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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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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une pip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90회 작성일 16-08-29 19:10

본문

3

 오후 4시, 시계의 초침마저 게을러지는 시간이다. 단체로 아편굴에 
들어온 것처럼 모두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Q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알게 모르게 다가와 팔다리와 눈과 귀와 입을 스르륵 베어간 것처럼 
반쯤 죽은 채로 앉아있다. 그래도 코는 남아있다. 다른 감각은 모두 마비돼도 
이상하게 후각만큼은 멀쩡하다. 온몸이 하나의 거대한 코가 된 것 같다. 
이럴 때는 몸이 시키는 대로 한다. 가만히 앉아 주위의 냄새를 맡는다. 
A양의 희미한 체취가 느껴진다. 오늘은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언젠가 예의 옥상에서 향수냄새와 담배냄새 중 어느 쪽이 더 지독한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물론 애초에 결론이 없는 시시껄렁한 잡담에 
불과했지만, 그날 이후 A양은 한동안 향수를 뿌리지 않고 출근했다. 
Q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지 웃기 위한 농담이었어도
향수가 탄생한 지저분한 배경에 대해 얘기했기 때문이다. 

 A양이 다시 향수를 뿌리고 출근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였다. 
점심시간까지는 전혀 몰랐고 오후 4시가 지나서야 희미한 제라늄 향을 
포착할 수 있었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 어쩐지 A양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웬일로 향수를 뿌렸냐고 물었다. 그때 A양은 약간 놀란 
눈으로,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무릎을 잔뜩 오므렸다. ‘그냥요.’ 순간 아차 
싶었지만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할 
무렵이 돼서야 아까는 무신경한 소리를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A양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지만 당혹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향수 싫어한다면서 제라늄은 또 어떻게 알았어요?’ 사계절 피어나는 
꽃이라서 제라늄을 원래부터 좋아했다는 말에, A양이 수줍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4

 ‘다행이네요.’ 그때의 눈빛과 미소가 퇴근길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예전에도 이렇게 ‘다행이네요.’ 문득 생각난 적이 있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다음 날이나 이틀 뒤에 A양이 향수를 뿌리고 출근했다. 
이제 자신에게도 주기가 생겼다고 생각할 무렵,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이번 정류장은 OO 백화점입니다.’라는 음성이 들려온다. 
‘다행이네요.’와는 정반대의 기계적인 목소리다. 집까지는 아직 대여섯 
정류장 남아있지만 서둘러 내릴 채비를 한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지저분한 차창 너머로 백화점 입구가 보인다. 

 이 시각의 백화점은 출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부분 입구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버스나 다른 누군가를 기다린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자가 까치발을 들고 먼 곳을 향해 손짓한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처럼 입을 크게 뻐금거리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가느다란 발목을 
금색 발찌가 감싸고 있다. 규정 때문에 스타킹을 신지 않은 A양의 맨다리를 
구경할 기회는 없었지만, 이런 발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1층은 평소에 둘러보지 않던 곳이라 낯설다. 향수, 향수하면서 화장품, 
화장품, 화장품 매장을 지난다. 진열대를 정리하던 여직원이 힐끗 
쳐다보더니 과장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얼굴에는 어떤 얼굴로 답해야 
할지 항상 고민된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안해서 정중히 향수 매장의 
위치를 묻는다. 올림머리를 한 여직원은 예의 미소를 유지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비스듬한 왼쪽을 가리킨다. 직각으로 올린 팔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저쪽 끝으로 가시면 됩니다.’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입술 모양에 변화가 없다. 감사합니다, 하고 자리를 떠날 
때도 눈으로 살짝 웃을 뿐이었다. 

 방향을 가리키던 팔이 지나치게 정직해서 ‘저쪽’이라는 애매한 
단서만으로도 향수 코너를 쉽게 발견한다. 나란히 줄지어 선 몇 개의 
매장들이 저마다의 악센트 조명으로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한다. 그중에서 
가장 차분해 보이는 매장을 고른다. 

 ‘어서 오세요.’ 똑같은 올림머리지만 입은 제대로 움직인다. 이번에는 
조금 많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특별히 찾고 있는 제품이라도 있나요?’ 
‘선물용인가요?’ ‘누구에게 선물할 예정인가요?’ ‘실례지만 선물 받을 
분의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이런저런 질문 세례에 Q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다가 아, 이 사람도 제대로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더 성실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제라늄이라면 이 제라늄 앤 버베나가 
좋을 것 같네요. 한정판으로 나온 제품이라 희소성도 있고, 무엇보다 
부담 없는 코오롱이라서 직장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한정판이면 
다음에 똑같은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네, 솔직히 그런 
점도 있죠. 그래도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처럼 연례 이벤트가 아니라 한 
순간에 승부하는 특별한 이벤트라면 이런 한정판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제법 그럴 듯하다. 역시 영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여직원은 방긋 웃으며 시향용 샘플의 뚜껑을 
열고 시향지 끝을 살짝 적신다. 곧바로 손목을 가볍게 흔들고, Q의 코앞에 
시향지를 쓱 내민다. 손목이 무척 가늘다. 티스푼으로 뭔가 떠먹여주는 
모양새라서 Q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입을 벌릴 뻔했다.

 여직원의 설명이 이어진다. 왠지 길어질 것 같은 설명이지만 워낙 다정한 
얼굴이라 군말 없이 듣는다. 탑노트는 산뜻한 분위기의 베르가못, 바질, 
버베나. 미들 노트는 제라늄과 네롤리와 쿠마린. 도중에 에드워드 7세라는 
이름도 튀어나온다. 에드워드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A양이 떠오르는 향이라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더 일찍 오셨으면 잔향까지 
천천히 즐길 수 있을 텐데, 아쉽네요. 마지막의 은은한 베티버 향이 꽤 
매력적이거든요.’ 폐점시간이 언제냐고 묻자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10분 뒤라고 한다. 이런 설명을 듣는 것도 괜찮구나 생각하면서, 다음에 
다른 제품을 살 때는 조금 더 일찍 오겠다고 한다. ‘저희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기프트라도 포장지 실링은 안 하는데 괜찮겠어요? 이 리본 묶음이 
일종의 시그너처거든요.’ 영국 브랜드라 그런지 절반이 영어다. 네, 라고 
하기도 전에 여직원은 재빨리 검정색 리본으로 장식한 케이스를 내민다. 
평소 보던 리본보다 두꺼워서 약간 투박한 감이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심플한 패키징 박스와 잘 맞아떨어져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연출한다. 
무엇보다 잔뜩 오므린 다리처럼 꽉 묶인 매듭이 마음에 든다. 검정색 
스타킹과 그 사이의 희미한 제라늄 향. 포장지로 요란하게 두르는 것보다 
이쪽이 낫다고 하자 손목이 예쁜 여직원이 손에 손을 포개고 가볍게 웃는다.
 ‘다행이네요. 아차, 쇼핑백에 담아드릴게요.’ 

 백화점 앞은 어느새 사람이 꽤 줄어들었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Q는 길을 건너 집과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린다. 길을 건넌 것은 그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집에 가서 차를 타고 다시 나올까도 했지만, 그러면 너무 피곤해질 것 같아 
이대로 버스를 타기로 한다. 평소 출퇴근 시간의 정체가 너무 버거워서 차는 
주말에만 이용한다. 토요일 아침에 세차해야지, 하는 사이 기다리던 버스가 
다가온다. 노선도와 번호를 재차 확인하고 버스에 오른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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