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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교육때문에 서예학원을 문 닫았지요 / 함동진(아동문학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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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99회 작성일 22-07-1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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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컴퓨터 교육때문에 서예학원을 문 닫았지요 


                                                                 함동진(아동문학가, 시인, 서예가) 




함동진도 서예(주로 한글)를하였습니다.

[동진서예학원]을 운영하였지요

서예와 글씨,한자 교육도 하였지만 인성교육 중점을 두었습니다. 

컴퓨터가 갑자기 학교의 교육으로 보급되면서

학생들이 컴퓨터로 몰려갔습니다.

학원을 중단(1985-2000년 까지 운영)케 되었습니다.

성인 몇사람으로는 학원 운영이 불가 했습니다;

붓, 먹, 벼루를 모두 필요한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저는 손을 탈탈 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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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y Pictures\2013.01.01    동진서예학원  /  함동진 016




글씨가 깡통을 차다


                                         함동진



  직업에 있어 만인은 평등하며, 자기의 직업에 대하여 땀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은 고귀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운영하는 서예학원에서 구천면 길(서울 강동구 소재)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눈부신 기능장 금메달을 떼어 내리고 피자 그림판을 붙여 둔 한 가게가 있다. 이 가게의 주인 P사장은 깡통(피자 배달용 철 가방)을 단 오토바이 한 대를 끌고 종일 동분서주하며 드나든다. 5년 전까지만 해도 P사장은 양복기술자로 멋진 신사복을 지어내는 최고의 기능 보유자였다. 과거에 양복제조 기능보유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훈련과 견습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경제적인 수입도 적지 않아 보장된 훌륭한 직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업과 산업의 발달로 복장의 대량생산과 초 저가의 판매로 개인이 소유한 나사점(양복점)은 빛을 잃고 직업전선에서 퇴출 당하게 된 것이다. P 사장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일류의 기술자이면서도 하루아침에 직업 퇴출의 쓴잔을 마시고 엉뚱한 "피자깡통차기" 새 출발을 하게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는 솜씨가 내 놓을 것은 못되나 글씨 때문에 왕 희지(王羲之 307~165? 중국 진나라 때의 서성)란 별명을 숫하게 듣던 시절도 간직하고 있다. 글씨 때문에 본부(사령부)와 본사(크나큰 회사의 총무 및 사장의 비서직)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며 많은 세월을 보냈다. 대체적으로 오랜 세월을 글씨 때문에 목에 풀칠을 하며 살아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나의 글씨와 관련된 편력들을 회상하고 기록으로 남겨 봄직도 하다.
  내가 중학2시절에 인천의 K시설에 출입통제 경고문을 페인트로 붓에 발라 썼는데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워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 잘 썼기 때문이다. 고1 때에 고학의 방편으로 전북일보사 서무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글씨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편집의 과정, 출판의 과정, 조판의 과정, 활자주조의 과정, 활판인쇄, 석판인쇄, 윤전기 인쇄, 사진제판, 책의 장정과정 등, 많은 것을 보며 경험하게 되었다. (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구식 구닥다리 인쇄과정이지만) 고 2~3 때에는 합동통신(AP 및 AFP 특약) 전북지사의 부무전사(副無電士)겸 필경원으로 근무하면서 긴급무전은, 모오스 부호로 타전되어 오는 뉴스를 수신함과 아울러 신속히 필경하여 톱 뉴스 감은 특급으로 각 신문사에 넘겼다. 일반독자 들에게는 다른 일반 뉴스와 함께 필경하여 다음날 책자로 엮어 배포되게 만들었다. 같은 시기에 시사통신 전북지사에 정(正)무전사로 발령 받아 역시 무전수신과 필경을 겸하여 근무했다. 곧 이어 원광대학에 재학하면서 군대 징집을 받고 논산훈련소 과정을 수료한 후 최전방사령부 보병 제 15사단 보충대에 당도했는데, 대학을 다녔거나 나온 사람만 별도 집합하라 하더니 각각 백지와 필기구를 주며 글씨를 써 보라 한다. 그 중에서 나의 글씨가 명필로 뽑혀 사단사령부 군수참모처 행정서기병으로 근무하게 되는 기쁨의 순간을 맛보았다. 의지할 곳, 빽 없는 놈이 감히 사령부 근무라니…. 군종참모부의 K목사는 상급 참모처에 나를 빼앗겨 전역하여 헤어질 때까지 만날 때마다 섭섭해하였다. 그러나 글씨로서의 행정병은 너무나 고달팠다. 일년 열두 달 기동훈련, CPX (유엔, 미8군, 육본, 1군, 군단, 사단) 등의 크고 작은 훈련은 물론, 새로운 작전, 인접부대 들의 이동 재배치에 따른 작전명령서와 계획서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일감이 산적했다. 일정과 시한에 쫓겨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고지식하고 요령이 없는 나는 일만 할  뿐이지 의무대에도 기웃거려 보지 못한 채, 걸핏하면 코피를 쏟으며 충성(?)을 다했다. 일감은 온통 글씨를 잘 쓴다고 하는 졸병 나의 몫이었다. 사단 기밀실 작전브리핑에서 내가 컬러로 작성한 챠드가 단연 인기 만점이었다. 중요 통계와 경고문에는 이에 걸 맞는 그림과 만화가 곁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직속상관 참모는 물론 사단참모장 기타 참모들이 서로 전속 갈 때에 나를 데리고 가려고 말뚝(장기복무하사관) 박기를 권하고 회유까지 하였다.  때로는 사단장실과 참모장실에서도 불려들여 서류쓰기 업무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자대 사단 CPX(기동훈련 겸)가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도망병으로 자수하여 재 입영한(5.16 군사정권 특혜기간에) 35세의 고참 K상병은 사령부 훈련장 군수참모처 야영텐트의 불침번이었는데, 근무를 소홀히 하여 잠이 든 사이 역시 훈련에 참가한 방첩대의 위장간첩 모의 침투원에 의하여 우리 참모부의 비밀문건이 모두 탈취 당하였다. 당연히 비밀문건 취급책임자인 나의 책임으로 귀결되었다. 다행히 사령부 최고참 참모인 나의 소속부서 상관인 군수참모가 자대의 군사재판장으로 있어 그간의 수고를 역설, 형량 낮추어 주기를 호소한 바 주위의 각참모부처 모든 참모들도 인정동의하여 간신히 군 형무소행을 면하고, 자대에서 중노동 3일에 처해졌다. "중노동3일"이란 글씨가 새겨진 A4용지크기의 목판에 목줄을 매어 가슴에 달고 사단사령의 지시에 따라 온갖 잡노동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글씨를 잘 쓰는 죄 때문에 얻어진 피할 수 없는 불똥이었다.
  군의 규칙에는 위배되지만 나의 행정반의 일이 넘쳐 밤샘근무로 내무반에서 취침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따라 내무반에서 보관된 지급품 관리 소홀로, 재물조사의 날 "병사의 생명"이라고 하는 나의 칼빈 소총이 분실되어, 또 한번 더 유치장 행의 운명에 놓일 번하였다. 멍청한 신병이 총이 남는다고 중대 보급반에 반납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생각만 하여도 아찔하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어느 늦가을(전방은 9월부터 얼음이 언다.) 밤이다. 전 사단병력이 운집한 연병장에서는 인기연예인 위문단 공연이 한창이다. "노란 샤쓰 사나이" 노래가 산골짝에 메아리 치는 밤이다. 나는 군 규칙을 위반, 일과시간이 종료되었는데 행정 반에 남아 일한 죄로 주번사령에 의하여 사령부 뒤뜰에 알몸과 맨발(팬티만 걸침)로 벗겨진 채 1시간 이상 기합을 받는데 얼어죽을 번하였다. 글씨를 잘 쓴 죄 값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군에서 고생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만 생략한다. 글씨 때문에 행정력을 발휘해 중대장, 사단장, 군단장의 표창을 받았다. 군복무 기간이 더 길었다면 참모총장 나아가 장관의 표창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도 글씨로 근로장학생이 되어 사무실 한 칸을 독립적으로 배정 받고 각종교재, 고사시험지, 사무용서식, 행정사무 등을 타자 또는 필경, 챠드 하는 일로 학비 조달을 하였다. 별도로 신학대학 재단이 미국선교회 소속이므로 미국 후원자들에게 한국적 풍경, 인물, 풍속이 표현된 성탄절 카드를 그려보내어 카드 값으로 후원금을 받아왔다. 그 카드 그림을 1년 내내 나의 솜씨로 그려 보내졌다.
  나의 학력과 실력으로는 대기업 공채(사무직)시험에 응시 불가능이었다. 일신제강(현, 동부제강의 전신)의 C사장은 북한 출신이어서 공채사원 이외에 요소요소에는 북한출신의 고향 선후배와 친인척들이 채용되어 있었다. 나의 외가가 북한이어서 외가를 통한 인연으로 일신제강의 별정직 필경사 자격으로 촉탁사원이 되어 입사의 기회를 얻었다. 입사 후 행정력이 인정되어 6개 월 만에 정규사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본사의 총무(사장비서 겸직)가 되어, 종업원 3천명, 그밖에 방계회사도 거느린 회사 전반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이곳에서도 기본 업무 이외에 글씨와 관계되는 업무가 집중되었다. 밤샘업무, 공휴일, 명절, 정기휴가까지 반납하며 일을 한 결과 코가 헐어 코피가 그치질 않았다. 그 결과 코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소위 일류대학 출신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 없으니 육체의 무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는 공병우 식이라는 한글 타자기가 있어도 글자꼴이 고르지 않아 문서가 조잡하고, 한자(漢字) 글씨 또한 표시할 수 없고 축소확대도 할 수 없으니 사람의 글씨가 최고였다. 복사기도 암모니아수에 인화하는 방식뿐이어서 먹지를 받치고 3~4매 복사하는 방법과 함께 모두 사람의 글씨를 필요로 하였다. 많은 량의 문서는 강철로 만든 줄판 위에 등사원지를 펼쳐놓고 철필로 긁어 써서 등사판에 걸어 등사잉크 롤러로 밀어 종이에 박아내는 방식을 취했다.(경비절약, 대외 비밀유지 등의 방법으로 많이 이용함) 각종상장, 사령장, 현수막, 판넬, 식순 등 붓글씨 량도 만만치 않았다. 글씨 때문에 다른 회사로 직장을 옮겨도 상황은 같았다.
  나는 지금도 손때가 묻은 나의 전용 쇠줄 판, 등사원지, 철필 셑, 등사용 잉크, 등사판을 보관하고 있다. 누군가 인쇄역사 박물관이나 골동품 전시장 진열을 원한다면 기꺼이 기증하겠는데 아껴줄 만한 희망자가 보이지 않는다.
  늦으막에 서예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나, 인위적인 글씨를 배우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컴퓨터의 발달로 하루가 다르게 그 기능성이 다양해지고 사람의 글씨 솜씨를 필요치 않게 몰아가고 있다. 컴퓨터 안에 붓글씨 체를 비롯, 모든 글씨체를 저장하고 있어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고, 크고 작게 확대 축소의 자유자재와 가로세로 마음대로 표기할 수 있고, 굵고 가늘게, 납작하게 키 세우기 눕히기, 입체 음자 양자 등 어떠한 꼴이건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서예인 필경 쟁이는 깡통을 찰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되었다. 글씨 쓰는 선비는 차츰 음지로 사라져 가는 세태로 변하였다. 글씨쟁이 깡통 차는 소리가 예서 제서 소란스럽다. 상전벽해와 같은 직업 변천의 무상함이여.
                                                                                          ( <오늘의 문학> 1999년 가을호 게재)


       

                동진서예학원 원장시절  함동진 C 068.   /   서예와 한자, 한글 글씨를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



   # 저의 아내도 국가기술자격 소지(양재디자이너로 양장점운영)였는데 위의 글 양복점 내용과 같이 폐업되었다.  

   # 훗날 나의 전용 쇠줄 판, 등사원지, 철필 셑, 등사용 잉크, 등사판 등은  김포 덕포진 교육박물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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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진 교육박물관에 함동진이 기증하여 소장된 대형 장식용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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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진 교육박물관에, 함동진이 기증한 쇠줄 판, 등사원지, 철필 셑, 등사용 잉크, 등사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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