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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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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영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698회 작성일 20-04-2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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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1. 방랑자


    요즈음처럼 날씨가 꾸물꾸물한 오후가 되면 나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펼쳐 보기도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끓여 홀짝홀짝 마시며 예전에 유행했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즐겨 보고, 즐겨 부르는 주제는 주로 기다림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난 아내와 언제 돌아올 지 기약이 없는 아들이 남겨 두고 간 내 마음 속 공터가 허전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가고, 하루하루 몸 움직이는 게 어제 같지 않아 풀 죽어 지낸 게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갑자기 거울 속에서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앉은 노년의 남성이 나를 안쓰러운 듯 쳐다보는 모습에 몸서리치도록 놀라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소리쳐 보기도 하지만, 그 낯선 노인은 나에게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도리어 호통 치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젊은 시절 나는 방랑기가 있어 나라 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지요. 학교 다닐 때 배운 목공 기술이 있어 가는 곳마다 일거리는 때맞추어 나타나 주었고, 끼니는 그냥저냥 때웠으며, 잠자리는 일거리를 내어 준 집에서 한 귀퉁이를 마련해 주면 거기에 그냥 몸을 뉘었습니다. 나는 집을 떠나는 것이 그냥 좋았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이 이유 없이 좋았으며, 그 사람들로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를 주워듣는 게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왠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좀이 쑤시고,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자꾸 먼 산 너머에서 어서 오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이내 주섬주섬 가방을 싸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지요.

집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이런 나를 볼 때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 그 지랄 같은 방랑벽을 없앨 수 있을 텐데…”라고 하시며 채근하셨지만 나는 건성으로 “네.” 하고 달아나기 일쑤였지요. 그런데 언젠가 집 근처에 일감이 생겨 일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처음 보는 처녀가 한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눈길을 확 끌만큼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옆으로 힐끔힐끔 보았더니 볼에 약한 홍조가 돌면서 발그레해지는 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네가 오늘 온다고 하여 내가 불렀다.” 하시며 “착한 아이니 이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이 아이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어라.” 하셨습니다. 옆에 계신 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뽀끔뽀끔 피워 올리며 “큼, 큼” 거리셨습니다. 벌써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그 처녀 사이에는 묵계가 다 되어 있는 것 같았지요. 나에게 지랄 같은 방랑벽이 있다는 사실도 처녀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결혼을 하고 3 ∼ 4년 동안은 아무 탈 없이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말이지요. 아들을 낳고, 아이 재롱을 보아 가며 가끔씩 근방에서 의뢰 들어온 목공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버는 족족 모두 아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대저 목공일이라는 게 새로 건설되는 신시가지 같은 데라야 일이 많지 건물이 꽉 들어찬 구도심에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일이 없어 집에서 뒹굴뒹굴 할 때면 아내는 아이를 나에게 맡겨 놓고 점심 때 쯤 밖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디 식당이라도 나가 설거지를 해 주고 푼돈이나마 만들어 오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염치가 없어 아무 것도 물어 보지 못 했지만 아내는 생활력이 무척 강한 여자였습니다.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생활비는 자꾸자꾸 늘어만 가고, 그러다 보니 나도 일거리를 찾아 조금씩조금씩 도심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뿔싸 그게 잘못이었던가요? 한번은 한강 너머 노량진 근처의 어느 집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갈 무렵 같이 일을 하던 미장이 김 씨가 다가와 “영등포 너머 광명이라는 곳에서 주택단지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데 혹시 들어 보셨나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가면 일거리가 많을 테니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김 씨와 나는 광명 행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잠시 아내와 아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돈을 많이 벌어다 주면 좋아 하겠지?’ 하는 마음을 가지니 한결 마음이 편했습니다. ‘집에 연락 하는 건 그곳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해도 늦지는 않을 거야.’ 김 씨 말대로 그곳에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있었지요. 일거리는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일을 했지요. 약 한 달 후 꽤 많은 돈의 품삯을 받아 쥐었을 때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옆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를 바꿔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지요.


   아내에게 그동안 전화를 걸 수 없을 정도로 바빴었노라고 말하고, 품삯을 받았으니 우편환으로 돈을 부쳐 주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슬며시 “집에 아무 일도 없지?” 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일은 무슨 일이요? 아무 일도 없어요.”라고 대꾸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는 1년 남짓 있었습니다. 집에는 몇 차례 더 돈을 부쳐 주었구요. 그러나 전화하는 것은 옆집에 신세 지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여 자꾸자꾸 미루게 되었습니다.


   광명에서의 일이 끝나자 새로 짓는 주택단지는 역곡으로 이어졌지요. 거기 주택단지는 광명보다 훨씬 컸습니다. 거기서도 바쁘게 일을 했지요. 그런데 돈 부쳐 주는 것은 점차 뜸해졌어요. 품삯 나오는 것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이지만, 그동안 내가 먹고, 자기 위하여 외상으로 쓴 돈을 갚고 나면 부쳐줄 돈이 없는 달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럴 때마다 ‘이번 달에는 아껴 써서 집에 돈을 좀 부쳐 주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그 생각 금세 잊혀지기 십상이었구요.


   더욱이 역곡에서는 일꾼들에게 밥을 해 주는 함바집 아주머니가 친동생 같다며 여간 살갑게 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그 아주머니가 싫지는 않아 저녁만 되면 함바집에 가서 깡소주를 기울이곤 했지요. 아주머니는 깡소주는 몸에 해롭다며 김치 쪼가리라도 내 놓았습니다. 물론 집에 있는 아내 생각도 났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누님 같은 분인데 뭘 어때…’


   역곡에서의 일이 끝날 때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지요. 별 거 아닌 일이지만 함바집 아주머니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평소 아주머니를 속으로 좋아하던 홀아비 한 씨가 있었는데 평소 내가 그 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술김에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결국 주먹까지 쓰게 되더라구요.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주위 사람들 진술도 있고 해서 무사히 풀려 나오긴 했지만 기분이 무척 꿀꿀했습니다. 마침 역곡에서의 일이 끝나니까 부천 읍내에도 일이 생기더라구요. 또 그곳으로 갔지요. 그렇게 나의 방랑벽은 도지고 말았습니다. 수도권에서의 일이 끝나자 연줄 연줄로 해서 지방으로 진출하게 되었구요. 글쎄 서울에서건 지방에서건 목공일로 사는 것은 모두 똑같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돈을 부쳐 주는 것이 진짜 몇 달에 한 번씩인데 그동안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사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일감을 찾아 떠도는 사이 점점 집의 일은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언제부턴가 옆집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집 주소 적어 놓은 수첩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수첩을 잃어버리니 마음은 한결 편했습니다. 집과 가족에 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구요. 그런데 일거리는 점점 줄어만 갔습니다. 사실 일감은 적지 않게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찾아가는 족족 퇴짜를 맞는 날이 많아져 갔습니다. 가진 돈이 떨어져 갈 무렵 경상도 합천에 있는 가야산 해인사에 큰 공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려갔지요.


   주지 스님은 내 행색을 보더니 “안 되겠는 걸.” 하셨습니다. 나는 주지 스님에게 내 사정을 말했지요. “제가 행색은 이래도 평생을 목공일로 살아온 사람인데, 무슨 일이라도 시켜만 주시면 삯은 받지 않아도 좋으니 먹을 것과 잠잘 곳만이라도 챙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주지 스님은 “그 체구에 일은 무슨…” 하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리고는 요사채의 구석진 방을 가리키면서 일단 그곳에 짐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 방에 들어서니 방금 물걸레로 닦은 것처럼 말끔하게 치워진 모습에 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요사채가 대부분 그렇듯 아무 가구도 없는 빈 방이었지만 한쪽 구석에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었지요. 거기에 공구 가방을 던져 놓고 바닥에 큰 대大 자로 누웠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듯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먼 길 걸어오느라 힘들었던 참에 눈이 저절로 감겼지요. 인기척에 눈을 뜨니 스님 한 분이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따라 식당에 가서 저녁 공양을 들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마음 편하게 먹어 보는 식사였습니다.


   식사 후 절 구경을 한바탕 한 후 방에 들어와 쉬고 있었더니 아까 왔던 스님이 이불과 베게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소승을 불러 주시지요.” 하며 나가려 했습니다. 나는 급하게 “잠깐만요, 스님. 누구를 찾으면 되겠습니까?” “소승은 청담이라고 합니다.” “스님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조금 있다가 시간을 내어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갔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다시 온 청담스님은 “이 방이 참 신기한 방입니다. 며칠 묵겠다고 오신 처사님들이 모두 제 날짜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시더군요.” 청담스님은 꽤나 도력이 높은 스님 같았습니다. 나는 이차저차 해서 해인사를 찾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길을 쭉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먼저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입니다. 스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중간 중간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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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가 끝나자 청담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요. 밖에서는 짝을 찾는 부엉이 소리가 부엉부엉 들리고 있었습니다.



2. 산사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산 타는 것을 좋아 했다. 동네 뒷산을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 앞마당처럼 드나들었다.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던져 놓자마자 산으로 내뺐다. 산에는 놀만한 구석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친구들과 편을 짜서 나무로 만든 칼로 칼싸움을 하기도 하고, 입으로 “탕, 탕” 총소리를 내며 진지 빼앗기 놀이도 했다. 놀다가 도마뱀을 발견하면 쫓아가서 손으로 덮치는데 도마뱀 요 녀석 꼬리를 자르고 달아난다는 것 학교에서보다 산에서 먼저 배웠다. 땅강아지는 쪼르르 기어서 도망가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땅강아지는 잡았다가도 불쌍해서 놓아 주었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산딸기를 찾아 먹기도 하고, 벚나무에 열린 뻐찌를 따서 입 주위가 까맣게 되는 것도 모른 채 킬킬거리며 입에 넣었다. 오톨도톨 솟아난 옻나무 잎사귀에 몸이 닿으면 피부가 오톨도톨 돋아난다고 하여 옻나무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것만 빼면 산은 완전히 내 세상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나는 삼촌을 따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북한산에 갔다. 동네 뒷산을 휘몰던 실력으로 처음에는 ‘요까지 것!’ 달음박질 하듯이 뛰어갔다. 삼촌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래, 한 번 니 맘대로 가 봐라!” 느긋하게 뒤따라오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산은 우리 집 뒷산과 많이 달랐다. 얼마 못 가 숨이 차기 시작했고, 또 얼마 못 가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었다. 곧바로 따라오신 삼촌은 “이 녀석, 산을 그렇게 얕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물을 건네 주셨다. 물 한 모금 마신 후에는 삼촌 뒤만 쪼르르 따라갔다. 헉헉대며, 낑낑대며, 죽을 똥 살 똥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올라갔을까 ‘이젠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생각하는 순간 고개 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물을 마시며, 땀을 닦으며 쉬고 있었다. 삼촌도 그늘로 가서 앉으며, “여기가 그 유명한 깔딱고개란다. 모두들 숨을 깔딱깔딱거리며 올라오는 곳이라는 뜻이지!” 하셨다.


   거기서 한숨 돌리고 난 후에는 그래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자 거대한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봉우리에는 실 같은 것이 여러 가닥 늘어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실마다 사람들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난 걱정이 되었다. “삼촌, 우리도 저기를 올라가는 거야? 난 죽어도 못 올라갈 것 같은데…” 삼촌은 빙그레 웃으시며 “저 봉우리는 인수봉이라 하는데,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만이 올라갈 수 있단다. 우리는 이 쪽 봉우리를 올라갈 거야.”


   삼촌은 우리가 올라갈 봉우리 이름이 백운대라 하며, 높이는 인수봉보다 더 높다고 하셨다. 평평한 곳을 찾아 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고, 백운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백운대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거대한 돌덩이마다에는 쇠봉들이 꽂혀 있었고, 쇠봉과 쇠봉 사이는 로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로프를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려놓자 드디어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에는 하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북한산을 다녀온 뒤에는 자주 삼촌을 따라 산에 올랐다.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등 서울 근처의 산은 모두 섭렵했다. 이제 바위 타는 일만 남겨 놓았다. 드디어 대학교 여름방학 때에는 등산학교를 다니며 암벽 타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대저 암벽이란 것이 도자기 표면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곳곳에 갈라진 틈이 있고, 홈이 나 있고, 오톨도톨한 부분이 있다. 손과 발을 이용하여 이런 부분을 쥐고, 디디며 자기 몸을 조금씩 조금씩 올려놓는 것이 암벽 타기이다.


   암벽을 오를 때에는 무척 힘들지만 정상에 섰을 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느끼는 희열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건너편 산 중턱을 감싸고 있는 구름은 마치 털 많은 삼각 모자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고 힘들게 올라간 곳을 내려올 때에는 로프에 매달려 한 번에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온다. 한편으로는 편하다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섭섭한 구석이 있었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의 인생사를 이미 그 때 깨달은 셈이다.


   군대에 다녀와서 구한 직장도 등산과 관련된 잡지사였다. 그래서 산에 다니는 것이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어느 날 회사에서 산을 잘 타는 여성 클라이머가 있으니 취재해 오라고 했다. 그 사람의 첫인상은 얼굴이 조그맣고, 아주 미인형으로 생겼다. 인사말로
“아주 미인이신데요?” 하였더니 그 사람은 “산 타는 사람은 모두 미남, 미녀랍니다.” 화답을 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등산학교 후배였다. 그 사람도 나만큼 산 타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해 그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우리는 열을 올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주 함께 북한산에 오를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 사람은 나 못지않게 산을 잘 탔고, 암벽 등반도 잘 했다. 원래 암벽타기에서 선등先登은 어려운 법인데 선등도 웬만한 남자 클라이머 못지않게 잘 했다. 그 사람과 함께 등반을 하면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호흡이 짝짝 맞았다. 그 사람은 천성이 산꾼이었으며, 등반 자체를 무척 즐기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동반 산행 끝에 나는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을 했다. 순간 매운 칼바람이 내 목소리를 흩트려 놓았다.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못 들은 게 아닐까 걱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산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덤덤하게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우리 부부는 산에 올랐다. 전국에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였다. 아들을 낳은 후 아이 때문에 1년 정도는 혼자서 산에 올랐다. 왠지 허전하기도 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 돌잔치를 하고 나서부터 우리 부부는 아이를 들쳐 없고 산을 올랐다. 아내는 다시 산에 오르니 정말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지리산 종주산행도 수차례 하였다. 산에서 지나치는 사람마다 미쳤다고도 했고, 힘을 내라고도 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일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산에 올랐다. 6개월여에 걸쳐 1,240km에 달하는 백두대간 종주산행도 무사히 마쳤다. 등산 관계자들 사이에 우리 부부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더 이상 갈만한 국내의 산이 없어지자 우리 부부는 용기를 내어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봉 도전이었다. 회사에서도 전폭적으로 밀어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안나푸르나봉 도전을 위해 맹훈련에 들어갔다. 한겨울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 타기를 수도 없이 했다. 까마득한 빙벽 위에 히말라야가 보였다. 그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흘리는 땀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았다.


   강촌에 있는 구곡폭포 빙벽도 힘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까마득하게 보였던 빙벽 타기도 이젠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했고, 히말아야 고봉을 여러 차례 오른 엄홍길 대장도 만나 조언을 들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힘을 내라고 했다. 부부가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한다고 하니 언론사에서도 취재를 해 갔다. 여러 곳에서 분에 넘친 지원도 많이 받았다. 경비 문제는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주위에서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회사에서는 6개월 유급휴가 처리를 해 준다고 했다.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겨 놓은 채 우리는 히말라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몸은 벌써 안나푸르나봉 정상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이 바로 코앞인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왔다. 몸을 바싹 낮추어 바람을 피하려 했지만 나의 몸은 벌써 하늘을 나르고 있었다. “안 돼!” 나의 외마디 소리에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8,091m 높이의 안나푸르나봉 정상을 위한 행군은 길고 힘들었다. 고산병을 이겨내기 위하여 오르고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한 후 드디어 4,3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베이스캠프 뒤편 언덕의 돌탑에 걸려 있는 오색의 룽다(불교 깃발)가 새벽안개에 축축이 젖은 바람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서서히 해가 솟아오르자 7,219m인 안나푸르나 남봉과 6,997m인 마차푸차레봉 그리고 6,441m인 히운출리봉들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 거대한 봉우리들을 보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 잡았다.


   제 1캠프, 제 2캠프, 제 3캠프 지나는 동안 대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정상 정복조로는 우리 부부가 선정되었다. 나와 아내는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마치 정상 정복에 성공한 것처럼. 도전은 새벽 세 시부터 시작되었다. 멀리 지평선이 희뿌윰히 보이고, 정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잘 갔다 오라고 축복을 해 주고 있었다. 애당초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지만 아내와 함께 하니 왠지 책임감이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히말라야는 지리산, 설악산이 아니었다. 움직이기 시작하니 몸이 추운 것은 견딜 만 했으나 그 놈의 발끝이 문제였다. 사실 처음 오를 때부터 다른 부위보다 발끝이 더 추위를 탔다. 높이 올라갈수록 날씨가 더 추워져 점점 양말을 겹쳐 신게 되었고, 마지막 정상 공격 시에는 몇 겹의 양말을 겹쳐 신어 발끝 감각이 무척 둔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앞서 나가고 아내가 뒤를 따라왔으나 얼마 후부터 교대로 앞장을 섰다.


   앞장 서 나갈 때에는 무척 조심해야 했다. 특히 밟으면 무너져 내리는 ‘썩은 얼음’지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곳곳에 지옥과 같은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레바스는 빙하가 갈라진 틈을 말한다. 그러나 입구가 눈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 밑에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발, 한 발 피켈로 찍어 크레바스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을 내디뎌야 한다.


   능선 너머 동쪽 지평선에 아침 해가 뜨니 모든 것들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앞이 잘 보이니 등반하기 훨씬 쉬웠다. 크레바스도 훨씬 덜 괴롭혔다. 어두울 때에는 다른 곳과 분간이 힘들었으나, 해가 뜨고 표면의 눈이 살짝 녹으니 크레바스가 있는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살짝 꺼져 있었다. 그런 부분을 피켈로 찍어 보면 여지없이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점심때가 될 무렵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히말라야에서는 늘 있는 일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짙은 안개 속에서는 더욱 긴장하게 된다. 곳곳의 크레바스가 함정처럼 항상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교대하여 내가 앞장을 서게 되었다. 이놈의 안개는 왜 이리 짙어져만 가는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으나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피켈을 쿡쿡 찔러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내가 그 ‘썩은 얼음’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확인하고 건너온 길인데, 왜 크레바스가 거기 있었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나의 몸도 뒤로 끌려갔다. 아내와 나의 몸을 묶고 있던 자일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온몸에 있는 힘을 다하여 얼음 속에 피켈을 찍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피켈은 얼음 깊숙이 박혀 있었고, 나는 피켈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 살았구나!’ 문득 아내 생각이 났다. ‘아내는?’ 그러나 아내는 보이지 않았고, 주위는 온통 하얀 어둠뿐이었다.


   “여보∼∼∼ 여보∼∼ 여보∼” 나는 미친 듯이 아내를 불러댔다. 잠시 후 정신을 다잡고 보니 나의 허리를 감고 있던 자일을 통하여 아내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는 저 보이지 않는 암흑의 구렁텅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다급하게 아내를 불러댔다. “여보∼∼∼ 여보∼ 여보∼” 그러나 지옥으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 여보∼∼ 여보∼” 나는 계속해서 아내를 불렀다. 한참만에야 희미한 소리를 들려왔다. “여∼∼ 보∼” 내가 그렇게도 들으려 했던 아내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여보∼ 살아있구나∼∼ 조금만 힘을 내!”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여보∼ 지금 상태가 어때?” 한참 후에 들릴 듯 말 듯 “조금 아∼파… 머리에 피가∼ 피가 나는 것 같아…” 크레바스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위에 심하게 부딪친 모양이었다. “여보∼ 조금만 견뎌 봐!” 소리친 후 나는 대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에게도 문제가 발생해 있었다. 조금 전에 크레바스로 끌려가는 도중 볼록 튀어나온 얼음 모서리에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가슴으로부터 통증이 느껴졌다. 이럴 때를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가슴이 아픈 나는 금방이라도 크레바스로 끌려갈까 봐 피켈에서 손을 떼지도 못 하고, 머리를 다친 아내는 배낭 속 등강기登降器(올라갈 때 이용하는 등반 장비)를 이용하여 혼자서 크레바스를 탈출할 수도 없고… 나는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성모님…’ 모두 불러 보았다.


   “여보,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계속 외쳐 댔지만 나의 목소리는 점점 힘이 빠졌다. 나는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피켈을 쥐고 있던 나의 손에서도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울고 싶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갑자기 내 몸이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내가 스스로 자일을 끊은 것이다. 자일을 통해 느껴지던 아내의 몸이 내게서 빠져 나간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크레바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 곳은 까만 암흑밖에 없었다. 아내를 따라 크레바스 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지옥과도 같은 암흑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마침내 정신마저 잃을 정도였다. 한참동안 거기 머무르다가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늘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제3캠프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동료는 금방 눈치를 채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치고 철수 허락을 받았다. 베이스캠프에서 간단하게 아내에 대한 위령제를 지낸 후 쓸쓸히 귀국을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나는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회사 동료들이 찾아와 위로를 해 주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6살밖에 되지 않는 아들은 왜 엄마랑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엄마는 언제 오느냐고 계속 칭얼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회사에 나가게 되었지만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항상 아내의 잔영이 머물러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이제 그만 가 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대로 보내 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산에 대한 나의 멘토인 것 같았다.


   얼마 후 나는 혼자서 북한산 인수봉에 올랐다. 아내와 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던 곳,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을 하던 곳. 그곳에 오르니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인수봉 정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누워 있었다. 문득 구름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보∼’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아내는 그만 내려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후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아들은 이제 할머니와 노는 데 적응이 되었는지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나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아내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고 있었다.


   몇 년 후 나는 다시 히말라야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히말라야 정상 정복을 위한 거창한 차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주위에는 일행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히말라야 웅장한 봉우리가 다시 보고 싶었고, 아내가 묻혀 있는 그곳 가까이 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조그만 시골 역사驛舍마냥 파리 떼가 날리는 한적한 공항에 내려 털털거리는 버스를 갈아타며 아내와 함께 등반했던 안나푸르나봉을 향해 갔다. 트레킹 복장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도달하자 아내와 같이 오르던 봉우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어딘가에 아내가 꽁꽁 언 채로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 하얀 봉우리를 향해 절을 하고, 술을 뿌리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산악 지역의 짧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온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그래서 가진 돈이 떨어질 때까지 히말라야 산록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 속, 무거운 얼음 밑 그 어디엔가 묻혀 있는 아내와 좀 더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중 어느 마을에서 몇 년 전 이 마을에 왔다가 1년을 잠깐 넘긴 후 고향으로 돌아간 푸른 눈을 가진 백발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눈물이 핑글 돌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3. 청담스님


   서울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의 소개로 몇몇 여자를 만나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평소 하지 않던 짓을 왜 그렇게 하니?”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허전한 생각이 들 때면 미친 듯이 산을 찾았다. 동료의 몫을 대신하여 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얼굴, 그것은 나에게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내는 아직까지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내가 아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기력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일요일 아침. 평소 같으면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산악회 동료들이랑 어디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겠지만 이 날은 아무 약속이 없어 느지막이 일어났다. 뒷산 약수터에나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야트막한 산이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기지개를 펴는 사람, “얏호!” 소리를 질러가며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돗자리를 펴놓고 아이들과 함께 오순도순 김밥을 먹는 사람, 모두 제각각의 모습으로 산을 즐기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조금 더 가니 조그만 절이 나왔다. 요사채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게시판에는 법회를 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일상발원문’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거룩하신 부처님,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빛으로,
   우리들 마음의 무명을 밝혀주소서.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지은 허물,
   부처님 앞에 참회 드리오니
   ……
   시방에 항상 하시는 부처님,
   이 발원을 증명하고, 인도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무언가 실오라기라도 잡은 듯하였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도하실 분은 오로지 석가모니뿐인 것 같았다. 마침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출가 결심을 말씀드리고 아들 부탁을 하자 어머니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중이 되기 위하여 행자 등록을 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 스님이 출가 사유를 물을 때에는 진땀이 다 났다. 나 스스로 내가 왜 출가를 해야 하는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아내 이야기를 말씀드리며 그냥 괴롭다고 했다. 주지 스님은 진정 세속관계를 끊을 수 있는지 물어 오셨다. 어머니와 아들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눈물만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사 스님이 정해지고, 삭발식은 토종닭이 홰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새벽에 거행되었다. 은사 스님께서
   “삼보에 지심귀명례 합니까?”
   “업구 탕제키 위해 참회정진 하겠습니까?”
   “해탈 증득키 위해 수행정진 하겠습니까?”라고 물어올 때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나는 힘없이 “네” 하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잘리기 직전 머리에 물이 뿌려질 때에는 히말라야 꼭대기보다 더 서늘한 바람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드디어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나가자, 나의 정신이 드디어 푸른 하늘과 만나는 것 같았다.


   복잡한 절차의 수계식이 끝나고 6개월에 걸친 행자교육이 시작되었다. 행자교육 기간 중에는 아내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시간이 후루룩 지나가 버렸다. 사미계를 받자마자 해인사 승가대학으로 가서 4년 동안 불교의 역사와 여러 경전들을 배웠다. 마지막으로는 종단이 마련한 수계산림에서 5박6일 동안의 교육을 받았다. 예불, 참회정진, 강의 등으로 짜여진 빡빡한 하루 일정과 오후에는 불식不食이 행해졌다. 마지막으로 촛물을 먹인 삼베 실에 불을 붙여 팔목에 올려놓고 진언을 외우며 비구 250계를 지킬 것을 서원하는 연비 의식을 거침으로써 명실상부한 비구승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청담’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다.


   비구승이 된 후 나는 한동안 깊은 산 속 작은 암자에 쳐 박혀 있었다. 아지랑이 흔들리는 봄날 멀리서 꾀꼴꾀꼴 꾀꼬리 소리가 들려오면 마치 아내의 소리인 양 반가움에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여름이면 연꽃잎을 후드득 때리며 지나가는 소나기 소리에 이불 하나 덮지 못하고 잠들어 있을 아내를 생각하곤 미안함이 용솟음 쳤다. 가을이면 낙엽 쌓이는 암자 뒤 나무 등걸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오물조물 도토리 베어 먹는 다람쥐 모습이 나의 모습처럼 애처로웠다. 겨울이면 지난밤 소리 없이 내린 눈길에 잠깐 나의 흔적 남겨 놓고, 이내 싸리비로 쓸어내면서 ‘이렇게 나의 흔적이 없어지는구나!’ 생각하니 더욱 서글퍼졌다.

동안거, 하안거를 몇 번 거치고 몇몇의 산사를 전전하는 동안 나의 화두는 늘 ‘그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그 때 아내는 왜 자일을 풀고 크레바스 속으로 몸을 던졌을까?’ 이런 생각들이었다. 가끔씩 아내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내가 기운을 차려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구조대가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루하루 날이 거듭 되어도 별무성과이자 나 스스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무르고 있던 절의 방장 스님이 나를 불렀다. 그 절에 몸을 의탁한 지 여러 달이 지났건만 평소 방장 스님 앞에 한 번도 머리 조아린 적 없고 더욱이 스님의 말씀은 대중들 어깨 뒤로 들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무척 의아했다. 방장 스님은 부드럽게 말을 건네 오셨다. “용맹정진은 잘 되어 가고 있느냐?” 나는 처음에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스님의 대갈일성이 귀를 후벼 팠다. “이 놈 아직도 못 깨우쳤느냐? 네가 산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지났거늘 아직까지 너의 아내가 누구를 위하여 몸을 던졌는지, 무엇을 위하여 몸을 던졌는지 진정 모르겠느냐?” 나는 무척 당황했다. 방장 스님이 어찌 나의 일을, 내 아내의 일을 알고 계시는지 무척 궁금했다.


   방장 스님은 그제야 말투를 고치며 “청담아,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 하셨다. 그제야 얼굴을 들어 방장 스님을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처음 출가하려 할 때 내게 왔었느니라.” 그제야 그 스님이 기억에 떠올랐다. 내가 처음 출가를 결심했을 때 찾아갔던 절의 주지 스님이셨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여기서 나의 비밀, 나의 죄책감, 나의 괴로움 이런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분을 만나다니 마치 부처님을 뵌 듯하였다.


   나는 방장 스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고해 바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나의 아내가 내 마음 속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청담아,‘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을 아느냐?” “ … ” “네 아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신’을 했는지, 누구를 위하여 ‘살신’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아내는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그동안 나의 옹졸함 때문에 아내를 원망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었던가? 스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어차피 불가에 들어선 이상 네 아내가 너를 위하여 살신을 했듯이 이젠 네가 세상을 위하여 성인을 해 보아라.” 하셨다.


   방장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비로소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절일이라는 게 허드렛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그런 일들은 행자승이나 경력이 짧은 사미승들이 주로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나서서 했다. 그리고 큰절보다는 작은 절을 전전했다. 아무래도 작은 절에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곳 해인사에는 두 달 전에 왔는데 큰 불사佛事가 있다고 해서 도울 일이 없을까 온 것이다. 아직 불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지금은 요사채의 일을 보살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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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좀 평안하다오.” 스님은 이렇게 말하며 연신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다.




4. 푸른 눈의 할머니


   히말라야 빙하의 얼음이 물이 되어 흘러내려오는 곳, 푸른 눈의 할머니가 물에 떠내려 오는 한 젊은이의 시신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약간 창백해 보였지만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 평화롭게 보였다. 사람들은 아들이냐 손자냐며 물었지만 할머니는 대답을 않고 하염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40년 동안 기다렸는데… 40년 만에 돌아오셨군요. 내 사랑…”


   그 젊은이는 그 할머니의 약혼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면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아 약혼 기간 중에 히말라야 등반을 하고 있었다. 등반 중에 두 사람은 대형 눈사태를 맞아 눈과 함께 굴러 떨어졌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약혼녀는 절벽 위에 멈췄지만 젊은이는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젊은이는 떨어질 때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약혼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올리려 하였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젊은이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젊은이는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스스로 자일을 풀어 절벽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할머니는 자기를 위해 만년설의 절벽 밑으로 떨어진 약혼자를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사고를 당한 후 약혼녀는 고향인 영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다들 “얼마나 힘들었니? 살아 돌아와 다행이다.”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 밑에는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건만 고집을 피우고 가더니 기어이 일을 벌이고 말았구나.’라고 빈정대는 것 같아 도저히 방 밖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여를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엄마가 넣어주는 빵과 우유만 조금씩 손을 댈 뿐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사고가 나기 전에 다녔던 시립 글래스고 도서관에 나가 복직이 가능한지 물어 보았다. 사실은 히말라야로 떠나기 전 결혼을 전제로 이미 사직을 했었기 때문에 만약 다니게 된다면 복직이 아니라 재취직이 되는 셈이었다. 동료들은 다시 만난 것을 반가워했지만 같이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대학교 은사님으로부터 하일랜드주의 주도인 인버네스시의 시립 도서관 사서 자리를 소개받았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그녀는 훌훌 짐을 싸서 글래스고로부터 북쪽으로 180km 떨어진 그 도시로 떠났다. 아무 연고가 없는 도시에 젊은 여자 혼자서 생활하기란 여간 녹록치 않았다. 도서관 직장 동료 소개로 작은 방을 하나 얻고, 꼭 필요한 가재도구만 장만했다. 그 곳 생활에 적응하느라 여름 한 철을 정신없이 보냈다.


   인버네스는 은행나무가 아주 장관인 도시였다. 가을이면 마을길이 모두 황금빛 은행나무 잎으로 뒤덮였다. 어느 날씨 좋은 날 그 길을 혼자 거니노라니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린 약혼한 사이이니 뭐라 하지 마세요.”라 뻐기며 팔짱을 끼고 글래스고 시내를 활보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그로부터 받았던 연서戀書들을 꺼내어 처음부터 하나씩 읽어 보았다. 처음 그를 만나던 날부터 하나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가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순간,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던지… 그는 전공하는 학과는 달랐지만 그녀와 같은 글래스고 대학교 1년 선배였다. 그는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내 등산 서클 멤버이기도 했다. 학기 초 그는 신입생들에게 등산 서클 가입을 권유하러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 두말없이 입회 원서에 사인하겠노라 했다. 그리곤 “오빠 때문에 가입하는 거예요.”라고 초를 쳐 놓았다.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실 그녀는 그때까지 등산화도 갖추지 못했고, 산이라곤 마을 뒷산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그의 권유에 의하여 등산 서클에 가입했다는 것을 주장하며 그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라 했다. 등산화와 등산복을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핑계거리만 있으면 그를 불러냈다. 그는 그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주었다. 매주 서클에서 가는 등반에도 그가 가는 날이면 그녀는 모든 일을 재껴 놓고 따라갔다. 그가 빠지면 어김없이 그녀도 빠졌다. 그녀에게 등산은 그를 만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서클 동료들도 그와 그녀와의 관계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한 말들이 어느새 “사실인가 봐!”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물론 싫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 자신이 의도했던 일이기 때문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 주위의 참새들 짹짹거리는 소리에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진도가 나가는 듯 마는 듯 시간은 흘러가고,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등산 서클에서는 매년 여름방학 중 영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하일랜드의 벤네비스산을 등정하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벤네비스산은 높이가 1,344m밖에 되지 않지만, 산허리의 움푹 패어 웅덩이가 된 부분에는 만년설이 남아 있고, 주위에 아름다운 호수가 많아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특히 산의 북동쪽에는 높이가 약 400m에 달하는 절벽이 있어서 암벽등반의 연습장으로 이용된다. 서클 멤버들은, 특히 초보자들은 거기서 훈련을 충분히 받은 후 암벽등반을 통해 Carn mor Dearg의 정상을 가로 지르는 코스로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암벽등반의 왕초보였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당연히 그녀는 그를 찾았다. 그도 세심하게 그녀를 가르쳐 주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스칠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가끔씩 움찔움찔 거렸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끝에 드디어 암벽등반을 시작하였다. 그녀를 비롯한 초보자들은 위아래에서 선배들이 돌보아 주는 가운데 겨우겨우 올라갔다.


   마침내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그녀는 산에 오르느라 힘이 다 빠져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지만 옆에 있는 그에게는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힘든 거 다 알아! 힘이 남아 있는 척 할 필요 없어.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업고라도 갈 테니까…”
   그는 정말 백마의 기사였다.


   내려오는 길에 이미 그녀의 다리는 많이 풀려 있었다. 일행으로부터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그가 남아 있어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숲에서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 그녀에게 건네주며 지팡이로 사용하라고 했다. 지팡이를 의지하니 한결 힘이 덜 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럴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지팡이를 헛짚거나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몸 전체 균형을 잃고 넘어져 다리가 골절되기 십상이다. 그것을 아는 그는 그녀에게 가급적 천천히 내려가자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걸음을 재촉했다.


   물이 졸졸 흐르는 조그만 개울이 나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목을 적시고, 땀을 닦고, 얼굴을 씻었다. 그의 얼굴이 백마를 탄 왕자처럼 빛났다. 그는 이제 평탄한 길만 남아 있으니 다 온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녀는 그게 오히려 섭섭했다. 좀 더 아픈 척을 해서 그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자 다시 떠나기 위해 일어섰다. 배낭을 매고, 지팡이를 손에 들고, 한 걸음 옮기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푸른 눈에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하늘이 아주 파랗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몸은 바닥으로 쳐 박혔다. 처음 발을 내디딜 때 물기를 머금은 돌멩이를 밟은 모양이었다. 그가 황급히 다가왔다. “괜찮아요!”라며 손바닥의 흙을 툭툭 털고 일어서는 순간 다리에 통증이 왔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한참 만져 보더니 골절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 상태로 걸으면 더 나빠진다며 등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의 등이 참 따뜻했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그도 힘이 든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져서야 역에 도착했는데 기차는 등산 서클 일행과 함께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녀를 인적 없는 대합실 의자에 앉혀 놓고 그는 분주히 왔다갔다하더니 그녀 앞으로 왔다. 그 역은 간이역이라 그 날은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 일행들은 글래스고 행 기차표 두 장을 역무원에게 맡겨 놓고 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지만 밤이 되자 한기가 느껴졌다. 배낭에서 비상용으로 남겨 두었던 쵸콜렛과 브랜디를 꺼내  마시니 한결 따뜻해졌다. 잠시 후 백발이 성성한 역장님이 두 사람을 불렀다. 역장실로 들어서니 대강 사정을 알겠노라며 대합실보다 나을 테니 그곳에 있으라 했다. 역장님은 자기가 그곳 출신이라 벤네비스산에 수없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그녀의 발을 보더니 “이만하길 다행인 걸. 그래도 업고 왔으니 이 정도지…” 하며 그의 수고를 칭찬해 주었다. 역장님은 뜨거운 물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한참동안 찜질한 다음 이리저리 주물렀다. 어느 틈에 통증이 사라졌다. 역장님은 두 사람을 한참 보더니 농담 비슷하게 물어 오셨다. “두 사람은 사귀는 중인가?” 그녀는 ‘네!’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 참았다. 갑자기 굵은 목소리로 “네!”
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을 보니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후 산을 같이 다니며 둘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만나지 못하는 주일에는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졸업을 하고 글래스고 증권거래소에 취직을 했다. 다음해 그녀도 졸업을 하여 시립 글래스고 도서관에 취직을 했다. 주말이면 둘이서 산에 다녔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첫 번째 여름휴가 때 프랑스로 날아가 몽블랑을 올랐다. 물론 모교 동문으로 이루어진 등산 서클 회원들과 함께였다. 몽블랑은 벤네비스산과는 댈 게 아니었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몽블랑은 환상 자체였다. 다음해 여름에는 스위스 쪽 알프스를 올랐다. 당연히 그녀의 옆에는 그가 있었다.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그녀와 그는 약혼을 했다. 결혼식은 이듬해 5월 3일에 하기로 했다.


   그 해 연말을 얼마 앞두고 그가 그녀에게 이듬해 2월 ∼ 3월 모교 동문들로 이루어진 등산 서클에서 히말라야 등반을 계획하고 있는데, 거기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그녀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항상 그가 나타나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들은 위험하다며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가는 길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그와 함께 히말라야에 갔었던 것이었다.


   인버네스시에서 벤네비스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의 사랑을 처음 확인한 곳, 그곳이 지척에 있다고 하니 바로 달려가고 싶었다. 주말 그녀는 간편한 차림으로 벤네비스산을 찾았다. 발을 절뚝절뚝거리며 내려오던 길. 물먹은 돌멩이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그 개울가. 그의 등에 업혀 꿈을 꾸듯 내려오던 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그런데 그 친절한 역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정년퇴직할 나이가 가까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지만 지금 그녀에겐 모두 그녀를 피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인버네스시로 돌아왔다. 다시 도서관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부모님은 수시로 편지를 보내 ‘어떻게 생활하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마음의 정리는 다 되었는지, 혹시 결혼할 생각은 없는지…’ 등등을 물어 오셨다. 그녀는 아무 걱정 하지 마시라며, 결혼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답장을 썼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지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 그녀는 날을 잡아 벤네비스산을 올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렇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도서관으로 돌아와 지질학 책을 펼쳐 맘모스에 관하여 찾아보았다. ‘맘모스(mammoth)는 옛날 홍적세 중기부터 후기까지 빙하기에 걸쳐 생존한 장비목의 포유류이다. 어금니는 엘레파스라는 능판이 모여 빨래판 모양이고, 굵으며 나선상으로 휘어진다. 한랭지방에 적응하였으며, 얼음 속에서 죽은 매머드가 알래스카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어 맘모스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인류의 구석기시대 사냥 대상이었으며 털복숭이 맘모스가 잘 알려져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죽었던 맘모스가 알래스카의 얼음 속에서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빙하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정상의 만년설이 얼어 빙하를 이루고, 빙하는 아래로 조금씩조금씩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마음이 바빠졌다. 그로부터 그녀는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예쁘게 화장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썼다. ‘저는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여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생각이 있으니 더 이상 결혼 이야기는 하시지 않았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녀는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모으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이 찾아와 그녀의 모습을 보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셨다. 그녀는 저녁 시간을 내어 영어 강사 자격증을 땄다. 50살이 넘어서부터 그녀는 네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60살이 되던 해 봄 그동안 다니던 도서관을 정년퇴직하자 간촐하게 짐을 싸들고 네팔로 갔다.


   그녀는 히말라야 산허리 사람이 살고 있는 끝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오전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자기는 네팔어로 의사소통하는 것도 문제없다고 했다. 영어 강사 자격증도 있다고 했다. 월급은 필요 없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오전 시간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젊은이의 시신이 떠내려 오면 자기에게 꼭 알려달라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마을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해 주었다. 다음 날부터 할머니는 오전에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히말라야 빙하의 얼음이 물이 되어 흘러내려오는 곳에 나가 하염없이 히말라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만 문고판 책을 들고 가서 읽기도 하고, 성경책을 가지고 가서 작은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어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와도 할머니는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음해 봄이 오고, 꽃이 필 무렵 그 할머니는 물에 떠내려 오는 한 젊은이의 시신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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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틈엔가 내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집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나의 아들은 또 어떻게 컸을까? 갑자기 죄책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 왔나?’ ‘누구를 위하여 여기까지 살아 왔던가?’ ‘나는 이 세상에 혼자 태어났던가?’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한평생 나 혼자만을 위하여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예불 소리가 들리자 나는 불현듯 짐을 싸들고 일어섰다. ‘가는 것이다. 나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나의 아내와 나의 아들과 살아 계신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나의 부모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효를 했던가?’ 집으로 가는 도중 나의 마음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집은 그대로 있었다. 다 쓰러져가고는 있었지만 집은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위의 집들은 다시 번듯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우리 집은 꾸어다 놓은 보리짝 마냥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섰더니 방 안에는 아내 혼자 누워 있었다. 아내는 병에 찌들어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미안해…” 아내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제는 다 되었다.”고 했다.




5. 영숙이


   1954년 푸른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어느 봄날 아침,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동 야트막한 산비탈에 있는 행복천사원에서는 대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행복천사원은 근처에 있는 사랑교회의 목사님이 오갈 데 없는 10여 명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가족처럼 보살펴 주는 그야말로 행복한 천사원이었다. 이제 막 떠오르는 고운 햇살이 한쪽 귀퉁이가 깨어져 나간 행복천사원의 나무 간판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 나무 간판 아래에는 이제 막 배달되어 온 우유처럼 깨끗한 이불보에 쌓인 아기가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아기의 발그스레한 볼 옆에는 조그만 종이쪽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정이 나아지면 꼭 데리러 올 터이니 그 때까지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라는 글이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또 자기 성은 이 씨이고, 아기 이름은 영숙이라 지었으면 좋겠다고 쓰여 있었다. 영숙이는 행복천사원에서 큰 탈 없이 무럭무럭 커 나갔다.


   영숙이는 품성이 참 착한 아이였다. 목사님과 목사님의 사모님인 원장 선생님 말씀을 잘 따랐다.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 주기까지 했다. 영숙이가 철이 들 때쯤 되자 원장 선생님은 부모님께서 전해 주랬다며 영숙이에게 언젠가는 부모님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로부터 영숙이는 이를 굳게 믿고 있었다. 다들 어려울 때라 천사원에서는 국민학교까지만 돌보아 주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천사원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목사님과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영숙이는 천사원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평소 영숙이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던 원장 선생님이 천사원 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숙이는 낮에 원장 선생님을 도와 아이들을 보살펴 주었고, 밤에는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또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어서 부모님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드렸다.


   중학교까지 마치자 영숙이는 천사원 문을 나서야 했다. 영숙이는 원장 선생님에게 부모님이 찾아오면 꼭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목사님께서 이곳저곳 알아봐 주셨지만 제대로 된 취직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원장 선생님의 소개로 후암동에 있는 어느 집 식모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집 아저씨는 용산고등학교 선생님이셨고, 아주머니는 집에서 취미삼아 수예를 하고 있었는데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었다. 후암시장에 있는 어느 수예점에 급하게 대량 주문이 오면 그걸 대신 맡아 하는 정도였다. 두 분 모두 착한 분들이셨다. 영숙이를 친딸과 다름없이 대해 주셨다. 아주머니는 시간이 나는 대로 영숙이에게 수예를 가르쳐 주셨다. 마침 그 집에는 영숙이와 같은 나이의 딸이 있었는데 생일이 영숙이보다 몇 달 늦었다. 엄밀히 말하면 영숙이가 언니인 셈이었다. 아주머니는 “같은 또래이니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아이도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가끔 무언가 짜증나는 일만 생기면 분풀이를 영숙이에게 모두 하였다. 그럴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는 친구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 집에서 영숙이는 가족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아, 나에게도 이런 가족이 있다면…’


   언젠가 영숙이는 그 아이에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원장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기다리고 있으면 엄마, 아빠가 꼭 오신다고 했어. 나도 언젠가는 꼭 찾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더니 그 아이는 “너의 엄마, 아빠가 오려고만 했으면 벌써 왔겠다!”라고 쏘아 붙였다. 영숙이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영숙이가 행복천사원에서 보낸 게 15년이고, 또 한 해가 지났는데 여태껏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랬었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엄마, 아빠만 오시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젠 마음을 바꾸어야만 했다. 영숙이는 혼자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영숙이는 식모살이를 하여 받은 돈을 열심히 모았다. 돈을 쓰는 곳이라곤 연말 크리스마스 가까이 되어 목사님과 원장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갈 때 목사님 부부와 행복천사원 아이들에게 줄 양말 한 켤레씩 사는 게 전부였다. 돌아올 때에는 항상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꼭 자기에게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후암동 그 집에서 4년 남짓 보내고 나올 때 영숙이 손에는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이 쥐여 있었다.


   마침 아주머니에게 수예품을 맡기던 수예점 주인이 가게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이게 되어 인사를 하러 왔다. 그 때 아주머니께서 수예점 주인에게 수예점을 영숙이에게 넘기면 어떻겠냐고 한 마디 거들어 준 것이 영숙이가 수예점 주인이 된 경위이다. 그 수예점은 이름이 ‘예쁜수예점’ 이었다. 그동안 아주머니 심부름으로 그 수예점에 여러 차례 갔다왔다 한 적 있는데, 그 때마다 주인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물어 보기는 했지만 스무 살도 안 된 자기가 막상 가게 주인이 된다고 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힘껏 도와주신다고 하여 겨우 용기를 내었다. 가게를 차리는 데 부족한 돈은 아저씨가 빌려 주셨다. 아저씨는
   “네가 성공할 것 같아서 빌려 주는 게다. 돈을 많이 벌어 갚도록 해라!”라고 덕담을 해 주셨다.


   가게를 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수예점 내의 모든 집기와 물품을 인수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지만 새 가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댔다. 가게를 예쁘게 꾸미는 데 필요한 비품들은 아주머니네 집에서 가져다 썼다. 아주머니는 자기 가게인 양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 주셨다. 아주머니는 “네가 그동안 우리 집 살림을 잘 도와주어서 나도 너를 도와주는 게다. 앞으로 손이 부족하면 예전 주인처럼 나를 불러라.”라고 하셨다. 대학생이 된 아주머니 딸도 가끔 들러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 보아라!” 참견을 했다. 영숙이는 그 참견이 하나도 고깝게 생각되지 않았다. 친형제의 사랑을 느끼는 듯 했다. 가게 이름을 바꾸고 간판을 바꾸어 달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기존 간판에 ‘영숙이네’ 라는 글자만 예쁘게 오려 붙였다. 이것도 그 아이의 생각이었다.


   드디어 ‘영숙이네 예쁜수예점’이 개업하는 날이다. 사실 영숙이는 개업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시장 안에 있는 떡집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 시루떡을 쪄 왔다. 구로동 행복천사원에서 목사님 부부도 도착하셨다. 아저씨는 무엇인가 잔뜩 들고 오셨다. 마른 명태에 실타래를 돌돌 감으시더니 출입문 위에 걸어 놓으셨다. 그리고는 시루떡 앞에 돗자리를 깔고 막걸리를 한 잔 부어 놓더니 영숙이 보고 절을 두 번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하얀 종이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유세차 모년 모일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마지막으로 “… 하나이다.”라고 하시며 다시 절을 두 번 더 하라고 하셨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영숙이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절이 끝나자 아저씨는 막걸리를 가게 이곳저곳에 뿌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잠시 전에 읽었던 흰 종이를 동그랗게 말아 손바닥에 올려놓으시더니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종이는 위에서 아래로 타들어가고, ‘손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불이 붙은 종이가 위로 솟아올랐다. 그걸 보더니 아저씨는 “장사가 아주 잘 되겠다!”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시루떡을 썰어 접시에 담으면서 시장 안에 있는 가게에 하나씩 돌리고 오라고 했다. 돌리면서 ‘영숙이네 예쁜수예점’이라는 가게 이름을 꼭 알려 주라고 하셨다.


   영숙이가 시루떡을 돌리고 오자 아저씨와 아주머니, 목사님 부부, 옆 가게 주인아저씨 등 개업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떡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저씨는 영숙이를 보더니 “오늘 수고 많았다. 이게 모두 가게의 번창을 비는 행사란다.”
하셨다. 목사님은 영숙이가 워낙 착하고 성실해서 꼭 성공할 것이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앞으로 누가 뭐라 그러면 ‘내가 니 엄마다’라고 해라.” 하셨다. 목사님은 하얀 봉투를 내밀면서 “화분을 살까 하다가 돈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냥 넣어 왔다. 꼭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해라.”하셨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분들이셨다.


   그날부터 영숙이에게는 가게가 그녀의 일터요, 쉼터요 모든 것이었다. 잠은 가게에 붙어 있는 두 평짜리 쪽방에서 잤다. 방에 선반을 많이 만들어 웬만한 짐은 모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것도 아저씨가 손수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주신 것이다. 아저씨는 퇴근길에 학교 동료 선생님들을 데리고 와서 강권하다시피 조그만 수예품이라도 하나씩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딸과 같은 아이가 하는 가게니 자주 팔아 주게.”라고 말씀해 주셨다. 진짜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마웠다.


   아주머니는 시장 나올 때마다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조언을 많이 해 주셨다. “손님이 들어서면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잠시 멈추고 무조건 일어나서 웃는 낯으로 인사를 공손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있으니 가급적 외상은 주지 말아라. 이웃 가게와도 친하게 지내 놓아라. 그래야 무슨 일이 생겨도 자기 일처럼 도와준단다.”라고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아주머니 딸도 가끔씩 들러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주고받았다. 그 아이는 벌써 사장이 된 영숙이가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 더욱 고마웠다. 그렇게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자 영숙이는 시장 안에 있는 이웃 가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화병 받침 같은 간단한 수예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만큼 모이자 그것을 들고 이웃 가게를 찾아가 다시 인사를 드렸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정성이 담긴 선물이면 상대방은 감격을 하기 마련이다. 다들 영숙이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특히 시장 입구에 있는 중고 가구 판매점 주인은 나이가 60 가까이 되는 할아버지인데 영숙이에게 “시간 날 때 다시 한 번 들러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네 가게는 헌 가구를 싸게 사서 깨끗하게 손질을 하여 새 제품처럼 만든 다음 판다고 했다. 과연 할아버지네 가게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새 제품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영숙이네 가게에서 식탁보를 예쁘게 만들어 주면 식탁을 팔 때 그것도 함께 팔아 보겠다고 했다. 영숙이는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양이 많지 않으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가끔 할아버지가 불러 그 가게에 가면 할아버지가 싸온 점심 식사를 같이 먹자고 권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남영동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다 큰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아들이 목공 일을 하고 있어 자주 집을 비운다고 했다. 그래서 좀 외롭다고 했고 영숙이가 꼭 친딸처럼 생각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영숙이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 오셨다. 영숙이는 밝히기 싫은 이야기였지만 벌써 할아버지를 믿는 마음이 생겨 모두 이야기해 버렸다. 할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었구나. 참 어려웠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대견하다.” 등의 말씀을 혼자 하셨다.


   주위의 평판도 좋고 하여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었다. 주문 온 물량이 많을 때면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드렸다. 명절 때에는 그 집에서 오라 하여 식사도 같이 하였다. 다음 명절부터는 영숙이가 미리 가서 아주머니 음식 차리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 집에서도 영숙이를 가족처럼 생각하였다. 4년 정도 지나자 아저씨로부터 빌린 돈도 다 갚게 되었다. 아저씨는 “이제 영숙이 돈 모을 일만 남았네∼”라며 함께 기뻐해 주셨다. 그날 밤 영숙이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부모님 생각을 했다. ‘아, 엄마, 아빠와 연락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젠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버니 같이 살 수도 있을 텐데…’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가게에는 연탄난로를 놓았지만 밤만 되면 공기구멍을 꼭 막아 놓았다. 연탄을 조금이라도 오래 쓰기 위해서였다. 쪽방은 난방이 되지 않아 바닥이 냉골이었다. 문을 열어 가게로부터 훈훈한 공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는 아무리 이불을 두껍게 깔아도 차가운 기운에 뼈까지 시릴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값이 싼 전기장판을 구입했다. 잠자기 10분쯤 전에 코드를 꽂아 놓고 이불을 덮어 놓으면 따뜻하게 잠들 수 있다. 전기 값을 아끼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더 큰 돈이 들 거라고 자위했다.


   어느 날 낮에 라디오의 음악 방송을 들으며 할아버지께 드릴 목도리를 짜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아도 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난로 위에 있는 주전자에서는 물이 팔팔 끓고 있어 커피나 한 잔 타 마시려고 일어서는 순간 쪽방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후다닥 뛰어가 문을 활짝 열어 재끼자 매캐한 연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이미 방 안에는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전기장판의 코드를 빼놓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웃 가게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불을 껐지만 한 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다른 가게로 번지는 것을 막는 선에서 불길을 잡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잿더미만 남았다. 영숙이는 망연자실했다. ‘이제 어떻게 다시 시작하지?’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딸까지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다시 시작하면 되지…” 영숙이는 며칠 쉬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던 차에 중고 가구 가게 할아버지가 영숙이를 불렀다.

할아버지 가게에는 할머니도 와 계셨다. 할머니도 참 순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다. “영숙아, 그동안 너를 주의 깊게 봐 왔다. 너도 혼기가 차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내 아들과 결혼을 하면 어떻겠니?” 그러면서 할아버지 아들 사진을 보여 주셨다. 옆에서 할머니도 거들었다. “색시 얘기는 많이 들었수. 듣던 바대로 참 참해 보이는구려. 우리 아들놈이 목공 일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워서 그렇지 심성은 착한 놈이라우.” 영숙이는 그동안 점심 식사 맛있게 들었다고 치하를 한 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사진 속의 남자도 그럭저럭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가지게 하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물론 영숙이도 자기 스스로 남에게 내세울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자기를 친딸처럼 대해 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그 집에 들어가서 자기만 잘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암동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구로동 목사님 부부에게도 여쭈어 보았다. 다들 영숙이만 좋다고 하면 찬성이라고 했다.


   드디어 영숙이는 어느 정도 마음의 결심을 굳혔고, 어느 날 할아버지 아들이 집에 온다고 연락이 와서 남영동 할아버지네 집으로 찾아갔다.




6. 기다리는 사람


   할아버지 아들이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영숙이는 가슴이 탁 막히는 것 같아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여태껏 외간 남자를 연모한다거나 한 번도 결혼상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첫인상은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할머니는 영숙이가 이미 결정을 한 것처럼 말씀하셨고, 그 사람은 별다른 거부 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다. 피차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또 영숙이가 당장 가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결혼식은 일주일 만에 근처 음식점에서 후딱 해 치웠다. 영숙이네 하객으로는 후암동 아저씨네 가족, 구로동 목사님 부부, 후암시장에서 안면을 튼 가게 주인 몇 사람뿐이었고, 그 사람 친척도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6 ․ 25 직전에 월남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남영동 할아버지네 집 건넌방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영숙이는 아무 것도 없이 몸만 가지고 왔다. 사실 수예점 보증금 돌려받은 100만원이란 거금이 있었지만 그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홀홀단신 이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 줄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나이가 영숙이보다 6살이나 많았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것처럼 보여도 잔정이 많았다. 일을 나갔다 들어올 때에는 받아온 일당과 함께 군고구마 봉지를 슬며시 영숙이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영숙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일을 나갈 때면 영숙이는 할아버지 가게에 나가서 청소를 하기도 하고, 가구를 닦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교대로 집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도 영숙이를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처음에 남편은 며칠 걸리는 공사를 맡더라도 그날그날 돌아왔다가 다음 날 새벽 식사를 마친 다음 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공사를 하는 곳이 집에서 멀기 때문에 공사를 마칠 때까지 거기서 그냥 자겠다고 했다. 영숙이는 그러라고 했다. 자기가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밤늦게 들어왔다가 잠만 자고 새벽같이 나가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10달 만에 영숙이는 아들을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나자 영숙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날 때 느끼는 진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만든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영숙이는 이 아이만큼은 자기가 꼭 지켜 주리라 생각했다. 남편도 무척 좋아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진심으로 좋아하셨다. 일가친척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남편은 일을 나가더라도 매일 집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집에 들어올 때 꼭 술 한 잔씩 걸치고 들어왔었는데, 아들이 생기면서부터는 술도 먹지 않고 일찍 들어왔다. 어떨 때에는 아들에게 질투를 느끼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3년 남짓 행복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로동 목사님이 영숙이를 찾아왔다. 사랑교회와 행복천사원이 재개발 사업 때문에 철거당하게 생겼고, 목사님은 부평 쪽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영숙이는 그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부모님 생각이 났다. ‘만에 하나라도 이 세상에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언젠가 구로동 천사원에 찾아갈 텐데 그 건물이 없어진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제부터 부모님과 연결될 수 있는 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목사님께 간청을 했다. 혹시 모르니까 새로 교회와 천사원을 세우더라도 같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은 교회는 그렇게 이름을 짓겠지만 천사원은 세상이 바뀌어서 계속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무튼 부모님과 연락이 닿으면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남영동 집 주소를 꼭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일을 나가지 않고 아이와 함께 방에서 뒹굴뒹굴 대는 날이 많아졌다. 새벽에 인력 시장에 나갔다가 집 가까운 곳에 일감이 없을 경우 그대로 돌아오곤 했다.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서만 일감을 찾으려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가 자라 재롱을 피울 때가 되니까 남편은 더욱 더 아이를 끼고 살았다. 그러니 먼 곳으로는 일을 나가기 싫었을 것이다. 남편이 가끔씩 던져 주는 돈으로는 생활을 꾸려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할아버지 가게에서 들어오는 돈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타 쓰기가 너무 미안했다.


   어느 날 영숙이는 할아버지 가게에 갔다가 후암시장에서 안면이 있는 음식점 주인을 만났다. 그 주인은 수예점을 할 때 몇 번 음식을 시켜 먹어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언니’,‘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오래간만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수다를 떨다가 무슨 일이라도 하여 생활비를 보태야겠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 언니는 자기 가게 일을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주방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 앞으로는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여 마침 사람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평소에는 주방에서 일을 거들어 주다가 손님이 많을 때면 홀에서 서빙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라고 했다.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편이 일을 나가는 날 아이를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더니 아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받는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쏠쏠히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음식점에 일을 나가면서부터 남편에게 조금씩 소흘하게 대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크면서 생활비는 자꾸 늘어 가고, 또 가게에서 교대로 일을 하던 사람이 완전히 그만 두겠다고 하여 주인 언니가 영숙이에게 사정을 했다. 가뜩이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터라 삼겹살 구워 주면서 겨우 허락을 받아 냈다.


   본격적으로 식당일을 나가면서부터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남편은 조금 먼 데까지 일을 나가 공사를 마칠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져 갔다. 신혼 초에도 그런 일이 있어 으레 그러려니 했었지만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노량진 근처로 일을 나가 공사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 날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굉장히 궁금했다. 기다리면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 주어야지…’ 하는 원망을 하기도 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큰일이라도 생겼으면 옆집으로 전화를 하여 바꿔 달라 할 텐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혼잣말로 “그 놈의 몹쓸 병이 도진 것 아닌가?” 하시며 걱정을 하셨다. 할머니는 “그래도 지 마누라와 지 새끼가 집에 있는데…” 하셨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지나고 드디어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식당에 나가기 직전 전화가 왔다며 옆집에서 불렀다. 전화기를 통하여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핑 돌도록 반가웠다. 남편은 광명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이 너무 많아 전화를 걸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 했다. 우편환으로 돈을 부쳐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집에 아무 일도 없지?” 하고 물어 왔다. 노심초사 남편의 안부가 궁금하여 식당에 나가도, 집에 들어와 있어도 남편 생각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 무척 당황했다. 영숙이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일은 무슨 일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이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남편이 무슨 말인가 더 할 듯하여 가만히 있었더니 갑자기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언제쯤 돌아올 건지,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은 어디로 해야 하는지 궁금한 점이 많은데,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영숙이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기가 나가는 식당의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주지 못한 게 무척 후회스러웠다. 이후 몇 차례 우편환으로 돈이 오긴 했지만 전화는 더 이상 없었다. 더욱이 옆집이 이사 가는 바람에 옆집을 통하여 연락하는 방법도 끊기고 말았다. 나중에는 돈도 부쳐오지 않았다. 영숙이는 남편을 기다리는데 지치고 말았다. 어느덧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날 영숙이는 아들과 함께 부평에 있는 사랑교회 목사님을 뵈러 가는 길에 구로동 행복천사원이 있던 자리를 들렀다. 그곳에는 커다란 상가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어 시원한 음료수를 한 박스 사들고 빌딩 관리인을 찾았다. “누가 여기 와서 행복천사원을 찾으면 부평에 있는 사랑교회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혹시 ‘이영숙’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 봐서 그렇다고 하면 이 쪽지를 전해 주세요. 꼭요∼” 영숙이는 쪽지에다 자기 이름과 남영동 집 주소 그리고 식당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늙수그레한 모습의 관리인은 연신 알았다고, 염려 붙들어 놓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여 영숙이는 혹시라도 모를 친부모님과의 연결 고리를 다시 만들어 놓았다.


   사랑교회가 있는 산곡동은 부평역에서도 한참 들어간 구석에 있었다. 마침 구로동에서 산곡동까지 한 번에 가는 시외버스가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영숙이 모자母子를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사랑교회는 신흥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동네 주민들은 서울로 출퇴근하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 낮에 아이들 돌보아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 옆에 가건물을 세워 아이들 놀이방을 만들어 놓았다. 젊은 부부들은 출근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퇴근길에 아이와 함께 돌아갔다. 그러니까 행복천사원이 행복놀이방으로 바뀐 셈이었다. 하지만 간판은 ‘사랑놀이방’으로 되어 있었다.


   목사님은 “부평까지 왔으니 인천에 가서 바다 구경이나 할까?” 하셨다. 그러니까 영숙이도 아들도 바다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목사님은 영숙이 모자를 연안부두로 데려갔다. 부두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무척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횟집에 들어가 회를 시켰다. 영숙이는 목사님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해 드렸다. 목사님은 “어느 누구나 말 못할 고민을 가지고 살고 있단다. 그러니까 너도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아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행복천사원 출신 중에서 너만큼 가족을 이루며 사는 사람도 드물단다. 그리고 너의 남편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그대로 있으니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지.”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부리나케 마친 영숙이 아들은 창가에서 바다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목사님을 창으로 끌고 갔다. 멀리 떠 있는 배를 가리키며
“저 배는 왜 부두까지 들어오지 않아요?” 하고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은 “저 배가 멀리 있어서 조그맣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무척 크단다. 그래서 부두까지 들어오지 못 하고 작은 배들이 그 배로 가서 짐을 싣고 오지.” 아들은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그럼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거지요?”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물건을 싣고 먼 바다를 항해하여 다른 나라까지 간단다. 한 번 떠나면 6개월도 걸리고,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구나.” 하셨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영숙이에게 지구본을 사달라고 하더니 그 날부터 그걸 장난감 삼아 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저 나라는 어떤 나라냐며 자꾸 물어왔다. 영숙이는 태평양은 어떻고, 대서양이 어떻고,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아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영숙이는 아들이 꿈을 크게 가지는 것 같아 아주 대견스러웠다. 영숙이는 아들이 쑥쑥 커 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망 같은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영숙이를 부르더니 “요새는 사람들이 새 가구만 찾고, 중고 가구는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도 이제 식당에 그만 나가고 우리 가게에 옛날에 했던 수예점을 내어 보는 게 어떻겠니?”라고 물어 오셨다. 물론 영숙이가 전에 수예점 가게를 해 본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후암시장에 계속 나가 친분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영숙이는 또다시 자기 가게를 갖게 된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철없던 시절에 가게를 차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를 생각하며 가게 내부를 새로 꾸미고, 주위 사람들을 불러 개업식을 했다. 옛날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후암동 선생님 가족도 모시고, 사랑교회 목사님 부부도 모셨다. 후암동 선생님네 가족은 벌써 강남으로 이사 갔지만 명절 때만 되면 찾아가는 부모님과도 같은 분들이셨다.


   수예점은 그럭저럭 잘 되었다. 주위에서는 식당 주방에서 일할 때에 비하여 수예점 사장이 되니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했다. 아들은 학교가 끝나면 수예점에 와서 공부를 하고 영숙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사고가 났다. 가게를 영숙이에게 물려 준 뒤 집에서 소일하다가 모처럼 친구 분들과 함께 남산에 올라가셨는데, 내려오는 길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셨다고 했다. 구르시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가 많이 났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영숙이는 이때만큼 남편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아들이 커서 남편 역할을 대신 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아, 불행은 불행히도 계속 닥친다고 했던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 모시고 가도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냥 기운이 없어 잃어나기 싫다고 했다.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사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아무 것도 먹기 싫다고 했다. 그리고 자주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두 분은 해방 후 북한 땅이 된 사리원 근교의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고 했다. 할머니는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고, 할아버지는 그 집 일꾼이었다. 38선이 생긴 후 북한 땅에서는 지주들에 대한 탄압이 점차 심해졌다. 땅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인민재판이라는 광기에 휩싸여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기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죽임까지 당했다. 할머니네 과수원도 그리 넓지 않았지만 그 광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할아버지는 31살이었고, 할머니는 24살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47년 초 한겨울 밤을 이용해 38선을 넘었고 고생 끝에 서울역 뒤편에 조그만 판잣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물 한 사발을 앞에 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꼭 일 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오라고 부르는 듯 돌아가신 날짜까지 똑같았다. 영숙이는 이때에도 남편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단지 고등학생이 된 아들만이 쓸쓸히 빈소를 지켰다. 그래도 후암시장 상인들이 많이 찾아와 그나마 외로움이 덜했다. 이것은 물론 영숙이가 후암시장에서 쌓아 놓은 친분 때문이었다. 커다란 사건이 큰 파도처럼 지나가고 나니 평탄한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꿈틀대고 있었다. ‘참 무심한 사람!’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가끔은 친부모님 생각도 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친부모님 역할을 대신 해 주어 생각이 덜 났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생각이 더 났다.


   1996년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영숙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교에 꼭 보내고 싶었다. 사정이 어려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자기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한 번 대학 시험에 떨어지더니 더 이상 공부에 흥미가 없다며 해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학교 다닐 때 수영장 티켓을 끊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해군에 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아들이 훈련을 받기 위해서 진해로 가버리자 영숙이는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이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아들은 꼭 자기가 곁에서 지켜 주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영숙이는 기다리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후암시장에 손님이 눈에 띠게 준 것이다. 근처에 대형 할인마트가 생기면서부터 사람들이 그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 같았다. 그래도 영숙이네 가게는 단골손님이 꾸준히 팔아 주어 사정이 나은 편이었으나 다른 가게들은 아우성들이었다. 이렇게 장사가 안 되면 문을 닫아야 할 정도라고 걱정을 했다.


   일 년 만에 휴가를 나온 아들은 자기가 동해 바다를 지킨다며 자랑을 했다. “한 번 배를 타고 나가면 한 달 정도 바다에 머무는데, 밤하늘의 별이 참 많고, 무척 아름다워요. 어머니도 그걸 보시면 참 좋아하실 텐데. 밤에 울릉도 근처를 지날 때에는 오징어잡이 배가 불을 밝혀 마치 대낮같지요. 독도에도 가 보았어요.” 아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게 무척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해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영숙이는 남편 사진을 보여 주면서 “아버지는 큰 집을 짓는 사람인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짓기 때문에 집에 오지 못하는 것이란다.”라고 말해 주었었다. 그 이후론 아버지에 대해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아들이 제대를 하고 온 날 영숙이는 잔치를 크게 열어 주었다. 음식 장만을 넉넉히 하여 평소 가족처럼 여기던 후암동 선생님 내외와 사랑교회 목사님 부부 그리고 후암시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모두 불렀다. 사람들은 이제 든든한 아들과 함께 살게 될 터이니 마음이 놓이겠다고 했다. 물론 영숙이도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동안 아들은 저녁때까지 집에서 빈둥거리며 신문이나 잡지를 들쳐보다가 밤이 되면 밖으로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군대에 갔다 오느라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려는 거겠지 하고 내버려 두었다.


   너무 오래 계속되는 것 같아 “이제 무어라도 일거리를 찾아야지?” 하고 넌지시 물어 보았더니 “이제 곧 연락이 올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며 어떤 연락이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며칠 후 낮에 아들이 가게로 영숙이를 찾아왔다. “엄마, 기다리던 연락이 왔어요. 내일 부산으로 내려가야 해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군대에 있던 선배 소개로 큰 외항선을 타게 되었어요.” 영숙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배를 타다니, 그것도 외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난다니…’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배를 타면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데 그걸 또 기다려야 한다니…’ 그러나 아들은 이미 결정된 일이라며 다음 날 아침 영숙이 손을 뿌리치고 떠나 버렸다.


   영숙이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기약도 없는 기다림만 남았다. 부모님은 이미 기대를 접은 지 오래 되었고, 남편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체념 반, 기대 반이었는데 이제 아들마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떠나 버렸으니 자기 인생이 너무 소설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가게를 찾는 손님마저 줄어 가고, 영숙이는 삶의 활기를 잃었다. 여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던 영숙이지만 그 무렵부터는 사소한 일로도 짜증이 났다. 하도 답답하여 절에 들어가 중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영숙이가 집을 지키고 있어야 남편도 찾아오고 아들도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니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가고,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가서 종합 진단을 받아 보았으나 별 이상이 없다는 소견뿐이었다. 사랑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 봐도 그 때뿐이었다. 기다림이라는 병이 이렇게 아픈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 놓은 돈이 있어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자 영숙이는 가게를 처분하고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사랑교회 목사님 부부, 후암동 선생님 가족, 친부모님과도 같았던 시아버지, 시어머니,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아무 뿌리도 없이 태어나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 여기까지 왔구나!’라고 생각하니 여한은 없었다.


   방 세 칸짜리 남영동 집은 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라 했다. 마당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채송화며 봉숭아며 철마다 꽃이 피곤 했는데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내년 봄에는 예쁜 꽃씨를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겨울에 영숙이는 심한 감기를 앓았다. 약을 지어 먹었지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가 되자 영숙이는 일주일에 하루씩 파출부를 불렀다. 겨우겨우 밥만 해 먹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영숙이 얼굴은 말이 아니게 수척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영숙이가 그렇게 그리던 젊었을 때의 그 모습은 아니었다. 얼굴은 삶의 때에 찌들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늙어 보였다. 차라리 영숙이가 더 곱게 늙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남편이 영숙이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영숙이 입에서는 “이제 다 되었소.”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이제 와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부터 남편은 영숙이를 위하여 사는 사람 같았다. 남편은 영숙이 옆에 앉아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쭉 해 주었다. 영숙이도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모두 하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천천히 들어도 된다며 몸 생각해 가며 조금씩 하라고 했다.


   거의 한 달에 걸쳐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영숙이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영숙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의 품에 안겨 있었다.




7. 에필로그


   아내의 장례식 때에는 진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 대신 은혜를 갚아 달라고 하던 후암동 선생님 가족, 사랑교회 목사님 부부, 그리고 많은 시장 사람들. 나는 그 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습니다. 아내가 하듯이 말이지요. 아내를 찾는 사람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아내가 평소 살아온 바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잠깐 내가 죽고 난 후 나의 빈소에 누가 찾아올까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난 아내가 남기고 간 앨범을 꺼내 들었습니다. 앨범 속에는 젊은 시절의 아내가 낯선 꼬마를 안고 있었습니다. 가끔 어머니와 아버지도 함께 나와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 나만 끼어 있었다면 말이지요.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꼬마는 점점 자랐습니다. 사춘기를 지나고 제법 어른 티자 나자 꼬마 대신 마치 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틈에 어머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아내의 모습에서는 중년 티가 났습니다. 군복을 입은 아들은 꼭 나를 닮았습니다. 그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집을 떠나는 버릇은 꼭 나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말끔한 차림의 신사가 찾아왔습니다. 행복천사원의 이영숙이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연유를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죽기 직전에 ‘행복천사원’의 ‘이영숙’이라는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해서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편지를 읽어 봐도 되겠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사람은 내가 자기의 자형이 된다며 당연히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 영숙아.


   끝까지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해서 미안하다. 용서해 다오. 너를 낳았을 때 형편이 너무 어려워 너의 엄마와 헤어지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행복천사원에 너를 맡기며 너의 이름을 영숙이라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 그 때는 어느 정도 자리만 잡으면 너를 데려 오려 했었다. 나는 너를 데려 오기 위하여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 그 때 나에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차마 너의 존재를 말할 수 없었다. 아아, 나의 옹졸함 때문에, 나의 조그만 행복을 깨지 않기 위하여 나는 너라는 존재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미안하게 생각한다.


   혼자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 행복천사원을 찾았다. 한 아이에게 영숙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너를 가리켜 주더구나.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갔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너를 보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 왔다. 그 때의 내 심정은 찢어질 것 같았다. 돈이 좀 생길 때마다 사랑교회에 기부도 했다. 물론 익명으로 했지.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었다. 언제부턴가 네 모습이 보이지 않더구나. 그 때라도 내가 나섰더라면 그 때까지의 허물이 어느 정도 용서될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정체가 드러나고 너의 존재가 나의 행복한 삶에 지장을 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비겁한 마음 때문에 그 때에도 너를 찾지 못했다. 용서해 다오.


   네 주위에 목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만이 나의 마음을 조금 놓이게 했다. 그 이후로도 너를 잊은 적 없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이제 내가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만약 이 편지가 너에게 전해진다면 그래서 이제라도 네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지하에서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너에 관한 이야기는 이 아이에게 모두 전해 주었다. 너희 둘은 나의 핏줄을 물려받은 오누이이다. 너의 동생인 셈이지. 내가 너에게 못해 준 것을 다 해 주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 사랑한다. 영숙아. 용서해 다오.


   용서받지 못할 아버지가



   나는 그 신사와 함께 아내의 묘소에 찾아갔습니다. 나는 그 신사와 함께 술잔을 올리며 절을 했습니다. 무덤 옆에 앉아 그 신사에게 아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마치 본 것처럼 말이지요. 그 신사는 내가 필요하다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고 나도 아내에게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라도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갔습니다.


   이제 내가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릴 차례인가 봅니다. 수소문 끝에 아들이 갔다는 해운회사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아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

너가 태어나고,
너가 자란
남영동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너를 두고 먼 길 떠났던 못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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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영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주 오래 전에 제4부 히말라야 산록 마을에서 있었던 푸른 눈의 할머니 이야기의 서두 부분을 접하고 감동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실화實話인지 어떤 분의 창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나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인생과 기다림에 관한 글을 써 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만약 그 이야기가 누구의 창작물이라면 양해를 구하며 넓은 아량으로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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