독과 배반감과 냉담함의 크기보다 훨씬 크고 깊고 넓었다. 그의 마음과 생각들은 이미 은서에게 길들여졌고, 중독되어 있었으며, 예속되어 있어 분리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것을 어제 밤새도록 깨달았다. 은서 없인 안 되겠어. 은서 없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빌딩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쏟아져 나오는 무리들과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며 나오는 무리들을 도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어느 정도 퇴근 무리가 빠져 나갔다고 생각한 도현은 곧 은서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길목을 지키고 섰다.
빌딩 현관문에 영주가 나타났다. 영주는 도현을 보고 놀란 눈을 하더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잰걸음을 내딛었다. 영주가 중간쯤 왔을 쯤 현관문이 열리며 은서와 동료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길…….”
도현은 그냥 지나칠 기미가 전혀 없는 영주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반면에 영주는 은서를 데리러 온 적이 없던 도현이 무슨 이유로 빌딩 진입로를 지키고 있는지 예상할 수가 있었다. 주차장으로 가려던 걸음을 당연히 바꿨다.
은서는 온종일 침울한 모습이었으며, 점심 식사 후에는 어디 아픈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었다. 영주는 어쩌면 은서와 도현이 헤어졌을지 모른다고, 어젯밤의 냉정하던 도현을 떠올리며, 그 이면엔 흔들리는 도현의 모습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자신의 믿음을 되새김질했었다.
“오빠!”
영주는 멋쩍은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도현의 앞에 서며 감동받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도현이 시선을 던졌는데, 마치 모르는 사람을 쳐다보듯 무심했다.
“전화하지 그랬어……”
영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잇다가 도현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은서와 미애가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무척 놀란 낯빛들이었다.
“오빠…….”
영주는 어느새 은서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도현을 보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은서는 도현을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랬던 은서는 다가오는 도현의 어깨 너머 거리쪽을 눈으로 더듬었다.
“가자, 은서야.”
결연한 눈빛의 도현이 은서의 손을 잡아 쥐었다.
영주가 씩씩거리며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서는 영주 앞에서 도현이와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 그 어떤 체면도 자존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가세요, 도현 씨.”
은서는 그의 손에 쥐어진 자기 손을 냉정하게 빼내고 빠른 걸음으로 빌딩 앞을 가로질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인도로 나오자 낯익은 차가 무섭게 질주해 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는 못해, 은서야.”
어느새 뒤쫓아온 도현이 앞을 막아 서며 양쪽 어깨를 잡고 섰다.
“네가 나를 포기해도 난 너를 포기 안 해.”
“…….”
“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것 때문에 네 안에 사랑을 찢어버리지 마. 아니, 네가 아무리 조각조각 찢어 버려도 난 그 조각을 붙여 원래 상태로 만들어 놓을 거야. 그러니 날 사랑하던 일, 단념하지 마. 소용없어.”
질주해 오던 차가 정차를 하고 강혁이 뛰어 내리는 것이 도현의 등 뒤로 보였다.
“날 비참하게 하지 말랬잖아요. 설마 이기심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겠죠? 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여자, 사랑했던 남자로서 도리는 해야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러는 거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욕할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사랑해, 은서야. 우리 허심탄회하게 얘기 좀 하자. 내 얘기는 들어줘야잖아. 너만 얘기했고, 난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어.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줘. 부탁한다.”
“할 얘기 전혀 없어요. 가세요.”
“난 있어. 난 있다고.”
도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난 그대로야. 난 은서를 사랑해. 그렇게 고백도 했었고, 그 고백 속엔 은서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내 마음이 담겨 있었어. 무슨 소린 줄 몰라.”
“그랬었다면 그 마음 던져 버리세요. 미안해서 냉정하게 굴지 못하던 나는 이제 없어요. 도현 씨에게 충분히 사죄를 한 것 같으니, 이제부턴 그만 미안해 하겠어요. 당장 이거 놔요.”
은서가 어깨를 안쪽으로 꺾으며 도현의 손을 뿌리쳤다.
“도현 씨가 나를 만나 손해 본 거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본전 뽑았을 테니, 내 앞에서 얼씬거리지 말기 바래요.”
“이런다고 내가 달라질 것 같아!”
도현이 은서의 양 팔을 움켜 쥐었다.
“네 말 믿을 것 같아!”
은서는 짐짓 분개한 눈으로 도현을 노려보았다.
“이거 놓지 못하겠어요.”
“난 널 놓아 줄 수 없어. 왜냐면, 너도 날 사랑하고 있으니까. 미안하다. 널 강제로 내 차에 태운다.”
“강혁아, 이 남자 좀 떼어내 줘!”
도현이 은서의 다리를 들려는 순간, 은서가 소리쳤고, 도현은 강혁의 억센 힘에 의해 몸이 뒤로 젖혀졌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 강혁 씨!”
도현은 사뭇 당황했다.
“은서가 싫다잖습니까! 은서야, 내 차에 타라.”
“은서야, 안 돼!”
도현이 은서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뒤에서 강혁이 팔로 가슴을 안고 압박했다.
“강혁 씨, 이거 놔요!”
“놀 테니, 돌아가시죠. 은서, 사람 한 번 싫어하면 다신 안 봅니다.”
강혁이 팔을 풀고 강혁을 가로막아 서며 말했다.
“은서, 날 싫어하는 것이 아니에요. 참견하지 말고 강혁 씨나 돌아가시죠.”
도현은 불쾌감을 드러내고 은서가 탄 강혁의 차로 빠르게 걸어갔다. 강혁이 단걸음에 쫓아와 도현을 가로막자, 도현이 강혁을 밀쳐 냈다. 다시 강혁이 몸으로 도현의 길을 막아 섰고, 도현은 강혁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내 심장이 타들어 가고 있네. 은서, 이대로 보낼 수가 없어. 알아?”
“모릅니다.”
“그럼 지금 알라고.”
“이거 놓으시죠.”
“이거 놓는 것은 쉬어. 대신 여기 꼼짝말고 있게. 안 그러면 나 참지 않을 거네.”
도현은 강혁의 멱살을 풀고 은서가 타고 있는 강혁의 차의 운전석문을 열었다. 은서가 급히 내리는 것을 잡아 채 앉히고 차의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도착한 곳은 그와 첫 관계를 가졌던 그의 별장이었다.
은서는 문을 열어 놓고 내리기를 기다리는 도현을 외면했다. 이렇게 끌려오는 것에 대한 강한 항변이자 거부의 몸짓이었다.
“내려, 은서야.”
“…….”
“화났을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들어가자. 들어가서 우리 차분하게 서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
“어서 내려, 은서야?”
도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차 안으로 들어와 은서의 손을 찾았다. 은서는 그 손을 피하고 자발적으로 차에서 내렸다. 은서가 자신의 몸에 그가 닿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도현은 느꼈다.
은서는 별장 문을 열어 놓고 먼저 들어가기를 원하는 도현을 외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이 스위치를 올리자 별장 실내가 환하게 밝혀졌다. 파스텔톤으로 장식된 실내는 심플하고, 최소한의 가구 배치로 깔끔하면서 탁 트인 시원스러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은서에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도현이 미니 바로 가는 것을 보며 은서는 실내 불빛이 미치는 창밖의 잔디밭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연약해 질 여유조차 없었다.
은서는 강혁이 왜 도현을 막아주지 않았는지 추정해 보았다.
도현에게 확실한 감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떼어놓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강혁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강혁아, 도현 씨 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었어. 그래서 헤어졌거든. 그런데 떨어지려고 안 해. 퇴근 시간에 와서 나 좀 도와 줘.
강혁은 도현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지켜 주던 그가 돌연 행동을 멈추고 도현의 짓을 내버려 둔 것일까.
은서야, 네 사람 맞아.
차 창 밖으로 스치던 강혁의 얼굴에 도현을 의심하지 말라는 표정이 어려 있었었다. 차마 엄마와 도현의 족보를 말하지 못했던 은서로서는 그런 강혁을 탓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도현은 핸드백을 걸친 채 창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은서를 보고 간단히 준비한 안주를 탁자에 내려놓고 얼음을 넣은 마티니를 양 손에 들고 은서에게 다가갔다.
“오늘 밤 집에 안 돌아간다. 어쩌면 내일 밤도.”
은서가 일방적으로 구는 도현이 못마땅하다는 듯 힐끗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가 한 모금 삼켰다.
“원하는 것이 뭐에요?”
은서의 목소리에 어떤 절망감이 묻어난다고 도현은 생각했다.
“몰라서 물어?”
“알아요. 아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내 의견에 따라 줘.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은서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창틀에 술잔을 내려놓은 은서는 도현을 마주보고 섰다.
“그렇게 원한다면 드리죠.”
은서의 손이 어깨로 올려갔다. 이어서 핸드백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은서가 슈트 상의를 젖히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은서가 상의와 블라우스에서 팔을 빼내자 레이스가 달린 검은 브래지어가 우유빛 살결 위에서 두드러졌다. 은서가 치마의 호크를 푸는 것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던 도현이 버럭 소리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은서는 도현이 이 짓을 원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짓이 도현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벗어 드리죠. 하지만 당신에게 돌아가진 않아.
스커트가 다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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