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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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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ema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54회 작성일 15-10-1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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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여자 그 남자




머리를 뒤로 한 데 모아 질끈 묶은 20대 후반의 여자가 진바지와 하늘색 티셔츠 위에 감색 자켓을 걸치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목을 빼고 차창 밖을 주시하고 있던 김 비서가 조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회장님, 저 아가씨입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강 회장이 조용히 눈을 떴다. 인고의 세월을 헤쳐 온 여장부의 차가운 눈빛이 그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고통스런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자의 이름은 한은서이고 나이는 24세라고 했다. 눈에 뛰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풍기는 이미지가 선하고 괜히 기분 좋아지는 호감형의 얼굴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170센티미터 안쪽의 키에 좀 마른 몸매였고, 밝게 살려는 의지가 읽혀질 정도로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강 회장은 첫 눈에 은서가 자기 아버지를 쏙 빼 닮았음을 알아 보았다.

 

 

“불러올까요, 회장님?”

미국에서부터 그녀를 보좌해 온 김 비서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몸에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그의 육감이 은서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는 강 회장의 의중을 간파했다. 강 회장이 창백해 지는 것을 처음 본 김 비서였다.

“저기 커피전문점에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요?”

강 회장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

명동 중심가에 위치한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 SD는 4층 건물로 200여명의 손님이 동시에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메머드급 커피전문점이었다. 은서가 유럽풍 외관을 가진 커피전문점을 향해 몸을 틀었다. 강 회장은 은서가 몸을 틀기 직전, 차 코 앞까지 온 은서의 웃음진 입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은서가 그녀를 알아 볼 리 없을 것이고, 선팅이 잘 된 차 안이 노출됐을 리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강 회장은 가슴이 아렸다.

“3년쯤 됐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로 근무 중이며, 취업이 될 때까지 계속 일할 모양입니다. 서빙 외에도 번역 일을 겸하고 있는데, 그쪽은 출판 시장의 침체로 일감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올 해 졸업했다고요?”

“예, 2월에 졸업했습니다. 일류 사립대에 합격은 했지만 등록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입학에 4년 내내 장학생으로 다녔답니다. 그 실력이면 머지 않아 취직이 될 것 같습니다.”

강 회장은 은서가 들어 간 건물 입구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안쓰러움과 가슴이 찢기는 듯한 연민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저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는데, 1년 전까지도 그녀는 은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살았었다.

“취직이, 곧 될 것 같다고요?”

“예, 회장님. 일주일 후에 통신회사에서 면접시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서류전형에서 높은 점수로 합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강 회장은 김 비서의 말을 듣고 갑작스레 어떤 생각에 골몰했다. 은서를 대면하는 것이 두려움으로 느껴졌었다. 은서가 혼자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을 때, 그녀는 먼 이국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었다.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해져 가는 은서를 떠올리고  눈물 지었지만 혼자였던 은서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었다.

“잘 자라 주었네요, 은서가……. 7살 때부터 혼자였다니, 20년을 저렇게 의연하고 씩씩하게살아왔어요. 그래서 날 더욱 부끄럽게 하는군요.”

강 회장의 어조에 물기가 배어났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도록 하죠.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내 존재가 은서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되지 않도록 서서히 다가가야 해요. 자기 죽었다는 소식 듣고 왜 달려오지 않았냐고 추궁하면 나의 어떤 대답도 변명으로 들릴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때 내가 이기적이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탄식하는 강 회장을 룸밀러로 흘끗거린 김 비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잠시 후, 강 회장의 검정색 세단은 커피전문점을 뒤로 하고 사라졌다.




은서는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 앞치마를 두르며 탈의실에서 나왔다. 우연히 내다 본 창 밖으로 길 모퉁이에 주차해 있던 까만 승용차의 꽁무니가 커브길을 돌아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참 이상했다. 그 차를 본 순간 느껴지던 그 감정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함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가슴이 두근댔는데, 고급차라는 동경 때문이 아닌 편안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가벼운 흥분 같은 감정이었다. 나를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그런 느낌!

은서는 일을 시작한지 30분쯤 후에 홀로 들어오는 강혁을 보고 이유 없이 가슴이 꽉 차 오는 기분을 느끼며, 아까 까만 승용차에서 느꼈던 그 감정이 이와 비슷했다고 생각했다.

 

 

“강혁아! 너 일 안 해?”

은서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강혁에게 다가가 짐짓 미심쩍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185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체격의 그는 양복을 쫙 빼입고 다니는데,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뭇여성들과는 달리 은서의 눈에는 왠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늘상 운동복 차림이었던 그가 경호업체에 취직을 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선배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에서 서너 달 사범 노릇을 한 후였다. 고아원에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종합무술인 소리를 들을 만큼 온갖 운동을 섭력했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기 위해 체육인의 길을 단념하고 전문대에 입학해 토목기사 자격증을 땄다. 그 방면으로 취직 자리를 알아 보던 중에 우연찮게 경호업체 사장의 눈에 띄어 보디가드가 된 것이었다.

 

 

“뭐?”

“일 안하고 여긴 웬일이냐고?”

“훗, 지나가다가 들린 거야. 너 잘 있냐 걱정돼서…….”

강혁이 멋쩍은 얼굴로 대꾸하며 씨익 웃었다.

은서가 고아원에 들어간 것은 7살 때였다. 그녀의 어렴풋한 기억에 엄마란 사람은 존재했다. 아빠가 출근하면 엄마도 외출을 했는데, 가정부 아줌마가 퇴근할 시간에 엄마가 먼저 들어오고 아빠는 한밤 중이 돼서야 돌아왔다. 가정부 아줌마가 네 아빠는 호텔 사장님이란다라고 세상 물정 모르는 네 살배기 그녀에게 자랑스럽게 여기라며 말해 주었다. 어느 날 밤에 아빠와 엄마의 싸우는 목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다음 날부터 엄마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어떤 소리에 깨어보니 아빠가 그녀의 방 구석에 앉아  울고 있었다.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 날들이 빈번해 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발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와 집기들을 부쉈다.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린 그녀를 가정부 아줌마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아줌마 집에는 다섯 명의 언니와 오빠들이 있었는데,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대하듯 그녀를 데리고 즐겁게 놀아 주었다. 며칠 후 아줌마가 어느 허름한 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너희 아빤 이제 호텔 사장님이 아니란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더구나. 네가 크면 네 아빠 호텔을 꼭 찾도록 해라. 넌 그럴 수 있을 거야. 눈동자가 너처럼 똘망한 애는 내 처음이거든. 아줌마는 그런 말을 몇 번이나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그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집에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술을 병채 들이키고 있던 아버지가 비틀대며 일어나 아줌마 손을 잡고 있던 은서를 인계받았다. 아버지는 은서를 끌어 안고 뜨거운 눈물을 뚝 뚝 떨어뜨렸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새벽에 일을 나가 해가 지면 돌아왔다. 그러나 고혈압으로 쓰려지신 할머니는 날로 병세가 악화됐고 몇 달 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둘이 살게 된 은서는 옆집 아줌마에게 물어 밥하는 것과 반찬 만드는 것, 국과 찌개 끓이는 것을 배워 나갔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안의 피곤함을 온전히 쉴 수 있도록 은서는 집안 일을 도맡아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집안 일이 7살이 돼서는 제법 그럴 듯하게 해 낼 정도가 되었다. 스스로 뿌듯하게 여길 정도로 집안 구석구석이 청결하고 반짝거렸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인기척이 없자 은서는 골목으로 나와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 가파른 골목 아래에서 드문드문 올라오는 사람들 중에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 나온 아줌마가 이걸 어째 이걸 어째 하며 어린 은서를 부서줘라 끌어 안았다. 아빠가 공사장에서 떨어져 돌아가신 것이었다.

 

 

고아원 한 켠에 쪼그려 앉아 훌쩍거리는 은서에게 초코파이를 내밀며 오후 내내 축구를 하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소년이 말했다.

‘난 이강혁이야. 맨날 거기에 앉아 우는 거 봤어. 이젠 그러지 마. 보기 안 좋아. 앞으론 내가 너 보살펴 줄게.’

그 소년은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은서 옆으로 걸어와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자기 어깨에 걸쳤다. 2월생인 은서는 7살에 취학통지서를 받고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고아원에 들어간 것이었다. 강혁은 8살이었지만 동급생인 은서를 기꺼이 친구로 맞아 주었다. 

‘힘 내. 너의 보디가드는 전교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짱이야. 헤헤, 앞으로 그렇게 될 재목이라고.’

강혁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언제나 그녀 곁을 지키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은서가 가져다 준 까페 라테를 다 마신 강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빙 일로 분주한 은서가 쳐다볼 때까지 입구에 서 있던 강혁은 손을 살짝 들어보이고 들어온 지 채 10분도 안 돼 사라졌다. 이틀에 한 번은 저렇게 찾아와 잠깐 머물곤 사라지는 강혁이었다. 그런 강혁이 은서에겐 커다란 힘이었고 의지였다. 강혁이 다녀가면 은연중에 쌓여가는 외로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기운이 샘솟았다. 은서는 곧 자기 일로 돌아가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주문한 것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호텔 ‘세르비아’는 특급호텔이었다.

그 호텔 기조실장인 장도현은 31살이며 187센티미터의 키에 수려한 외모와 모델 뺨치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갓 환갑을 넘긴 아버지 장 회장의 유일한 상속자로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후계자 수업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도현은 지금 몹시 격앙된 상태였다. 업무에 관해선 철두철미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기에 이번 아시아태평양 미래경제 심포지엄 유치 실패 건을 쉽게 수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 호텔이 제일호텔에 밀린 원인이 무엇인지 다각도로 분석해 오늘과 같은 수모를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합시다. 단순히 객실 30여개와 개최 특실 홀 수입이 날아간 데만 손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후 유치 건에 불리하게 작용할뿐더러 우리 호텔 대외 이미지에도 타격이 큽니다. 특급호텔이라는 자부심은 그 명성을 유지하는 데 각고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국제적인 회의나 세미나, 심포지엄 등을 지속적으로 유치하지 못하면 이름만 특급호텔이지 어디가서 명함 내밀기조차 부끄러울 것입니다……”

도현의 자괴감어린 연설을 경청하며 그에게 왜 아직 애인이 없는지 수연은 알 것 같았다. 그의 비서인 수연은 유선 전화를 통해 연결하는 실장의 전화 중에 젊은 여자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항상 경직돼 있는 그는 부드러움이란 단어를 적용할 구석이 없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과 사무적인 어조, 빈틈없는 몸가짐 따위가 무슨 결벽증에 걸린 사람같았다. 그를 흠모하는 여사원들은 많아도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에게 접근해 볼  강심장의 여사원은 수연이 알기론 아직 없었다.

 

 

다행히 심한 자책감을 야기시키는 도현의 연설은 짧게 끝났다. 기획실 직원들에 섞여 나가려던 수연은 도현의 부름에 돌아섰다.

“수연 씨, 뭐 하나 물어 봅시다?”

도현이 노트북을 닫고 넥타이를 바로 잡았다. 표정 없는 그를 보며 수연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질책을 가하기 전에 도현의 표정은 늘 저랬었다. 말투도 똑같았다. 수연씨, 뭐 하나 물어 봅시다? 내가 글자를 잘 모르는 거요, 아니면 오타입니까? 식이었다.

“그, 그러세요, 실장님.”

“저기, 나를 모르는 여자에게 나를 알릴 때 어떤 방법이 좋습니까?”

도현의 질문에 수연은 까무러칠 뻔했다. 도현이 입에서 구애에 관한 질문이 나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도통 여자에겐 관심이 없어 보이던 냉혈한이 도현이 아니던가. 수연은 까무러칠 뻔한 충격을 어설픈 미소로 감추고 미치도록 궁금해 지는 사안을 입에 올렸다.

 

 

“시, 실장님이 좋아하는 여자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어떤 방법을 알고 있죠?”

오 이런 세상에! 어떻게 생긴 여자이길래 도현이 자신을 알릴 방법을 찾고 있을까. 그냥 다가가 손을 내밀면 어떤 여자든 덥석 그의 손을 잡을 것 같은데.

“여자가 거만한가요?”

“모르겠어요. 느낌엔 아닐 것 같지만, 낯선 남자는 경계할 것 같더군요.”

“호기심인가요, 아니면 진지한 가요?”

“나도 모르겠어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알고 싶은 여자예요. 그 여자가 일하는 곳에 자주 들리면 너무 고전적인 방법일까요?”

수연은 일순 질투심이 치밀었다. 차가운 그에게 가슴 설렌 적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는 수연을 포함한 사내의 수십 명의 여사원들을 한 마디 말로 모욕했다. 느낌이 좋은 여자라니? 그 여자 이외엔 어떤 여자도 도현에겐 느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공연한 심술이 수연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랬다가 어느 천 년에 그 여자 분과 가까워지겠어요? 과감하게 나가세요. 너 마음에 든다. 나랑 사귀자, 그렇게 말하세요. 그 여자 분이 오케이 하면 사귀시고, 아니면 시간 낭비 안 하시게 되는 거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실장님?”

수연은 낯선 남자를 경계할 것 같다는 도현의 느낌을 중시했다. 그런 여자라면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오만한 짓을 숙고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무리 도현이 잘 생기고 지적인 이미지를 발산하는 매력남이라고 해도 말이다.

“낯선 남자가 그래도 여자들은 괜찮케 여기는가요?”

“물론이에요. 실장님 정도면 충분히 통하죠.”

도현이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것 같아서 수연은 공연히 쾌감에 젖었다. 느낌만 좋은 여자였다는 것을 실감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을 것이다. 실장님,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을 그 여자를 통해 절감해 주세요, 부디.




도현은 평소보다 좀 일찍 퇴근을 했다. 그 여자를 의식하게 된 것은 반 년 가량 된 것 같았다. 그 이전부터 그 여자는 그의 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스쳐갔다. 도현이 야근을 하거나 밀린 업무로 퇴근이 늦어지지 않으면 항상 그 시간대 그 길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사시사철 진바지만 입는 여자. 머리를 뒤로 묶고 다니며 좀 크고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걸치고 열심히 걷는 여자. 그늘 없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 같은 인상.

도현은 오늘처럼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심한 좌절감이 닥쳐올 때면 그녀가 생각이 났다. 거의 매일 강요된 것처럼 차창 밖으로 스쳐가던 그녀의 변함없는 모습이 어느 틈에 잘 아는 여자로 인식되고 머릿속을 환기시켜 주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도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감응같아서 습관화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맹목적인 감정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도현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한동안 퇴근 시간을 늦추어 그녀를 보지 않았다. 절실하게 누군가 필요해 지는 감정의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에도 그녀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현은 자신이 8년 전 어느 날에 결심하고 그때부터 뛰기 시작한 차가운 심장 소리를 자신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날은 외부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 잘 이용하지 않던 도로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호텔이 있는 시청 방면으로 가기엔 지름길 코스가 아니었다. 낯익은 옷차림의 여자가 언뜻 시야에 들어왔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대형 커피전문점 입구에서 유니폼에 앞치마를 두른 서너 명의 여직원들 속에 섞여 있었다. 사복 차림의 여자가 여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입구 통로를 빠져 나오자 그녀들은 곧 안으로 사라졌다. 그곳에서 일했던 동료가 그만두는 것 같았다.

 

 

도현은 사무실로 돌아와 오후 내내 알 수 없는 심란한 상태에 빠져 곤혼스러웠다. 무엇에 이끌리듯 정시에 퇴근을 했고, 퇴근하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스쳐 지나자 이상하게 마음의 평온이 찾아들었다. 도현은 다음 날부터 퇴근 시간에 그 길을 걸어가는 그녀를 볼 수 있었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는 날엔 자신이 공연히 심란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도현은 자신이 완벽주의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을, 오늘같이 추진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무기력감에 좌초하는 자신을 느낄 때면, 통탄하는 감정의 끝자락에서 몸을 웅크리며 그것을 깨닫곤 했다. 어떤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에 삶의 의욕을 불살라온 그였다. 그런 이유로 실패할 수도 있는 심포지엄 유치 건에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낙담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도현은 자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이름도 모르는 한 여자를 급박하게 떠올리는 자신을 느끼고, 버렸던 다른 하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완벽해지려 할수록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법, 도현은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너무 오랜 세월 고독했음을, 그것을 알리는 심장 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로 마음먹었다.




여자가 저 멀리로 보였다. 마치 하루의 일정이 빠듯하게 계획된 사람처럼, 다소 나른해 보이는 퇴근 길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오늘도 바쁘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도현은 수연의 조언이 얼마나 무례하고 황당한 짓인지, 거리가 좁혀지는 여자를 쳐다보며 새삼 절감했다. 여자는 천성인지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물고 있었지만, 경솔한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위엄이 풍겨졌다. 그러나 달리 뽀쪽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지금이 아니면 다시 자신의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도현은 무작정 부딪쳐 보자고 생각하며 차에서 성급히 내렸다.

 

 

도현은 인도로 올라와 이십여 미터까지 가까워진 여자를 향해 걸었다. 3월 중순의 저녁 공기는 아늑했고, 어둠은 도심의 불빛들에 먹히고 있었다. 도현은 이런 민망한 일을 자신이 저지리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성에 대한 어떤 불신감이 가슴 어딘가에서 꿈틀거렸지만, 생동감 넘치는 여자의 모습이 잡생각을 물리치며 도현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실례합니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자가 걸음을 멈추며 인사를 건네자, 은서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고, 주위엔 오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저 말인가요?”

“예. 전 장도현이라고 합니다. 초면이라 당혹스러울 겁니다. 아가씨 입장에서 보면 말이에요.”

 

 

도현은 기억을 더듬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고 설핏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를 수연이 보았다면 또 까무러칠 일이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빈정 기를 빼면 그의 입술에서 미소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절 아시는군요.”

은서는 이력서를 낸 여러 회사들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가장 시급하고 걱정되는 일은 취업 문제였다. 휴대폰이 울리거나 편지함에 우편물이 들어 있을 때, 은서는 일차적으로 그 생각을 했다. 서류심사에 합격했으며 면접시험 날짜를 알려 드립니다 라는 메시지는 꿈속에 들릴 정도였다. 마침내 면접 날짜를 받게 되었고, 은서는 남자가 그 회사에서 파견된 사람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스쳤다. 아니면 아직 합격 유무 통보가 없는 회사들 가운데 한 곳에서 나온 사람일지 모른다고. 그토록 은서는 취업 문제에 조급증을 겪고 있었다.

“예.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도현이 우물거렸다.

 

 

“절 잘 알지는 못한다고요? 그, 그럴 수 있겠죠.”

은서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도현의 표정속에 낯익은 감정이 어리는 것을 목격했다. 남자는 사적인 일로 길을 막아 선 것 같았다. 그녀가 종종 경험한 헌팅!

여자가 약간 미간을 찌푸리자, 도현은 양복 안쪽에 손을 밀어넣었다.

“전 세르비아 호텔에서 근무합니다. 기획조정실에 있습니다.”

도현은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혀야 할 것 같아 명함을 내밀었다.

은서는 도현이 건네는 명함을 받아 쥐었다. 착각할 수도 있었다. 차 한 잔 하자는 남자들 가운데 명함을 내보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세르비아호텔 기조실장 장도현


명함에 찍힌 글자를 읽고, 은서는 세르비아호텔 기조실장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새로운 관점에서 의문을 가졌다. 세르비아호텔에 이력서를 낸 기억은 없었다.

“무슨 일이죠? 전 세르비아호텔에 아무 관련도 용건도 없는데요. 혹시 베스트통신 회사와 세르비아호텔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요?”

베스트통신이란 말에 도현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여자 입에서 그 회사명이 튀어나오자 온갖 쓰라린 감정이 가슴을 할퀴었다. 우연일 거야. 도현은 숨을 들이쉬었다.

 

 

“베스트통신에 지인이 있으세요?”

그의 어조에서 베스트통신과 관련 있는 사람 같은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도현의 질문이 유도적으로 들린 것은. 은서는 머릿속이 온통 며칠 앞으로 다가온 베스트통신 면접 시험에 쏠려 있어, 자신과 무관한 남자의 신분을 보고 당혹감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