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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바람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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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김영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04회 작성일 19-09-1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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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의 바람 / 김영채

                                             

  요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침묵이 집안에 조금씩 차오를 때마다 답답했다. 거실이나 방에 자리하고 있는 가구, 탁자, 책상들이 오랫동안 동굴 속에 굳어진 암반처럼 보였다. 나도 암석같이 마음이 굳어져 가고 있지 않았나? 벽과 벽으로 차단된 채 가려진 아파트에서 창밖을 내다봤을 때 나뭇잎, 철 따라 피는 꽃들은 항상 거리를 두고 저만치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길을 따라 걸었다. 가로수 길은 노란 은행잎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질주하는 차량 옆으로 은행잎은 인도 사이로 쌓여갔다. 수북이 쌓인 은행잎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짙은 색상으로 변해갔다. 떨어지는 잎들마다 가늘게 웃는 웃음 사이로 동요 같은 음표들이 새겨졌다. 아니, 나뭇잎 음표를 따라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머뭇거렸다. 파란 하늘엔 흰 구름이 무늬를 그리며 흘러갔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 나무들이 뒤엉킨 사이로 맑은 눈을 두리번거리던 다람쥐가 놀란 듯이 나무줄기를 타고 곧 사라졌다. 나를 반기나 싶었다. 숲길은 낯선 길이 아니었다. 어쩌다 산행 때 찾아오는 곳이었다. 나뭇잎은 벌거벗는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높이 솟아오른 자작나무는 흰 눈이 그리운지 희게 분칠해 있었다. 계곡을 타고 오르다 보면 등치 큰 참나무들이 쓰러지고 베어진채 나무 등걸로 몸통을 드러낸 모습이 안타까웠다. 강한 열기가 풍겨오는 나무,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나무가 한낱 벌레곰팡이 균에 쓰러지다니, 마음이 아팠다. 바람이 숲 속을 흔들었다. 늘어진 소나무 가지위로 나뭇잎이 우수수 내려앉았다.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산자락을 굽어봤다.

  어둠이 쌓이는 산등성이 위로 보름달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숲은 조금씩 은빛으로 밝아졌다. 정적이 깃든 숲속으로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로 정적을 깨웠다. 솟아오른 달빛은 숲 위로 반짝였다. 산등성이 아래 골짜기를 타고 달빛은 은빛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꿈속을 헤매듯이 그 물결 위로 수많은 나뭇잎에 실린 조각달이 넘실댄다. 바람결에 출렁인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나뭇잎은 조각달이 흔들릴 때마다 기우뚱거린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 위로 언뜻 보이는 조각달에는 저승으로 떠나간 혼령들이 희뿌옇게 보였다. 혼령들은 언젠가 나와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내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조각달이 있었다. 나의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유년시절 홀로 계신 할머니는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는 외로웠다. 또 손주가 외아들이다 보니 내게 많은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어떤 때는 맛있는 곶감을 숨겨놨다가 가만히 주었다. 그러나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정없이 혼을 내주고 달래기도 했다. 늘 할머니한테 배어나는 냄새에 젖었고 쭈글쭈글한 젖무덤을 만지며 자랐다. 그런데 소슬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에 갑자기 할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슬픔보다 할머니가 떠나가서 너무 외로웠다. 허나, 지금 할머니 모습이 희뿌옇게 보인다. 조각달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모습은 평시와 다름없이 보였다. 유심히 보니 조각달 사이로 어디서 본 듯한 스님이 합장하지 않는가! 나도 합장을 했다. 구름 한 편이 달 위로 흐르고 있다.

피리소리가 구슬피 들리더니 시를 읊는 소리가 달빛을 타고 들려왔다.

 

죽고 사는 길이 /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리저리 떨어질 잎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신라의 향가 <제망매가

 

  이 읊는 소리는 제망매가(祭亡妹歌) 가였다. 나는 놀라웠다. 내 귀를 의심했으나 분명 신라의 향가였다. 온몸이 바위처럼 굳어져갔다. 그때 가사를 걸친 채 달빛 속에 나타난 스님은 월명사(月明師)였다. 너럭바위 한쪽에 좌선 자세로 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후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누군가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었네. 옆에 있는 거사가 들을 줄 야! 나도 몰랐네. 그러나 인연의 끈은 이어졌네.” 그리고 피리를 은은히 불었다. 피리소리는 가늘게 나뭇잎 사이로 흘러갔다. “스님은 천년 동안 극락세계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허허, 천년은 찰나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오늘 밤 만남도 찰나고, 극락세계가 어디 따로 있는가. 내가 도를 닦으며 머무는 곳이 바로 극락이라네.” “미륵불은 중생을 제도하려 도솔천에서 수십억 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 세상사에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한 벗의 죽음을 곁에서 애통해하지만, 억겁의 세월 속에 한낱 찰나라네.” “바로 지나가는 한 조각구름이라!” 잠시 구름에 가려진 둥근달이 제 모습을 찾았.

  너럭바위에는 나 혼자 앉아 있다. 방금 옆에 앉아 있던 월명사(月明師)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달빛을 받으며 숲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아무도 없다. 바람만이 천년의 시를 들려주는 듯했다.

      

*월명사(月明師) :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삼국유사>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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