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1) > 소설·수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소설·수필

  • HOME
  • 창작의 향기
  • 소설·수필

☞ 舊. 소설/수필   ♨ 맞춤법검사기

 

 

모든 저작권은 해당작가에게 있습니다.무단인용이나 표절을 금합니다

결심(1)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41회 작성일 16-08-29 18:58

본문

결심


1
 
 이른 아침,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선 Q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배 위쪽, 김이 서려 감춰진 얼굴은 남들에게 잘생겼다는 말을 가끔 듣는, 
그런 얼굴이다.

 자세한 인적사항은 밝힐 수 없지만 Q의 나이는 서른하나, 제법 튼실한 
회계법인의 세무팀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수입은 
아니지만 미혼에다 사치스러운 취미도 없기 때문에 돈에 허덕이는 일은 
없다. 취미는 독서와 음악 감상. 보통 재미없는 사람들이 뭐라도 취미를 
가져야 하는 관행상 형식적으로 대답하는 가짜 취미에 불과하지만, Q는 
책과 음악을 정말로 좋아한다. 어젯밤에는 탄호이저 서곡을 들으며 죽은 
신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오전 7시 반, 슬슬 커피 잔을 놓고 나갈 시간이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실의 전신거울 앞에서 복장점검을 한다. Q가 다니는 회사는 사칙이 
엄격해서 광이 나지 않는 구두, 모닝컷을 하지 않은 밑단, 엉덩이의 
삼분의 이보다 짧거나 긴 재킷, 비뚤어진 넥타이, 지저분한 두발상태에 
대해서는 일일이 감점을 매겨 장기적인 인사고과는 물론 당장의 급여에도 
반영한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처음에 구시대적 처사라며 투덜거렸지만
-마침 입사했다는 실감 때문인지 그저 농담하듯이 푸념하는 수준이었지만- 
Q에게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오해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Q에게 어느 정도의 결벽증이 있는 것은 맞지만 모난 것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중증은 결코 아니다. 그저 반듯하게 정돈된 것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수준이고, 그런 기질을 남에게 강요해서 불쾌함을 안겨준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쨌거나 이 자로 잰 듯한 단정함은 직급이나 나이를 떠나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 Q가 아닌 회사가 강요하는 규칙,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규칙이기 때문에 Q는 회사에 발을 내디딘 첫날부터 집에 온 듯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안정감은 능률로 이어져서 비교적 순탄한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동기는 물론 이후에 들어온 후배들도 그의 
남모를 취미에서 오는 신비함과 특유의 안정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고민이 
있을 때는 Q를 자주 의지했다. 
 

2

 어느새 5년차지만 출근길의 무질서는 언제나 당혹스럽다. 구겨진 치맛자락, 
너무 튀어나온 셔츠 소매, 해진 구두, 그런 제멋대로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사옥 
입구에 들어선 Q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로비에 들어서면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경비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묵례한다. Q도 반듯하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7을 누르자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것도 어느새 5년차지만 여전히 설레는 일이다.

 업무, 동료, 환경도 좋지만 Q가 회사에 불만을 품고 있는 점이 있다면 옥상
 말고는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이라는 것이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짧은 손톱을 
유지하는 Q는 골초다. 그 사실에 부끄러움은 없다. 손톱을 짧게 깎는 것도 
단지 그 거지 누더기 같은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가 시작되는 오전 9시 전에는 옥상에서 대여섯 개비 피울 것. Q가 정한 
자신만의 규칙이다. 옥상은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도 
없다. 5층이나 6층이었으면 대여섯 개비의 담배는 서너 개비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7층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숫자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옥상과 바로 
이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전 8시 40분쯤. 무릎을 살짝 덮는 스커트, 검정색 스타킹, 절제된 걸음걸이, 
‘커피 드세요’라는 한마디. 그리고 또 한마디, ‘오늘도 엄청 피워대네요.’ 
올해 초에 입사한 같은 부서의 A양이 따뜻한 커피 잔을 내민다. 당연히 후배가 
차를 대접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그저 줄담배를 피우는 Q처럼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만의 규칙이다. 오전 8시 40분쯤, 커피 두 잔을 들고 옥상으로 
갈 것. A양은 담배냄새를 싫어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밝은 성격을 지녔다. 
골초에다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별로 없는 Q와는 반대지만, 양극이 붙어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자석처럼 나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회사에 흡연자가 Q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각의 옥상에는 언제나 
몇 개의 그룹이 드문드문 간격을 유지한 채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있다. 
A양이 옥상에 처음 나타나고부터 며칠간, 옥상에 포진한 무리는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남녀를 흘끗 보며 ‘사내연애다.’라는 봉화를 피워 올렸지만, 
이 남녀가 사수와 부사수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후에도 별다른 소문이 
돌지 않게 되자 약간의 질투가 섞인 의심의 불씨는 저절로 사그라졌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꽤 어울리는 한 쌍이네.’라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두 사람 
사이에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사칙에 
‘사내연애 금지’라는 조항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공공연한 애정행각만 벌이지 
않으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허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격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는 유난히 관대했다. 

 ‘조금은 티라도 내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옥상의 젊은 남녀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친근한 사수와 부사수’라는 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것은 맞지만 쓸데없이 주목을 받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밖에서 따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 누구도 호감이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일상의 
은밀한 눈빛과 제스처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남들이 보면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그 풋내 나는 사랑을 즐기고 있었다. ‘조만간 말해야지.’라고 
속으로 다짐하면서도, 당분간은 그 풋풋한 즐거움을 계속 만끽하기로 
했다. A양이 커피 잔을 내밀며 ‘그러다 폐 썩어요.’ 따위의 핀잔을 주면 
Q는 가볍게 맞장구친다. 그러다 바람이 바뀌어 A양에게 담배연기가 
닿을 것 같으면 슬쩍 자리를 바꿔준다. 그렇게 10분쯤 있다 보면 옥상에 
있던 무리가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마지막에 남아있던 남녀도 7층으로 
내려간다. 

 오전은 여느 때와 같다. 그저 기계적인 긴장감만 살짝 감도는 그런 
시간대지만, 나란히 앉은 Q와 A에게는 그렇게 따분한 시간이 아니다. 
다른 모든 책상들과 마찬가지로 파티션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얼굴을 
깊게 파묻지 않는 이상 슬쩍 곁눈질만 하면 옆 사람을 볼 수 있다. 
오른쪽에 앉은 Q는 왼손잡이이기 때문에 잡다한 비품들을 오른쪽 
구석에 밀어 넣고 몸이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오른손잡이인 
A양은 알게 모르게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사실 왼손잡이라는 것은 
핑계다. 왼쪽에 앉은 사람이 꼴 보기 싫었다면 조금 거치적거려도 왼편에 
서류와 비품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멀찍이 떨어졌을 것이다. 
A양이 예뻐서 다행이다. 

 ‘먼저 일어날게요.’ 점심시간이 되면 둘의 간격은 잠시 벌어진다. Q는 
남자 동기들과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A양은 여자 동기들 중 마음이 
맞는 그룹과 사내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남자 그룹은 여자 얘기를, 
여자 그룹은 남자 얘기를 한다. A양이 입사한 후로 각각의 그룹에서는 
한동안 Q와 A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지만 아무리 캐도 가십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육체를 떼버린 풋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리 물어봤자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얼마 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시 ‘이 남자’나 ‘이 여자’로 바뀌게 되었다. 
이 불특정 남녀는 때로는 가공의 인물이었다가 망상이나 비방의 대상이 
되는 실제 인물로 변하기도 했다. 발가벗겨진 ‘이 남자’와 ‘이 여자’는 
꿈의 동산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668건 40 페이지
소설·수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498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97 0 09-08
497 아무르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27 0 09-04
496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38 0 09-03
495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6 0 09-03
494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5 0 09-01
493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2 0 08-31
492 양승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89 0 08-30
491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66 0 08-30
490
결심(4) 댓글+ 1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4 0 08-29
489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22 0 08-29
488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89 0 08-29
열람중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2 0 08-29
486 김상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53 0 08-28
485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7 0 08-26
484 시몬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24 0 08-26
483 박성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7 0 08-25
482 손계 차영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70 0 08-25
481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99 0 08-23
480 지명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6 0 08-23
479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8 0 08-22
478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88 0 08-19
477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7 0 08-17
476 강현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8 0 08-17
475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7 0 08-15
474 강현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38 0 08-15
473 바람고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31 0 08-14
472 김광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85 0 08-14
471 강현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67 0 08-13
470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46 0 08-13
469 가을의 바다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4 0 08-11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