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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웃음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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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전영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36회 작성일 16-12-0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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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웃음




  어느 해 봄이 지날 무렵이었다.

  “너희 아이 옷만 사 오려니 네 언니한테 미안하더라.”

  둘째 아이를 낳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손자를 보러 온 친정아버지 말씀이다. 전날 서울에 도착하여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언니한테 받은 용돈으로 손자 옷을 산 모양이었다. 그때 우리는 인천에 살고 있었다.


  해방되고 나서 아버지는 경찰이 되었다.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6‧25를 겪으면서 혹독한 고난을 치렀다고 한다. 동네까지 공산군이 들어와 온 가족은 산속에 숨어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휴전되어 경찰직을 그만두고 정미소를 시작했다. 단순히 방아만 찧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사업수완이 좋았던지 완도에서 배를 빌려 도정한 쌀을 가득 싣고 부산에 가서 장사꾼들에게 넘기고 오셨다. 그때마다 가방으로 돈을 가득 담아오셨다고 한다.

  내가 너덧 살 무렵 동네에서 가장 큰 기와집과 신식 정미소를 지었다. 돈이란 돌고 돈다고 보관할 데가 없어 베개 모양으로 만들어 이불장에 보관했다는 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은 타락하기 마련이라는데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작정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기도박단에 걸려들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손을 댄 노름이 번번이 주머니를 거덜 냈다. 본전을 찾으려고 재산이란 재산은 모조리 저당 잡히고 급기야 빚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아버지는 서울로 야반도주 하셨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토담집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영국풍 신사였다. 머리엔 늘 포마드를 반지르르하게 바르고 조끼까지 갖춘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셨다. 그런 모습으로 60년대 서울과 부산에서 열렸던 산업박람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친구들과 어울려 전국 일주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입담도 좋아 재담가인데다 체구도 건장하고 기분파였다. 돈까지 잘 쓰니 “너희 아버지가 한 번 웃으면 근동 여자들이 침을 흘렸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그렇게 사셨던 분이 주머니가 비었으니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맏딸에게 용돈을 받아 갓 태어난 손자 옷을 사면서 언니한테 미안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이런 삶은 나에게 돈은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은연중에 각인시켰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치게 편애했다. 이 일로 형제들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다. 편애의 이유는 당신 모습과 행동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란다. 또 하나는 유독 내가 아버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도정할 쌀을 수매하러 가면서 색동옷을 입혀서 업고 다녔다. 농한기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방 가득 모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장구를 치고 나에겐 춤을 추게 했다. 조금 자란 후엔 읍내에 나갈 때마다 손을 잡고 걸으면서 상점 간판을 따라 읽게 했다. 읍내 입구부터 서림상회, 해남 문방구, 동아 서점, 낙원 이발관, 파라다이스 당구장, 아버지가 읽어주면 나는 따라 하면서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쳤다. 그러면 아버지는 당신 단골이었던 이발관이랑 당구장에 들러 학교도 안 들어간 꼬맹이가 간판을 다 읽는다고 딸 자랑이 끝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나에게 행복도 슬픔도 모두 주었다. 번번이 허물어지는 기둥이 되기도 했지만, 내 기억에는 늘 든든한 울타리로 남아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에 돌덩이가 얹혀진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랬다. 네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고등학교에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오셨다고, 애들은 매점에서 무얼 먹고 있는데 너만 교실에 앉아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에게 조금이나마 글을 쓰는 재주가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있을 때 집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늘 나에게 보냈다. 글을 못 읽는 할머니께 읽어드리면서 엉엉 울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시 같은 문구가 씌어 있었다.

“편지야 편지야/어서어서 가거라/내 딸 영란 기다리는/전남 해남 복평으로”라는.


   지난 삶을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유별난 사랑을 다른 여인한테 빼앗겨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내 어려움만 생각하고 아버지의 내면에서 겪었을 괴로움은 외면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늘그막에 여러 여자 때문에 긴장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삶을 많이 후회하셨다. 1988년, 회갑을 지낸 다음 해에 세상과 이별하셨다. 마지막 가시던 날 ‘너희한테 미안하다’라는 한마디로 아들을 찾아다니며 딸들에게 상처 주었던 지난 삶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불치병이 도지는 날은 / 달 속의 아버지를 불러냅니다 / 우리 딸 그 동안 잘살았어? / 아버지 얼굴이 환합니다 // 덩덩 궁 따 궁 담장을 넘어가는 / 아버지 장구 소리 신명 나게 돌아오고 / 얼쑤 절수 추임새 넣으면 / 나풀나풀 춤을 추던 나도 보입니다 // …중략… / 울퉁불퉁한 세월 / 변덕스러운 바람 불어와도 / 은은한 난초 향기 잊지 말라 / 당부하는 아버지 // 달덩이같이 환한 웃음 남기고 / 다시 달로 드십니다

                                                                                                            졸시 「보름달을 보며」 부분

 

  떠나신 후 꿈속에도 찾아오지 않고 감감무소식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의 달덩이같이 환한 웃음에 갇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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