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녀의 백팔십도 회전하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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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몸 담았던 커피전문점 근방을 버스로 스치면서 어제 밤 늦도록 왁자지껄하게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번인 동료들도 합세한 갈비집에서 은서의 취직 축하 파티가 열렸고, 2차로 노래방에서의 유쾌한 시간이 이어졌었다. 4년 넘게 일했던 곳, 장기 근속자가 많아 동료애는 남달랐다.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은 그들과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며, 은서는 마이너리그의 생활을 접었다. 택시를 잡아 준 사장은 두둑한 보너스를 건네며, 메이저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 분명하다는 말로 그동안의 성실성을 칭송해 은서의 눈을 젖게 만들었다.
은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리움을 뒤로 하고, 가까워지는 세르비아호텔을 바라보았다. 퇴근 무렵에 걸려온 도현의 전화에 은서는 거두절미하고 자기가 호텔로 가겠다는 말부터 했다. 행여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인생이 그녀를 찾을 수 없는 입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태 혼자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다면 그녀가 찾고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은서는 엄마에게 부담이 되는 자식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고급 세단과 럭서리한 의상의 엄마는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것 같았었다. 그런 엄마의 삶을 자신의 존재가 깨트려놓는 것은 아닌지, 은서는 새삼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은 만나고 싶었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는 해명의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을 팽개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은서는 그리움 한편으로 미워하고 때론 분개했던 엄마를 이해하려는 자신을 느끼면서 엄마에게 넌 내 딸이란 소리 한 번 듣는 것 이상의 꿈은 애써 자제하기 시작했다.
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서면서 엄마가 지인을 만나는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객실 이용객이거나 호텔 관련객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은서는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먼저 눈이 갔다. 옆쪽으로 통로가 하나 있었는데, 화장실과 연결된 곳이었다. 엄마의 지인은 화장실에서 나오던 길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 추측 외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은서였다. 은서는 로비에 비치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도현이 오라는 시간보다 십여분 일찍 온 은서는 그 자리에 앉아 출입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적처럼 엄마가 나타날 것만 같아 은서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엄마는 나를 알아볼까. 7살 때의 모습이 어땠는지 은서는 알 수가 없었다.
강혁에 말에 의하면 젖살이 빠지고 키가 훌쩍 자라면서 어릴 적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못 알아볼 거야. 나도 첫 눈에 엄마라는 것을 몰랐는 걸. 하지만 내 모습 어딘가에 엄마의 찡그린 얼굴 같은 특징이 남아 있을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은서는 불안감을 떨치며 로비를 주시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그런 은서의 눈에 도현이 들어왔다. 도현이 플런트 직원에게 무엇을 묻는 것 같았다. 은서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런트 직원이 은서를 알아 본 것이 틀림없었다.
도현의 시선이 즉시 은서에게 꽂혔고, 은서는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왔으면 전화 주지 않고요?”
도현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곧 내려올 건 데 뭐하러 전화해요.”
“그래도 전화하세요.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렇게 되나요.”
“그럼요. 자, 우리 나갈까요? 차 대기시켜 놓았어요. 전화로 말했듯이 오늘은 우리 둘만 오붓하게 식사할 수 있는 곳으로 모실게요.”
은서는 도현을 따라 로비를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엄마가 나올 것만 같았다.
도현이 데려간 곳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어느 별장이었다. 산림이 우거진 길을 따라 올라가자 철망 울타리가 쳐진 한 지점에 철재 대문이 있었다. 그 문은 열려 있었고, 도현은 안쪽으로 차를 몰았다. 관목수가 빽빽이 들어 찬 길이 좀 이어지더니 빨간 벽돌로 지은 건물과 잔디가 깔린 앞마당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은서는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준비가 다 된 것 같아요. 배 고프죠?”
도현의 시선을 쫓은 은서는 잔디밭 한켠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엔 푸짐하게 차려 진 테이블이 있었고, 장작불 위에 쇠를 걸친 돼지고기 바베큐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도현은 윗도리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장작불 상태를 점검했다. 이곳은 도현네 별장이라고 했다. 짐작컨데 관리인이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돌아간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달린 조명등이 있긴 했지만 밤 하늘을 한가로이 떠 가는 보름달의 은은한 빛만으로도 주변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은서는 의자에 앉아 고기를 자르는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는 동안 그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억의 귀퉁이로 밀려난 엄마를 대신에 도현의 과격한 키스가 머릿속을 가득채웠고, 제멋대로 자라난 환상이 도현의 키스를 황홀감으로 되살려놓았다. 또 안전띠가 풀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자꾸 몸을 뜨겁게 달구어 두근대는 심장이 좀체 진정 국면에 접어들지 못했다.
도현이 바베큐를 먹기 좋게 잘라다 놓고 별장으로 들어가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식탄엔 한정식 반찬을 방불케 하는 온갖 종류의 반찬과 뚜껑이 덮힌 밥그릇과 국그릇이 얌전히 놓여 있었는데, 도착 직전에 가져다 놓은 듯 아직도 따끈따끈했다.
“취직된 거 축하해요, 은서 씨!”
도현이 다리가 긴 와인잔에 캘리포니아산 와인을 따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도현의 미소가 멋지고 섹시해 은서는 가슴이 설레었다.
“고마워요. 내가 한 잔 따라줘도 돼죠?”
은서는 약간 도톰한 도현의 입술을 훔쳐보는 자신에게 놀라며 평심을 유지하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안 따라줄 생각이었어요?”
도현이 짐짓 눈을 치켜떴다.
“그게 아니고요……. 어서 받기나 해요.”
은서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자 흘긴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며 그가 내민 잔에 와인을 따랐다. 식사 전에 가볍게 한 모금 마시는 술은 식욕을 돋군다며, 도현이 권해 은서는 건배한 잔으로 입을 축였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달콤한 액체가 몸을 나른하게 풀어놓는 기분이었다.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은서 씨?”
노른노른하게 익은 바비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데 도현이 불쑥 물었다.
“예?”
“연애 경험 있느냐 물었어요?”
“그건 왜요?”
“내가 종착역이길 바래요. 그래서 물었어요.”
도현의 눈빛이 한순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가 종착역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간곡히 부탁하는 눈빛 같아서 은서는 싫지 않았다.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래요. 내게 그런 마음이 형성되고 안 되곤 순전히 도현 씨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고요?”
소리없이 웃는 도현의 얼굴에서 좀전의 서늘한 구석은 온데간데 없었다.
“난 진흙 빚는데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은서 씨 라는 진흙을 빚어 보라고 하니, 없는 기술이 내 안에서 마구 생겨나는 것 같네요, 하하.”
도현이 와인을 쭉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실망시키는 도현이 안 될 거라는 거예요. 나 이 사람 믿어 주세요!”
어울리지 않게 전직 대통령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하는 도현을 보며 은서는 절로 쿡쿡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그 음악이 흐르는 화면 안의 주인공은 은서 자신처럼 여겨지고, 만져지진 않지만 행복이라는 물질이 가슴을 가득히 채워놓는 것 같았다.
“우리 춤 출래요?”
식사를 마치고 새로 따른 와인을 홀짝이다 도현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와 호젓하게 앉아 밤 공기의 은근한 맛을 음미하던 은서는 좀 놀란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여기서요?”
“예, 여기서요. 이 보다 좋은 스테이지 봤어요? 귀뚜라미와 부엉이, 풀벌레들이 연주하는 소리 안 들려요? 거기다가 달빛이 수줍은 듯 잔디 위를 비추고 있잖아요?”
간지러운 소리였지만 귓가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달콤하게 들려왔다. 은서는 얄미운 사람 쳐다보듯 도현을 흘기고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블루스 자세로 은서를 껴안았다. 허리에 얹은 도현의 손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은서는 온 몸이 후끈거렸다. 도현은 느긋하고 부드럽게 잔디를 돌았다. 마치 진짜 블루스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떼어놓는 걸음이 가볍고 흥이 났다. 그러는 사이에 도현이 미묘하게 그녀를 안쪽으로 조금씩 당기고 있었고, 은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품에 안겨들고 있었다.
좀 위험하다는 신호가 내부에서 울리기 시작했지만 은서는 뜨거운 숨결처럼 달아오르는 몸을 어쩌지 못할 것 같았다. 도현이 바짝 끌어안고 멈췄을 때, 은서는 그의 품이 마술을 부리는 듯 그에게 자신이 흡수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따뜻하고 안락하고 연신 강력한 힘이 몸을 관통하는 듯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미안해, 난 벌써 은서에게 흠뻑 빠져버렸어!”
도현이 나지막히 속삭이더니 입술을 포개왔다.
도현의 부드러운 키스는 점점 탐욕스럽게 은서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은서는 격해지는 흥분으로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가슴 위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옷 사이로 들어와 유방을 쓰다듬었다. 은서는 이건 아니라고, 그를 밀어내야 한다고 의식하긴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섬세한 손놀림에 발딱 일어선 유두에서 짜릿한 전율이 일어났다. 스커트를 걷어올린 그의 다른 손은 팬티 위를 어루만졌다. 금새 그 안쪽이 젖어들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감당할 수 없는 흥분에 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혀를 탐욕스럽게 빨아댔다.
“널 갖고 싶어!”
도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도, 도현 씨!…….”
“갖게 해 줘. 내 행동 책임질 거야.”
도현이 번쩍 안아 잔디 위에 눕혔다. 밤이슬에 잔디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도현이 자기 옷을 깔더니 그 위에 은서를 눕혔다. 그 사이에 몸이 식을만도 한데 은서는 그의 애무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몸 안에 숨겨져 있을 줄은 은서는 몰랐었다. 풀어 헤쳐진 옷 사이를 그의 입술이 누볐다. 질식할 것 같은 쾌감이 은서의 몸을 옥죄었다. 도현이 팬티를 벗기자 은서는 어떤 두려움에 일순 몸이 굳어졌다. 무엇이 부드럽게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이어 우주를 날아오르는 듯한 황홀감이 리드미컬하게 몸을 들썩거려 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름달이 구름 뒤로 숨였고,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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