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 수기7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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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34회 작성일 19-02-26 12:40본문
그런 면으로 보면 아내 역시 난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잘 웃었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잘 웃음을 보였습니다. 웃음으로 쾌락에 가까워지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여자가 근원적으로 남자보다 탐욕에 가까운 것입니까. 남자들처럼 적당히 얼버무려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내를 만난 건 어쩌면 축복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런 축복을 저는 돈에 팔아 버렸습니다. 못 받은 돈을 받을 것입니다. 안 형과 김 형에게 따뜻한 여관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이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 받을 돈으로 말입니다.
간판의 마지막 글자 원을 맛있게 태워 먹으면서 불기둥은 날름 거렸습니다. 아내의 아픈 골치가 그것으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 모습에 잠시 희열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역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더 한 희열을 느꼈을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아닙니다. 폐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만 절 따라와 주십시오. 그들은 내가 이 밤에 돈을 빌리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받아야 할 돈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빚 받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저를 말렸지만 저는 꼭 지금 받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돈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마지막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남영동 어두운 골목을 돌고 나오는 골목의 모퉁이를 몇 개를 돌아 전등이 켜진 대문 앞에 섰습니다. 이 집에는 내가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벨을 누르니 누군가 나왔습니다. 주인아저씨를 뵙고 싶은데요. 주무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인집 아주머니를 부르러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안 형이 나를 잡아끌었습니다.
그냥 가시죠.
아닙니다, 받아야 할 돈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말을 하니 안 형이 다시 김 형이 있던 골목 끝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주인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누구시죠?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술이 취하신 것 같은데, 누구시죠?
저는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한 번 더 말했습니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한 번 더 말했을 때 저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 번도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만 몸에 남아있는 기운이 전부 무엇에 의해 쪽쪽 다 빨려 나가버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만 문기둥에 두 손을 짚고 뻗은 팔 위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만 오열을 하고 말았습니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책값.... 여보.
[내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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