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세상에서 제일 큰 창고 > 소설·수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소설·수필

  • HOME
  • 창작의 향기
  • 소설·수필

☞ 舊. 소설/수필   ♨ 맞춤법검사기

 

 

모든 저작권은 해당작가에게 있습니다.무단인용이나 표절을 금합니다

[엽편소설] 세상에서 제일 큰 창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75회 작성일 16-03-23 20:42

본문

[엽편소설]     세상에서 제일 큰 창고
------------------------------------------------------------
                                         시앙보르

재벌그룹 장 회장은 정식으로 은퇴해서 일반인 장씨가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평소 아내와 상의했던 일을 곧 실천했다. 구포항에서 1시간을 배 저어가면
일년 내내 안개가 덮힌다는 무진도를 지나고 또 2시간 정도 항로를왼편으로 꺽어서 나아가면
나타나는 섬을 통채로 샀다. 원래 이름은 있었으나 장씨는 '공무도'라고 꽤 시시한
이름을 붙였다. 10여 가구에 불과한 주민들은 시가의 5배를 얹혀준 장씨에게 큰절까지
올린 후 섬을 떠났다. 그들은 떠나면서 양, 염소, 닭, 오리, 돼지까지 모조리 데리고 갔다.
왜냐면 장씨가 필요없다고 해서였다.

 뭍에서 온 업자들은 섬을 거의 덮을 정도로 창고를 지었다. 서울을 떠나면서 아내는 단 하나의 짐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그러라고 했다. 주민들이 버리거나 폐기한 물건들까지 모아서
창고에 족족 쌓았다. 이를테면 섬에서 섬과 자기들 말고는 거의 창고에 넣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돈은 아니었다.
 
 돈은 이미 세금 낼 것 다내고, 돈이 없어 못내는 이웃들의 세금까지 전부 납부해주었다.
그러고도 물론 돈은 천문학적으로 많이 남았지만 맞게 지출했다. 뾰족한 섬은 이제 돔형도 아닌
이상한 입방체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배행기나 배들이 가끔 기겁을 하고 항로를 이탈했다가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방송국에서 내려온 배들은 멀리서 카메라에 섬을 담고 나름대로 해석을
가져다 붙였다. 왜냐면 장씨가 극구 섬에 상륙하는 걸 반대해서였다.
 
리포터들은 죄없는 갈매기를 카메라로 훑었다가 부서지는 포말로 화면에 멋을 한껏 부린 후
긴머리와 바바리를 날려가며 마이크에 대고 떠들었다. (어떤 미니스커트 리포터는 그날 돌아간 
후 일주일을 감기 몸살로 지독하게 앓았다.)

" 세계 최초, 세계 최대의 창고가 우리나라에 세워져 장 회장은 새로운 비전을... "

" 세상에 염증을 느낀 장 회장의 은둔은 사회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

" 무궁화 위성에서 섬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첨단 스텔스기 소재를 사용하여... "

" 평소 정도령을 신봉하던 장 회장은 말세를 대비해야 한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고... "

" 지도에서 빼앗긴 독도를 대신할 인공섬을 건설할 목적으로 전초기지를 장만한데 그 의의를 ... "

운운하는 소리가 전국을 떠돌다 인터넷을 거쳐 전세계까지 돌아다녔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경단체들 또한 성명을 발표했다. 

" 근로자의 피로 재법기업(기자가 재벌을 잘못 표기) 을 이룬 
장 회장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민경제 활성화를 위해 투자하는 대신에 사설금고에 가두고,
섬과 인근 도서까지 개발을 빌미로 훼손은 물론, 갈매기와 물새떼의 보금자리까지... "

 장씨가 뉴스를 보지도 듣지도 않아서 '회장 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말았지만 세상은 꽤 오랫동안
붕붕거렸다. 

" 여보, 이제 창고에 모두 집어넣고 보니 편해졌어요. "

" 다행이구려. 당신의 병이 이곳에서 완치하기만을 빌 뿐이오. 사업을 핑계로 임자에게
그동안 소홀했던 거 용서하시오."

 자식들은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착하게 잘 자라준 새끼들이었다. 재산의 귀퉁이를
표나지 않을 정도로 나눠준다고 해도 오히려 자기들 힘으로 살겠다고 손을 저었던 새끼들.
번듯하거나 말거나 나름 먹고살고들 있으니 그걸로 됐다.
 
 많은 돈은 대학이나 종교단체 혹은 정부에 기증하지 않았다. 돈 있는 곳에 똥파리가 
잔뜩 꼬인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발품을 팔았다.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홍길동처럼, 장길산처럼 필요한 곳에 직접 현찰로 나누어주었다.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으로, 눈 맑은 개척교회 생활비로, 옳은 설법 개척사찰에, 도시 변두리 복지센터
시설확장비에, 청소년 도서관에, 실버문화센터에, 지역도서관에, 떵떵거리지 않고 겸손한
예술가와 학자들에게도 나눠 주었다. 폐지를 잔뜩 싣고 끙끙거리는 리어카에도 봉투 하나
슬쩍 넣어주기도 했다. 아호도 없었지만 자기 이름을 내민 기념관 따위는
짓고 싶지 않았다. 손을 내미는 자들에게는 일절 주지 않았다. 운전수가 퇴직하던 날,
원하는 걸 물어서 그대로 해주었다. 자식들은 전화를 걸어와 잘 하셨다,고 전부
기뻐해서 기뻤다.

 인부들이 배타고 멀미하면서 돌아가자 잔챙이 짐은 매일 조금씩 창고로 날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라디오까지 아내가 들어보이자 장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전해준다면서 맨 헌소식만 전해주는 일부 신문들이 대문간, 아니 선착장에 날리지 
않아서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저녁을 먹고나면 바닷가 모래톱에서 아내와 기우뚱 기우뚱 달리기도 했다. 

가끔 어미 잃은 바다표범이 올라왔다. 젓갈은 피했지만 밥은 잘 먹었다. 
영역다툼에서 밀려난 갈매기가 상대방이 갓낳은 알을 집 앞에 잔뜩 쌓아두기도 했다.
돌려줄 수도, 버릴 수 없어서 삶아 먹었다. 날개가 꺽인 바다새를 보살펴 준 적도
있었다. 그 새는 다시 날기 시작하면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미역이나 다시마 줄기를
곧장 물어다주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전복이나 고동을 가져오기도 했다.

아내는 가끔 모래밭을 뒤뚱거리며 달렸다.

" 자기야, 나 자바 바라 !! "

 싱거웠지만 장씨도 신나게 아내 뒤를 한박자 처지면서 따라갔다.

그럴때면 뭐 먹을 거라도 건질까 싶어서 머리 위에서 신나게 날개를 놀렸던
갈매기들은 투덜거리며 창고 지붕 위나 파도를 견디는 바위 위로 날아갔다.

노을에 온 몸이 젖어가며 둘은 앉아서 대과거와, 중과거와, 소과거와 현재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장씨는 부산 피난민촌을 떠나 대구에 공방 시절을 떠올렸다.

" 이캄 되겠심니꺼? "

 따지듯이, 당돌하게 물어보던 처녀를 장씨는 지금껏 기억했다. 바로 옆에 앉은 아내다.
그녀는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경리로 들어왔다. 말하자면 공채 1기생이었다.
황토에 유약을 칠해서 아기자기한 소품을 만든 후 불에 바짝 구워서 필요한 곳에 팔았다. 항아리는
만드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군 상주가 늘어나면서 선물용으로
꽤 짭짤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전자산업이 열리면서, 일본과 제휴한 세라믹 사업이
노다지 금광이 돼주었다. 세라믹으로 이쁜 접시나 커피잔을 만드는 업체가 많아서
그 쪽에는 역시 항아리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흑백텔레비전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넘어가면서 세라믹 필터와 응용 부품들은 없어서 못팔 지경이었다.
 
 돈이 들어오면 직원들 상여금을 두둑이 주고, 신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원천 기술을 대준 일본 업체에서 오히려 찾아와 저비용 고품질 기술을
일러달라해서 아낌없이 기술자료를 건네주었다.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하는게 도리다. 장 회장의 모토는 변함이 없었다.
말그대로 갈퀴, 아니 포클레인으로 지폐를 긁었다. 항아리와 커피잔을 만들던 많은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장 회장은 안타까왔지만 자신의 선택에 안도했다.

 돈이 들어오자 사세가 확장되면서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낮에는 사무실과 공사현장, 
밤에는 술집에서, 체통도 없이 손벌리는 나으리들과 조무래기 관리들과 업자들과 바이어들에게
푼돈 침 뱉아서 나눠주고 옆구리에 벗긴 계집, 아줌마 끼고 거의 밤을 새웠고 돈을 뿌려댔다.
어느날은 거울 앞에 서자 검은 눈두덩이에 저승사자 모습이 드리웠으나 포클레인이
계속 돈을 긁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저승사자에게도 푼돈 몇푼을 쥐어주자
가마꾼들이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창고에 거의 다, 아니 나무나 산, 밭, 논, 냇가 뭐 이딴 것들은 옮길 수가 없으니 놔두고,
가져다 담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쟁이고 쌓았다. 주민들이 남기고간 집과 토방을
비롯해서 가축 우리와 곳간까지도 분해해서 집어넣었다. 찢어진 슬리퍼와 녹이 슬어가는
통조림 깡통, 터진 배구공과 부러진 배드민턴 라켓도 집어넣었다. 돌 사이로 삐죽이 솟아나온
개뼈다귀와 닭뼈, 족발뼈 그리고 바람에 쓸려 왔다갔다 하는 온갖 깃털도 모아 넣었다.

" 끝났건가? 또 뭐 남은 건 없지요? "

" 없다카이. 혹 당신 이제 꼬부랑 할마씨 됐다꼬 나까장 넣는 건 아니지예? "

아내가 활짝 웃었다. 화장 아래 드러난 깊은 주름살마저 이뻤다. 
장씨는 단잠을 잤다. 그러니까 섬에 들어오고부터 아내와 같이 단잠을 잤다.
잠이 보약이다는 참말이다. 근 오십여 년을 정신없이 끌고다니던 악마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나이들어 고집이 더 세지니까 아마 줄이 끊어졌을 수도
있다. 밥맛이 돌아왔고 공기맛이 같이 돌아왔다. 

 둘이는 아침을 먹은 후 바닷가를 산책하고 돌아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종일 작업을 했다. 일을 하다가 배 고프면 대충 한그릇 먹고, 졸리면
잠깐 낮잠을 잤다. 장씨의 팔벼게에서 아내는 행복하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가끔 천둥과 벼락이 바다를 뒤집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창고 안이 어두컴컴해도
일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뭘 덧붙이고 보태는 작업이 아니라 떼어내고 
부수는 작업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아내는 그동안 별렀다는 듯이 이젠
윤기마저 사라진 손톱으로 이런저런 물건을 잘 잡아뜯어냈다. 그러면서
장씨를 올려다보고 소녀처럼 웃었다.

 남들이 부러워 했던 재벌가 아내는 병원에서 거의 30년을 보냈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진단이 달랐다. 신경쇠약, 치매초기, 유방암의 후두 전이, 패쇄공포증,
신부전증에 소장암, 만성간염 등등. 미국의 일류 병원까지 오갔지만 장씨는
알고 있었다. 자기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어느날 창고 위 물탱크 겸 전망대에 올라가면 멀리 무진도가 눈에 잡히기도 했다.
섬은 붉은색과 푸른색과 누런색이 범벅된 채 하늘에 뜬 돌우물, 신기루 모양이었다.
장씨는 죽을 날이 가까와졌다고 여겼다. 일년 내내 안개에 갇힌 무진도를 보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란 터무니를 믿지 않았지만 죽음은 모름지기 자기 것이어서
장씨는 알 수 있었다. 

 발바닥을 간지르는 모래 위를 달리면서 아내는 점점 젊어졌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막상 할 말은 아주 적었다. 그래도 좋았고 자기를 긁어대던
발톱들이 사라져서 자신이 건강한 숨을 내쉬고 단잠을 누리고, 늙어가는 작은 짐승, 
저 갈매기처럼 훨헐 날개짓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길게 이어질 수 없는 행복이라서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건 감당키로 했다. 목숨을 넘겨 받는 일은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것 또한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거나 수긍하는 일이 
많다는 것 정도는 이미 재고나 마찬가지라서 창고에 들어가 있었다.
 
그랬다. 창고에는 물건 뿐 아니라 자질구레한 생각, 의심, 분노, 불안, 근심, 걱정, 염려, 사치, 허영
권세, 끗발 등등 한때 누렸다가 쓸모가 없어진 것들까지도 그들먹했다. 그래도 그것들은
거의 잡아뜯겨졌고 원하는 게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의욕이 샘솟았고 되살아난 열정에
감사했다. 
 

 장씨가 아내의 허리를 주무르면서 입을 떼었다.
 

" 우리가 남긴 거라고는 옷 몇 벌, 찌그러진 양은냄비 두어 개, 젖가락 숟가락하고 찬거리 조금 아뇨?
오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조미료는 꺼내야 할 듯 싶소만... 아, 임자 조미료 싫어하지, 미안하오! "
 

" 꺼낼 때 비누 하나 꺼내주이소.  아, 아임니더. 피부만 상하지예 "
 

 어느날은 종일 태풍이 섬을 흔들었다. 그런날 부부는 오두막에서 찰떡 같이 붙어서 흔들릴 일이 없었다.
또 어느날은 로빈손 같은 표류자가 거북이처럼 오두막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장씨 부부는 따뜻하게
맞아주고 쌀밥과 젓갈을 내놓았으나 젓가락과 숟가락이 모자라서 표류자는 나뭇가지를 꺽어 밥을 먹었다.
표류자는 돌아가면서 주머니에서 불어터진 군용건빵을 내놓았으나 건빵만 몇 알 빼놓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특히 별사탕에 들어있다는 정력감퇴제는 장씨 군대 시절, 제거 1호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루머로 밝혀졌으나 달기만 한 별사탕이 마음에 안들었다. 어쩌면 별처럼 살았던 자신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렇기도 했다.

 무료한 날도 있었다. 장씨는 창고에서 거미줄 밑에 자리잡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떠올렸으나
도리질을 쳤다. 텔레비전을 꺼내면 전깃줄을 꺼내야 하고, 줄을 꺼내면 전봇대를 세우고, 경유 발전기를
설치하고 설치하려면 업자가 배멀미를 하면서 와야 했다. 텔레비전만 있으면 뭐하겠는가.
도서와 산간벽지용 전파는 제 아무리 눈 감고 천리길을 간다 해도, 지도에 없는 공무도까지
지 못할 게 뻔했다. 아나로그 방송이 없어져서 디지탈인데, 위성방송을 받는대도 또 시청료
납부하려면 은행에서 돈을 찾아야 하는데 등등 골치가 아파서 텔레비전을 포기하고 라디오만 꺼냈다.

이런, 소리가 나지 않는군. 건전지가 다 닳았구나. 업자가 올 때 건전지나 좀 사달라고 할껄, 하다가
다시 포기하고 라디오를 창고 안으로 집어던졌다. 무얼 꺼내지? 책을 꺼내자면 돋보기도 꺼내야 하고,
전등 아니 양초도 꺼내야 한다. 양초 꺼내면 라이타도 꺼내야 하는데 그냥 통과다. 그래도 종일
마누라하고 옆구리만 끼고 살 수는 없으니 진짜 뭘 꺼내지? 필요한 게 뭘까?

낚시대도 필요가 없었다. 먹을 게 지천인 바다에서 영양가도 없는 미끼로 순진한 우럭이나 참돔을
유혹하기 마뜩찮았던 것이다. 줄낚시도 마찬가지였다. 무동력 전마선이나 꺼낼까? 배 탈 일도 
없는데 뭐. 그럼 옥도정기 하나 정도는. 1회용 대일밴드? 간만에 바베큐로 아내를 즐겁게 해줄까?
시라도 한 수 들려줄까? 이런, 시집을 산 적이 없군. 노래를 부르자니 노래방 기기도 전기가 필요하지.
아내 생일날 해변 정도는 환하게 밝혀줘야 하는데 이런 휴대용발전기에 휘발유가 없군.
 
사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주간지, 월간지는 버렸고 있다해도 쓸모가 없었다.
메이커제 조깅화, 골프백도 꺼낼 일이 없었다. 뭐 코스가 있어야 휘두르지. 이젠 허리조차 거의
굳어서 샷은 고사하고 백을 들고가기도 힘들었다. 결국 그것들마저도 전부 잡아뜯고 해체했다.
원하는 물건은 거의 다 만들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창고문을 잠갔다.

아내의 입에서도 신랑의 입에서도 종일 젓내가 풍겼다.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호미와 갈퀴와 삽이 없어서 아내는 돌을 골라내고 손가락으로 텃밭을 만들었다.
씨앗은 없었지만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손바닥에 물을 퍼서 날랐다. 건기에는
식수마저 모자랐고 하필 민물생성장비도 고장났다. 바닷물을 퍼다가 냄비에 담고
마른 잔가지에 불을 댕기면 뚜껑 모서리에서 응축된 수증기가 모여 한 주먹 정도의 
민물이 생겼다. 그걸루 입을 적시고 나머지는 밭에 뿌렸다. 며칠 지나자 거기서 풀이
올라왔다. 보드랍고 연해서 손끝으로 만지자 손가락 끝에 연두물이 들었다. 
장씨는 그 손가락으로 쭈글쭈글한 아내의 뺨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아내의 뺨이
처녀 적처럼 발그래해졌다.
 
 어느날 집 앞에서 커다란 생선 몇 마리가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바다표범은 꼬리를 
흔들더니 곧 사라졌다. 전에 보살펴준 새끼가 어느새 저리 컷을까. 장씨와 아내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쩌면 이건 마지막 성찬이었다. 바다표범은 알고 있었을까? 
간만에 잔가지에 불을 당기고 생선을 구웠다. 연기가 구수해서 장씨는 배고팠던
고향을 떠올렸고, 아내는 대구 신혼 때- 생선 한마리 먹기 힘들었던 - 를 뒤돌아보았다. 
 

 날이 기울 던 날, 장씨가 집을 나서자 아내가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컴컴했으나
바다, 특히 무진도 쪽에서 신비스러운 빛들이 구름을 통해 전해져서 걸을 만 했다. 
장씨는 아내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두서없는 노래나마 조용히 불러주며 오두막
앞을 내려갔다. 평생 함께한 운전기사가 떠올랐다. 그는 마지막 선물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아내와 제주도 한번 다녀오는 거라고 했다. 장씨는, 아니 그때 장 회장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제주도 왕복 비행기표와 호텔 숙박비를 건네주었다. 
편지봉투는 백지수표로 만들어서 주었다. 기사는 섬까지 장씨를 따르겠노라
울었다. 발걸음을 방해하는 돌들을 밀고 피해가면서 잔잔해진 해변 쪽으로
내려갔다. 무진도가 다른 날보다 훨씬 가까와져 있있다. 

 북쪽을 탈출한 젊은이 하나가 섬에 상륙했다. 배는 거의 부서졌고, 사흘을 굶은
젊은이에게 섬은 먹음직한 식빵처럼 보였다. 젊은이는 주머니에서 칼 하나를
꺼냈는데 식빵이 너무 커서 도무지 자를 수가 없었다. 모래와 자갈을 움켜쥐면서
아랫배를 밀며 오두막으로 나아갔다. 젊은이는 잠깐 뒤돌아 보았다. 저기 
아득한 곳에서 섬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 보는 섬이었다. 섬은 붉은색과 푸른색과 
누런색이 범벅된 채 뒤집어진 고래가 절반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젊은이는
까닭없이 불안해져서 괜히 힘들게 노저어 왔다고 혀를 찼다. 

 오두막에는 냄비 두 개와 젓갈, 소금, 쌀 반포, 숫가락 젓가락 두 벌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창고가 있었으나 특수 자물쇠라서 열 수가 없었다. 반 혼수상태에서
집을 뒤졌지만 열쇠는 없었다. 그 흔한 개구멍조차 창고에는 없었다. 이빨로
모서리 한쪽을 깨물었다가 티타늄 특수강이라 이빨 두 개만 날아갔다. 
주인은 밤새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쌀 대충 씻고 밥 지어서는
젓갈하고 배 터지게 먹고난 후 트림까지 길게 했다. 그래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돌아가려던 청년은 지붕 위에서 번쩍거리는 물건을 봤다.
창고키였다. 한달음에 올라가 거대한 창고문 앞에 섰다. 키를 머리통만한 자물통에
밀어넣을 때 가슴이 콩콩 튀었다. 서서히 문을 열었다. 햇살이 창고 속을 비추자
청년은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끝이 안보이는 거대한 뼈, 생선 뼈 같기도 했고, 고래 뼈 같기도 했고, 공룡의 뼈
같기도 했고, 해체한 러시아 항공모함의 뼈대 같이도 보였다. 그런데 너무 커서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넋을 잃었다. 

 그건 전설 속의 동물 시라나타이고스였다. 1억 2천만년 전 지구에서 멸종한
거구의 초식 공룡으로 화산이 폭발하자 바다로 기어들어가 스스로 대양고래의
원조가 됐다. 

 거대한 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청년은 몸을 돌려 거친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반상회에 열중하는 바다새들의 둥지에 몸을 피하자 새들이 화들짝
날아올랐다. 청년은 그 안에서 몸을 바닥에 잔뜩 붙인 채, 동그래진 눈으로 
거대한 뼈가 창고를 나와 바다로 서서히 잠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뼈 
위에 역시 머리가 하얀 노인과 그의 아내가 다정하게 앉아서 그 공룡의 뼈대를 
질서정연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청년은 눈을 부볐다. 노인과 그의 아내가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얼떨결에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뼈대가 바닷물에 잠기자 섬을 감싼 해면이 요동을 치다가 잠시 후 잠잠해졌다.(르)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667건 45 페이지
소설·수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347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36 0 04-12
346 손계 차영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10 0 04-11
345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6 0 04-10
344 MouseBr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76 0 04-10
343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37 0 04-09
342 景山유영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77 0 04-09
341 시몬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34 0 04-08
340 장 진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8 0 04-08
339 淸草배창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99 1 04-07
338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39 0 04-07
337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9 0 04-07
336 景山유영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7 0 04-07
335 지명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9 0 04-06
334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06 0 04-05
333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31 0 04-04
332 景山유영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92 0 04-04
331 景山유영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97 0 04-03
330 물방울 유태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3 0 04-01
329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82 0 03-31
328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03 0 03-31
327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5 0 03-30
326 대기와 환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67 0 03-28
325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59 0 03-27
324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90 0 03-27
323 景山유영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31 0 03-26
322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3 0 03-25
321 물방울 유태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4 0 03-25
320 해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1 0 03-24
319 손계 차영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5 0 03-24
열람중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76 0 03-23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