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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만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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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moondrea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37회 작성일 16-06-1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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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행 감상) 아쉬움만 남긴 채

많지 않은 해외여행을 했지만 이번 여행처럼 아쉬운 감정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운명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위하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건과 현실적인 아픔이 여행 기간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드넓은 만주 벌판과 백두산 그리고 두만강이 과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 미래 또한 불확실성과 궁금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의 죽마고우 몇몇과 부부 동반하여 지난 6월 5일부터 8일까지 3박4일간 백두산과 그 주변 일대를 다녀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터라 훌륭한 기행문과 경험담이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고 있지만 나의 이 글은 다음 여행을 위한 나만의 기록일 뿐이다. 長春 도착 이후부터 長春을 떠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는데 소비하다 보니 백두산과 두만강 그리고 용정의 대성중학교 만 방문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 곳이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 벌판을 바라보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투사들의 활약이 여기저기 펼쳐지는 것 같았다. 비록 직접 가서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켜주는 것으로 상징이 되었던 비암산의 一松亭과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 강을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난 갈 때엔 ‘선구자’ 노래가 조용하게 입 속에서 맴돌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는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는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마침 이 노래가 최근에 화랑합창단에서 열심히 연습했던 것이어서 내 가슴에 더 와 닿았다. 옆 좌석에 같이 앉아있던 친구가 조그맣게 박수를 쳐주었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수많은 독립투사의 모습들이 눈앞을 스쳤다. 차창 밖의 풍경은 70년대 우리 농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옥수수를 심은 밭과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듯 한 논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락들.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이 태반이었고 밤이 되어도 창문을 통해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농촌생활이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에 많이 힘드는가 보다. 젊은 사람은 아예 없는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들만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밤과 낮이 적막하기만 하다. 그 많은 조선족이 우리나라에 있는 이유를 알듯 하다. 중국의 세계화와 개방정책이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먼 조상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고구려와 발해인일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長春을 떠나 敦化시에 있는 渤海공원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였다. 넓은 공원의 가운데를 병풍처럼 둘러싼 네모난 대리석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역대 발해국왕을 소개한 글과 초대황제인 대조영을 포함한 15명의 황제들을 대리석에 매우 웅장하게 새긴 모습들이 있는 게 아닌가. 아! 이곳이 바로 229년간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발해라는 사실에 감개무량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소개서 첫 머리를 보면서 경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소개 첫머리가 “渤海國卽唐對忽汗州...발해국은 당나라의 홀한주...”라고 적혀 있었다. 즉 발해는 당의 한 지방정권 또는 속국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21세기에 들어와 시작한 중국 측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 기념물은 2007년 6월에 완성되었다. 입맛이 씁쓸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발해역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김홍신이 쓴 대발해라는 대하소설에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따른 역사왜곡을 꼬집고 있는 터라 더 실감났다. 어찌 되었건 고구려 유민의 자손들이 천 년 이상을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한 셈이니 그것만으로 위로를 삼자.

백두산 등정은 (엄밀히 말하면 長白山 등정이다) 이튿날 6일이었다. 말이 등정이지 모든 이동수단은 차량이며 오로지 도보로 오른 것은 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 측이 명명한 長白山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오르다가 중간 기착지에서 다시 10인승 소형차에 분승하여 천지 밑에까지 이동한다. 6부능선까지는 울창한 원시림으로 꽉 차있다. 호랑이나 곰이 나올 것만 같다. 표고가 높아질 수록 기상변화가 심하다. 아래에서는 맑고 더웠는데 오를 수록 시원하고 구름이 몰려든다. 맑은 날의 백두산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대로 그 날도 구름이 서서히 몰려오더니 비가 흩날리다가 뿌리다가 급기야 우박까지 내리는가 하면 천둥이 귀를 때리곤 하였다. 누군가 우스개로 말한 “백두산은 백일에 두 번밖에 좋은 날이 없다”는 뜻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불순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전체 산의 모습과 천지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우의를 챙겨 입어야만 하였다. 나는 회사에 다닐 적에 지급받았던 질 좋은 우의를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입게 되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값싼 비닐 우의는 비를 막아내기에 부족한 생각이 들었다. 有備無患. 백두산을 오르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는데 우리가 택한 곳은 북파코스였다. 북한과의 경계선은 나무 난간대로 구분 해놓았고 중국인 공안병이 군데군데 서서 여행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天池의 물은 아직도 얼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멀리 보이는 북한 측 산도 동면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녹지 않은 눈덩이가 그걸 말해준다. 관광객은 아직 성수기가 아닌 탓으로 많지는 않아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비와 우박이 방해될 뿐이었다. 장래 다시 또 오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여기저기를 배경으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여행객은 한국인과 중국인 밖에 없었다. 평생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백두산을 이제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감개무량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건 백두산이 아니라 長白山을 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長白山에서 백두산을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리라. 마치 자식을 앞에 두고도 내 품안으로 품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멍하니 바라만 볼 뿐…. 아쉬운 감정이 북바쳤다. 두 번째 아쉬움이다. 아! 언제 저 곳을 마음대로 오를 수 있을까. 내 생전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런 아쉬움을 남긴 채 왔던 길로 되돌아 왔다. 꼬불꼬불 낭떠러지길을 10인승 봉고차를 타고 내려 오면서 아래를 쳐다보니 아찔하다. 빗방울은 여전히 차창을 때린다. 내려오는 도중 장백폭포에서 정차한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폭포가 된 곳이다. 비가 더 강하게 내렸다. 이 물은 송화강으로 흘러든다. 물이 차가웠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젖줄이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으니 땅이 매우 비옥하다.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였고 들에는 곡식들이 싱싱해보였다. 영하 40도의 겨울 날씨만 아니라면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땔감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우리와 같은 온돌이지만 침대 위주의 생활양식이라 조금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단체관광이라 그럴 수 없어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창문이 너무 크고 많다는 게 도저히 이해 불가다. 외풍이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을 것이다.

버스는 밤이 돼서야 연길시로 들어왔다. 연길시는 연변지역에 있는 가장 큰 도시이다. 연변은 조선족특별자치구역으로 중국 중앙정부가 선정한 곳이기에 우리의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마치 한국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게 간판이 한글과 한자로 병기되어 있다. 글자 모양도 과거 북한식의 글씨체보다 최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현대화되어 깔끔하고 말끔하다. 새로 지은 건물과 과거의 낡은 건물들이 서로 섞여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인 대성중학교(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를 방문했다. 정문을 들어서자 윤동주 시인의 詩碑와 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序詩를 몇 번이고 암송했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평양에 있는 숭실 중학교와 서울의 연희전문을 거쳐 1942년 일본 릿쿄대학과 도오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1943년 그는 고향으로 오는 도중 일본 정부의 징병제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45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적인 민족시인인 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언제 읽어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용정중학교 역사박물관에 들러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 운동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아쉬웠던 마음을 위로 받았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1990년 전만 해도 이곳은 북한과 훨씬 더 가까왔으나 이후부터 남한의 영향이 더 크게 미치게 되어 우리나라 식으로 모든 게 닮아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현대식 건물에 잔디까지 입힌 운동장을 가진 조선인 학교는 서울에 있는 학교보다 더 좋아 보였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초등학생들을 보니 동족의 정이 물씬 다가온다. 우리의 아들들이요 손자들을 보는 것 같았다. 학교 옆을 지날 때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어린이와 내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안녕!’이라고 웃으면서 인사했더니 부끄러운 듯 달아나 버린다. 때 묻지 않은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중국에는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이 56개 있는데 그 중에서 조선족의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유는 우리나라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닮아가고 있다. 시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끝내고 나오니 바로 옆에 류경호텔이 있지 않은가. 그 곳은 지난 3월 이 식당에서 일하던 북한 여자 종업원들이 집단 탈북 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했다고 하여 큰 뉴스거리가 되었고 이를 미끼로 백두산을 여행하는 한국인을 인질로 잡겠다는 엄포를 내놓게 만든 바로 그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한가하게만 보인다. 영업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지만 왠지 유령이 나타날 것 같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유령 아니면 김정은이 파견한 테러리스트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당초 백두산 여행 실시 여부를 두고 잠깐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 원인 제공자를 이곳에서 결국 만나다니…. 물론 조심하였다.

연길을 떠나 圖門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는 두만강변 도로를 선택하였다. 북한의 공갈과 협박으로 중국 공안측이 안전 차원에서 이 길을 폐쇄할 수도 있다는 안내인의 설명이 있었지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폐쇄되지 않아 북한을 지척에 둔 두만강변 도로를 따라 도문까지 올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두만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시냇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폭이 너무 좁아 보였다. 중국 측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탈북인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 유지로 국경의 삼엄한 분위기는 조금 덜한 것 같다. 탈북인 감시가 주 임무이기 때문이리라. 圖門이 가까워 오자 북한의 남양역과 철교가 보였다. 圖門 시내에서 하차하여 두만강이 보이는 광장으로 오니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아주머니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가사를 들어보니 한국의 흘러간 옛 노래다. 아주 신이 났다. 두만강 건너편에 북한 초소가 보인다.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도 보인다. 큰 소리가 아니더라도 다 들릴 것 같다. 그러니 아주머니들이 부르고 춤추는 노래가락 소리도 자연히 잘 들리리라. 매우 훌륭한 심리전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55마일 휴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긴장이 덜하다. 탈북민들이 계속 증가하자 북한당국은 초소를 50m마다 세웠고 철책도 더 보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탈북 했다는 소문이 뜸하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90년대 중반이 최고였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두만강을 실제로 보니 물도 맑지 않고 폭도 넓지 않으며 수심도 얕은 곳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渡江이 가능하리라.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염려하는 중국 측의 고민을 알 것 같았다. 김정구 가수가 불렀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머리에 떠올랐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님은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여기서의 님은 우리의 조국이다. 이렇게 두만강은 민족의 역사를 안고 흘러온 강으로 실향민들이 마지막 조국 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통한의 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버렸다. 한반도를 반동가리로 만들었던 김일성 일가의 세습이 빚은 통한의 강이 되어 버렸다.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는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 가두는 강이 되어 버렸다. 長白山에서 백두산을 바라보았던 아쉬운 감정이 이곳에서도 솟았다. 세 번째 아쉬움이다. 누구의 말처럼 강물을 두 번 만 마시면 건널 수 있는 강을 사이에 두고 가지 못하는 나의 조국. 통한의 서러움과 아쉬움이 비로 변했는지 하루 종일 찌푸린 날씨에 비마저 보슬보슬 내리니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니라 황토색 흙탕물이었다. 그래도 손을 아니 적실 수가 없어 나는 손을 물에 담가 보았다. 중국 측에서 운영하는 나룻배가 두만강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과거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채 강을 오르락내리락 했다고 하는데 최근에 일어난 집단 탈북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 나는 백두산과 두만강을 다 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한없지만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마음을 달래주는 시가 있었으니 바로 南怡장군의 시다.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雖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이하니 남아로 태어나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어찌 대장부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시가 화근이 되어 젊은 나이에 일찍 출세한 장군은 반역죄로 처벌되었지만 그 氣象만큼은 오늘날까지 후세에 전하게 되어 우리가 이만큼 나라를 튼튼한 반석에 올려놓았지 않은가. 비록 북한 땅을 아직 통일시키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통일이 될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욕심 같아선 옛 고구려와 발해가 차지했던 만주벌판도 정복하고 싶지만 말이다. 훌륭한 선조들과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선열들의 빛나는 精氣와 精神이 이어지는 한,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날도 반드시 찾아오리라 확신한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희망 또한 많이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여건이 허락된다면 다음엔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긴 역사현장을 찾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 (2016년 6월)


백두산천지 (1).jpg

두만강.jpg

두만강변 춤추는 모습 (1).jpg

만주벌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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