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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선비의 고장 문학기행 /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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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62회 작성일 22-08-0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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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영주 선비의 고장  문학기행  


         영주 선비의 고장 문학기행 


                                                    함동진    2007. 06. 17


  여성들은 선천적인 모성애의 끼가 있고, 그 끼가 발동하지 않으면 여성적 매력이 반감할 지도 모른다.
  강동문인회에 두 여성회장이 선출되어 이미 활동하였고,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다. 그 첫째가 이신강 전임 회장이었고, 두 번째가 현임 이혜선 회장이다.
두 분 회장은 어찌나 자상하고 친절한지 회원들의 칭찬이 자자하며 감사하게 여긴다. 강동문인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사와 일정을 사무국과는 별도로 꼼꼼하게 일일히 회원들에게 연락을 하고 다시 확인하고 챙긴다.
  금번 선비의 고장 영주 문학기행도 모성애 같은 자상함으로 진행을 하고 연락을 주시니 감히 거역하여 불참할 수 있었겠는가? 회원들이 관광버스에 만원이 되도록 다수 참석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단합된 강동문회임을 과시하였다.
  옛 선비들은 넓은 덕목과 깊은 학식을 갖추고 문장(文章)은 물론 시.서.화(詩.書.畵)를 겸하였다. 강동문인회원들은 그들 옛 선비들의 자취를 따라 답사하고 오늘의 선비라고 자처하는 우리 문인들이 문학적 소임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며 배우고 반성하여 정진하는 기회로 유익하였다.
  문학기행을 출발하면서 초대회장인 원로시인 전재동 목사께서 일정이 무사하고 성공적이기를 기도 하였고 현임 강동문인회장의 부군(夫君)인 박희 박사가 일정을 짜고 가이드 역할을 하였다. 박희 박사는 기행하는 장소마다 해박하고 해학스런 설명으로 역사.지리.전설.산물 등을 안내하여 회원들로부터 감탄의 박수 갈채를 받아 이혜선 회장의 모성애의 끼에 버금가는 부성애의 끼를 발휘하였다. 이런 신(新) 부창부수(婦唱夫隨)는 기가 막힌 재미있는 기행이 되었다.(본래의 夫唱婦隨와 婦와 夫가 앞 뒤 바뀌었음을 음미하십시오)
  일행은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 진입 제천.단양 땅을 거쳤다. 단양터널을 지나고, 영남의 3대관문의 하나인 해발689m의 옛길 죽령을 뚫은  죽령터널을 지나면서 비로봉.국망봉.연화봉을 거느린 국립공원 소백산 줄기의 장관, 검푸르며 장엄하기까지 한 파노라마가 도심의 공해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씻어냈다. 그 산줄기 안에 우리의 목적지 말고도 영주의 관광 자원인 희방폭포. 희방사. 비로사. 옥녀봉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죽령터널을 빠져 나오자 저 아래에 인삼과 사과의 고장 풍기의 모습인 인삼밭과 사과과수원이 전개 되었다.  

             풍기

   영주시 풍기읍은 인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풍수도참(風水圖讖)을 믿고 이북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주로 몰리고 반공으로 몰리고 신앙으로 몰리고 하여 월남 또는 피난으로 안녕을 위해 찾아든 곳이다.   이때 인삼 씨앗을 휴대하여 와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유명한 세계 제일의 약효를 내세우는 풍기인삼의 유래가 된 것이라고 한다.  
  풍기에는  소백산에 수맥을 두어 지하 800m에서 솟는 불소가 함유되 유황온천수가 솟아나 이 또한 이고장의 자랑거리 중의 하나이다. 일정에 여유가 있어 일박을 하였더라면 온천욕을 하였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광복기념공원

  대한광복기념공원은 일제에 항거한 한국 최초의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단체체인 대한광복단의 결성지로 풍기읍 산법리에 세워져 있다 .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한 후 국권회복을 위해 8도의 의사(義士)들이 모여  1913년   국내 최초 무장항일단체인 대한광복단을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유장열(柳璋烈),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유창순(庾昌淳), 강병수 (姜炳洙), 한 훈(韓 焄), 김병열(金炳烈), 정만교(鄭萬敎), 장두환(張斗煥), 김상옥(金相玉), 황상규(黃相圭), 이 각(李 覺), 정운홍(鄭雲洪), 정진화(鄭鎭華) 등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초기구성원은 의병출신이 주도했고,  점차 계몽운동가 등 다양한 계층의 지사들이 가담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이전까지 대립양상이었던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가계열이 서로 결합 단합케 함으로서 역사적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들 풍기의 대한광복단은 군자금 모집, 민족반역자처단 등을 투쟁목표로 삼고 무장군대를 양성하여 일제에 항쟁을 하였다.  
   대한광복기념공원은 대한광복단 결성지역인 이곳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산 86-2번지 일원에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3기의 기념비, 광복탑, 기념관과 기타 부대이용시설 등이 준공되어있다. 이곳은  학생교육의 산교육장은 물론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는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한 목적으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주선하여 세웠다.
    시설물 등을 살펴보면 부지 58,392㎡(기념사업회 31,937, 시유지 26,455)에 기념비, 상징조형물, 기념관, 휴게시설, 조경 등으로 건설기간은 1994년에 시공하여 2003년에 준공되었다.  
  전시관에는  

      *제1전시실(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 -일제침략의 서곡, 독립의 염원, 독립을 위한 투쟁, 독립운동가의 삶 등  

      *제2전시실(대한광복단의 활동) -대한광복단의 결성, 활동, 발전 등  

      *제3전시실(대한광복단의 정신) -열사들의 생애와 활동, 선열과의 대화(채기중, 유장열, 유창순, 한 훈)    

      *제4전시실(영주의 독립운동) -영주의 독립운동사, 영주의 특성, 영주의 역사, 문화 알아보기(정보검색)  

      *제5전시실(애국의 불꽃) -열사들의 시련(벽관, 독방, 고문)체험, 대한광복단관련비석, 옥중생활(채기중), 유족들의 삶 등이다.
    대한광복단기념공원내의 거대한 대한광복단추모탑은 2004년 10월 19일 완공되었는데 조국광복을 위해 온 몸을 바친 대한광복단원의 공훈을 선양하고 그 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되었다.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는  동양대학교가 인접하고 있다.
         
             금성단(錦城壇)

  일행이 승차한 버스는 영귀산(靈龜山) 아래 ´청다리´라고도 하며 ´제월광풍(霽月光風)´이라는 문장에서 이름을 취했다는 제월교(霽月橋-곁에 제월교碑도 세워져 있음)에 못미처 소수서원의 후문이 있는 도로가에 세워졌다 . 그리고 먼저 들른 곳이 2차선도로의 건너편에 있는 금성단이다.  
  금성단은   사묘와 제단(祀廟. 祭壇 2,654㎡)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도기념물 93호(1993.11.30 지정)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외 5필지에 소재하고 있다.   순흥은 순흥부(順興府)라고 하는  경북 영주시 일원의 고려시대 행정구역이었다.  고구려 때는 급벌산군(及伐山郡), 통일신라시대는 업산군(?山郡)이라 하였다가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라 개칭하였고 충목왕 때 승격하여 순흥부가 되었다. 1458년(조선세조4)에 일어난 모반사건(단종복위운동)이 발생하여 부를 폐지하고 영주 및 봉화(奉化)로 나뉘었다. 1683년(숙종9) 다시 순흥부로 복구하였다가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강등하였고, 1914년 군을 폐지하고 봉화와 영주에 각각 편입시켰다.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관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한 피흘림과 고고한 학문이 서려 있는 선비의 고장이다.
    금성단은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세종의 6자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과  이보흠(李甫欽?-1457) 등 그 사건에 함께하여 목숨을 잃은 많은 이름 없는 의사(義士)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단이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고 단종을 핍박하였다. 세종의 아들들이 대부분 세조의 편에서서 권세를 누렸으나 성품이 강직한 금성대군만이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마다 않고, 아버지인 세종과 큰형인 문종(文宗1414-1452)에 대한 충성심으로 어린 조카를 보호하려고 목숨을 걸었다.   하인이 선비들의 반란계획을 밀고하여 수천 명이 죽게되었고 시체들은 소수서원 앞 죽계천에 버려져 그들의 피가 냇물을 따라 15리 가량이나 흐르다 끝난 곳이 있는데 지금도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순흥에서 영주쪽으로 5분가량 거리의 길가에 허수아비들이 있고 찐빵을 파는 가게가 있는 지점이 바로 피끝마을(안정면)이다. 여기 피끝마을 표지석에는 "동촌1리(우음.피끝)"이라 한글로 새겨놓았다.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지 200여년 후인 1719년(숙종肅宗45)에 부사였던 이병하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단(壇)을 설치하였고, 1742년(영조18) 경상감사였던 심성희가 정비하여 지금의 금성단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금성대군을 중앙에 모시고, 이보흠을 오른편에 이름없는 많은 의사들을 왼편에 모신 순의비(殉義碑)가 있어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금성단 곁에는 금성단을 내려다보는 고목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군도 복위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 은행나무의 이야기는 화를 당한 당시의 순흥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순흥의 충신들이 죽는 날 함께 죽었던 은행나무가 숙종 7년에 밑동부터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순흥부가 폐부(廢府)된 지 228년만(숙종9년)에 회복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압각수(鴨脚樹)란 이름을 하사 받아온 후 1,200년의 수령를 자랑하듯 의연히 서있다. (본 기행문 필자의 단종에 관한 기행문으로 <강동문학>제12호 2005. 1. 5. [영월 서강 청령포의 단종애사...]로  p.206∼215.에 게재된 바 있다.)

         <금성단을 지나며 (過錦城壇)>
  
           竹溪西畔錦城碑、
           千古吾東永有辭。
           陰谷春生花鳥語、
           興州遺事問靈龜。
          죽계 서쪽 물가에 금성단 비석
          천년토록 우리 동방 할 말이 있네.
          그늘진 골짝에 봄기운 돌아 새들 지저귀는데
          흥주 고을 옛일 영귀에게 물어보네.
                    *註: 대군의 위리 장소가 영귀봉 아래에 있었다. [大君圍籬處 在靈龜峯下]
                                *출전 :《평암선생문집 권1 시 [平庵先生文集目錄, 卷之一, 詩]》

【"[至今竹溪一曲,猶存?棘之遺墟、碧血埋寃、枯骨莫收、每於天陰雨濕之日、凄風冷月之夜、  精魄飄蕩、靡所棲泊、幷與當時死事之諸鬼、煩寃上下于宿草荒燐之間、過者髮?、行者涕泗、 皆指點徘徊而不忍去、曰、此故錦城大君、殉節之地也。莫不長?永慨於朝家恤典之未行也。  逮至己亥歲、有守土之臣、訪問而義起、?拓其?棘之墟、而築壇三級、上以祀大君、中以祀李甫欽、下以祭同死士民之?鬼、以歲寒食之節、設牲酒?之、庶可慰不泯之貞魂、]
  지금 죽계 한 구비에 아직도 유배되었던 유허가 있다. 선혈 홍건하였던 원한을 풀지 못하였고, 마른 뼈 거두지 못하여,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때나 바람과 달빛이 쓸쓸한 밤이면 영혼이 귀의할 곳이 없어, 당시 함께 죽은 영혼들과 함께 묵은 초목 도깨비 불 사이에서 오르내리니, 지나가는 자마다 머리끝이 곤두서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손으로 가리키며 차마 떠나가지를 못하면서 , "이곳이 옛날 금성대군이 순절한 곳이다."라고 말하고, 나라에서 은전을 내려 영령을 달래는 예를 시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길게 한숨을 쉬며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해년에 이르러 이곳 군수가 방문하여 보고 대의를 내세워 드디어 그 유허지에 터를 닦고 세 제단을 쌓아, 위에는 대군을 모시고 중간에는 이보흠을 모시고 아래에는 함께 죽은 선비와 백성들을 모셨다. 그리고 해마다 한식날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니, 천추만대 빛나는 원혼들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금성대군 사당 건립을 요청하는 상소[請錦城大君立祠疏 代順興儒生作。]《우천선생문집(牛川先生文集) 저자 : 정옥(鄭玉) 자/호 : 자성(子成)/우천(牛川)》 중에서 부분옮김)】


             소수서원紹修書院(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일행이 금성단을 둘러보고 두 번째 찾은 곳은  한국 성리학의 메카로 꼽히는 고장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소수서원이다. (사적 제55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서원은 강학기능과 제향기능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1541년(중종36)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청백리(淸白吏)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이 이듬해인 1542년(중종37)에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중종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겸비함으로 비로소 서원으로 시작되었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고, 1546년(명종1)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의 확충과 운영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 운영유지에 필요한 여러 가지 필수사항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서원을 널리 알리고 공인을 받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되었고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임금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 性理大全≫등의 서적을 하사케 하였다.   당시 나라 안에는 서원의 지나치게 많은 건립과 부패의 이유로, 1868년(고종5) 대원군이 서원들을 철폐하였으나 소수서원은 그대로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영귀산(靈龜山)산이 가슴으로 서원을 감싸안은 듯 배치되어 있다.   역학자(易學者) 조용헌 선생의 [영구예미(靈龜曳尾)]라는 글에  "(전략)...조선의 지관들도 명당을 표현할 때 이 ‘영구예미’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하였다. 풍수의 명당 가운데 ‘영구예미’라는 자리가 그것이다. 거북이 모양을 한 산봉우리가 저수지나 냇물을 향해서 들어가는 형국을 가리킨다. 이때 거북이 등이나, 머리 윗부분에 명당 자리가 난다. 저수지를 향해서 들어가는 거북이를 하산구(下山龜)라고 하고, 저수지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가는 거북이 형상을 상산구(上山龜)라고 부른다....(하략)" (조선일보[조용헌살롱] 2007.07.12 참조).  조선생의 풍수설이 말하듯 소수서원원은 영귀산이 감싸 안고 앞에는 산수화폭 같은 절경인 죽계천(竹溪川)이 흐르고 건너에는 연화산이 병풍을 두른 듯 자락을 두르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이 탄생하였겠는가.
    소수서원매표소정문을 들어서면 소수서원을 뒤로 에워싼 학자수(學者樹)라하는 노송림(老松林) 숲길로 통한다.  이 송림 안에는 소혼대(消魂臺)라는 쉼터도 있는데 유생들이 공부에 지친 머리를 식히던 곳이다.  솔숲을 지나다가 보면 길 우편에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숙수사는 간 곳 없고 지금은 숙주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만이 남아 있다. 석조 지주 가운데에 기둥을 높이 세워 사찰에서 만(卍)자 깃발을 다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숙수사의 폐사(廢寺)는 몽골의 침입에 의하였다고 하는 설과, 조선시대(1457년·세조3) 단종복위운동 역모의 보복으로 순흥도호부 폐지 때에 관군의 방화에 의하여 폐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간지주 아래 죽계구곡(竹溪九谷)을 흘러들어 온 죽계천을 건느는 보의 징검다리 건너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한 명칭으로 "푸른 연화산(蓮花山)의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옛 시귀(詩句) ´송취한계(松翠寒溪)´ 중에서 취한(翠寒)을 따서 이름한 취한대(翠寒臺)가 있다.  그 곁에는 백운동경자바위(白雲洞敬字)가 있는데 경자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운동은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이고, 붉은 색의 경(敬)자 글씨는 신재 주세봉(愼齋 周世鵬) 선생의 글씨라고 전해져 온다.
   1457(세조3)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이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참화를 당했다. 그때의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어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원혼들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냄으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전해진다.
  영귀산을 뒤로하고 서원을 에워싼 담장 앞 정문을 들어서기 전에 우측에는 죽계천을 끼고 풍광이 빼어난 곳에 신재 주세붕이 세웠다는 경렴정(景濂亭)이 있는데 이곳에서 시연(詩宴)을 베풀고 학문을 토론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고 한다.  경렴정의 현판 렴(濂)자는 북송의 철학자 <렴계 주돈>을 경모하여 따왔고, 경(景)자는 <회현 안향>선생을 높이는 뜻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홍전문(紅箭門)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철제로 두른 단이 있다.  이 단은 해마다 음력3, 9월(초정일)에 문성공 회헌 안향 제향 때 제물(가축)의 흠결을 판별한 후 잡던 곳인 성생단(省牲壇)다.
     홍살문과 흡사한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1542년(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성리학의 선구적 대가 유현(儒賢) 안향(安珦)선생이 공부하던 곳으로 여기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 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내력으로 되어있다.   1544년(중종39)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5) 이황(李滉 퇴계)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고, 이로부터 조선땅에 서원이 널리 전파되었다.   1871년(고종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는 서원이며.  미국의 하버드대학 보다 93년 앞서 세워졌다고 하는 역사 깊은 서원이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학당(講學堂),  그 뒤에는 서원의 원장과 교수가 기거하던 용도의 직방재(直方齋-서재西齋)와 일신재(日新齋-동재東齋) 가 있고,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오늘날의 대학도서관과 같은 역할의 장소로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내시본을 비롯 많은 서책을 보관하였으며 서책은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인 스승의 우측에 배치했다는 서고(書庫)인 장서각(藏書閣)이 있다. 장서각 뜰에는 밤중의 보행을 원활케 하기 위해 관솔불로 어둠을 밝혔다는 정료대(庭燎臺)가 있다.  장서각 곁에는 별도로 담장을 두른 건물이 있는데 고려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晦軒影幀: 보물 제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호), 그리고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 보물 제717호)이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이다.  그 뒤로  주자·노자·퇴계·안향·주세붕·이덕형의 영정들을 안치한 영정각(影幀閣)과 봉향(奉享)시의 용품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영정각 앞에는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였던 일영대(日影臺)라는 해시계가 있다.  
   그 뒤로 담장으로 나있는 문 하나를 넘어서면 사료관과 고직사가 서로 담장을 끼고 배치되어 있다.  그 뒤로 다시 담장으로 난 문하나를 넘어서면 충효교육관과  관리사무실이 있는 큰건물이 있는데 뜰의 잔디밭에는 중수기적비가 있고, 탑의 옥개석을 장식용으로 놓아두었다. 충효교육관 옆 동편으로 나 있는 문옆의 영귀천(靈龜泉) 약수샘물을 마시고 나오면 임진왜란당시 겸안 류운용이 군수로 재임할 때에 대를 쌓고 연못을 팠다는 탁영대(濯纓臺)와 탁청지(濯淸池))가 보인다. 물이 맑을 때에는 갓을 씻고 흐릴 때에는 발을 씻었다고 전해온다.   여기에는 죽계천변을 축대로 쌓고 길을 내고 잔디를 깔아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잔디밭에는 오석(烏石)으로된 시비(詩碑) 2기가 있는데 각각 한글과 한자로 된 죽계별곡(1章式)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죽계별곡이 장장 5장(五章)이나 되니 다 수록할 수 없어 극히 일부만 한자와 한글을 따로 세운 듯하다.   아래에 안축의 <죽계별곡> 전문을 올린다.
  
     [죽계별곡(竹溪別曲)]
                             안축(安軸 : 1287-1348 충목왕4년)

      제1장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죽령남 영가북 소백산전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천재흥망 일양풍류 순정성리
     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           타대무은 취화봉 왕자장태
     爲釀作中興 景幾何如                  위양작중흥 경기하여
     淸風杜閣 兩國頭御                     청풍두각 양국두어
     爲 山水淸高 景幾何如                 위 산수청고 경기하여

     제2장
     宿水樓 福田臺 僧林亭子              숙수루 복전대 승림정자
     草庵洞 郁錦溪 聚遠樓上              초암동 욱금계 취원루상
     半醉半醒 紅白花開 山雨裏良        반취반성 홍백화개 산우이량
     爲 遊興 景幾何如                        위 유흥 경기하여
     高陽酒徒 珠履三千                     고양주도 주이삼천
     爲 携手相遊 景幾何如                 위 휴수상유 경기하여

     제3장
     彩鳳飛 玉龍盤 碧山松庵             채봉비 옥용반 벽산송록
     紙筆峯 硯墨池 齊隱鄕校             지필봉 연묵지 제은향교
     心趣六經 志窮千古 夫子門徒       심취육경 지궁천고 부자문도
     爲 春誦夏絃 景幾何如                위 춘송하현 경기하여
     年年三月 長程路良                    연년삼월 장정로량
     爲 呵喝迎新 景幾何如                위 가갈영신경 기하여

     제4장
     楚山曉 小雲英 山苑佳節             초산효 소운영 산원가절
     花爛■ 爲君開 柳陰谷                화란만 위군개 유음곡    ■:-火+曼= 
     忙待重來 獨倚欄干 新鶯聲裏      망대중래 독의란간 신앵성리
     爲 一朶紅雲垂未絶                    위 일타록운 수미절
     天生絶艶 小桃紅時                    천생절염 소도홍시
     爲 千里相思又柰何                    위 천리상사 우내하

     제5장
     紅杏紛紛 芳草■■ 樽前永日     홍행분분 방초처처 준전영일    ■:- +妻=     
     綠樹陰陰 畵閣沈沈 琴上薰風       녹수음음 화각침침 금상훈풍
     黃國丹楓 錦繡靑山 鴻飛後良       황국단풍 금수춘산 홍비후량
     爲 雪月交光 景幾何如                 위 설월교광 경기하여
     中興聖代 長樂大平                     중흥성대 장락태평
     爲 四節遊是沙伊多                     위 사절유시사이다
                           (이 글에서는 컴퓨터에서 변환되지 않는 한자는 누락됨을 양지 바람.)  

     (제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 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 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 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3장)
     산새는 채봉이 날아오르려는 듯, 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 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으로.
     아! 큰소리치며 신임자를 맞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4장)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꼬리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이 구름처럼 흘러내려 끊임없는데,
     타고나 천하절색인 소도홍(小桃紅)만한 때쯤이면
     아! 천리 먼 곳에 두고 서로 그리워함을, 또 어찌 하겠습니까?

    (제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하루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 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출전 <근재집(謹齋集)> -작가 안축(安軸 : 1287-1348 충목왕 4년) 고려말 문신. 경기체가 작품으로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이 있으며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전한다.   *"죽계별곡"은 전체 5장 가운데 역시 1장부터 순서대로 순흥(順興)의 형승(形勝), 정자(亭子), 송록(松麓), 화훼(花卉), 사계(四季)로 각각 되어 있다.    이 작품의 구조를 살펴보면 1장을 서사로 두고 마지막장을 결사로 보면 제2장 이하로 일정한 순서를 따르지 않는 듯이 보인다. 1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장들을 살펴보면 제2장에서는 사찰의 누각, 정자 등을 찾아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광경을 다루었다. 제3장에서는 향교에서 글을 배워 유학을 익히고, 철 따라 시를 읊고 음률을 즐기는 광경을 자랑하고, 향교의 스승을 보내고 맞는 광경도 거기 곁들였다. 제4장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서 멀리 두고 생각을 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제5장에서는 성스러운 태평성대이니 사철 즐거운 놀이를 벌이자고 했다.  작품의 내용이 죽계 지방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향리계층의 신흥사대부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 과시 그리고 유락, 학습, 상사 등으로 나열된 유학자들의 태평성대의 향유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죽계별곡"의 창작 연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작자의 고향 순흥이 순흥부로 승격이 되고, 거기 충목왕의 태(胎)가 안장되는 일이 작가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충목왕 4년(1348)에 있었던 것을 증거로 해서, 그 해가 창작 연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끝으로, 이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근거로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본 기행문의 <죽계별곡>詩文은 창원여고 소공주들과 함께하는<국어사랑>에서 옮겨왔음)


         선비촌

   소수서원의 경계지에 죽계천과 선비촌을 끼고 흐르는 옥계천이 합수되는 곳에서 소수서원을 품은 영귀산 뒤편쪽 건너의 저자거리로 가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나의 제의로 회장과 몇몇 회원은 죽계천을 건너는 돌징검다리로 건너가며 옛 시골 어린 시절을 풍미했다.   다시금 저자거리의 울 밖 길에서 선비촌으로 가는 옥계천 다리를 건너야했다.
  선비촌 동구(洞口) 우측에 광풍대(光風臺)와 광풍정(光風亭)이 있고 다음에 소수박물관이 있다. 일정 시간관계상 소수박물관 견학은 취소하였다. 소수박물관 뒤쪽에는 청소년수련관이 있다.  소수박물관이 있는 곳부터 취한대 까지 죽계천변과 연화산 자락을 따라  산책로가 있다.
  일행은 선비촌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선비촌은 크게 와가주택구역(7棟)과 초가주택구역(5棟)으로 구분된다. 와가주택구역에는 해우당고택 두암고택 화기리인동장씨종택 만죽재고택 김상진家 김문기家 김세기家로 구성되어 있고, 초가주택구역에는 장휘덕家 김뢰진家 김규진家  두암고택가람집 김구영家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밖에 강학당·물레방앗간·대장간·정자·산신각 등 40여 채의 영주의 전통가옥들을 재현 배치하여 두고 있다.
  그리고 이들 선비촌 건물구역을 우리의 전통선비정신과 유가정신에 맞도록 배분 구획하여 이상적(理想的)으로 배치하였다.  
   ▷수신제가(修身齊家)구역 : 수신제가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으로, 선비들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에 힘쓰며 일상의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일 곧 수신(修身)을 중요시하였다. 유학의 실천적인 학풍에 의한 것으로 선비들은 수신을 위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공부한대로 바르게 실천함에 있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신제가의 공간에서는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위해 노력하였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으며 한국의 정통적 교육방식을 재인식케 하는 곳으로, 김싱진 家, 해우당 古宅, 강학당으로 구성된 구역이다.
   ▷입신양명(立身揚名)구역 : 입신양명이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며, 옛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의 길이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修身齊家後治國平天下)하는 것으로 새겨 배웠기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얻는 천명의 길이었다.  입신양명의 구역에서는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영주출신의 선비들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두암 古宅, 화기리인동장씨 宗宅을 배치하여두었다.
   ▷거무구안(居無求安)구역 : 거무구안이란 삶에 있어서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않는 다는 뜻으로, 선비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다보며 자연이치와 인간 삶의 길을 고민하는 것이며, 자연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인격수양을 한다는 것을 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거무구안의 구역에서는 명상과 함께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지 않고 현실의 왜곡을 비판한 영주 선비들의 곧은 기개를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곳으로 김문기 家, 만죽재, 정사로 구성되어 있다.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구역 : 우도불우빈이란 가난한 삶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살림살이가 어렵다할지라도 부(富)하게 사는 것에 유혹됨이 없어 선비의 도리를 어기지 않고, 청빈으로 인한 곤궁에서도 선비의 품격을 지켰다.  우도불우빈의 구역은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청빈을 실천한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김세기 家, 김뢰진 家, 장덕휘 家, 김구영 家, 김규진 家, 구암고택가람집으로 배치하여 두었다.
   선비촌에서는 가족단위 또는 단체의 예약을 받아 투숙하며,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선비촌에서 나와 옥계천을 건느면 저자거리가 있다. 주점, 전통음식점, 전통공방 등이 있고 옛 것과 옛 풍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되었다. 강동문인회도 당일치기 기행도 좋지만 선비촌에서 1박2일 정도의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였더라면 몸에 선비의 삶을 덧입혀 나오는 보람을 얻어 더욱 유익하였으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순흥향교(順興鄕校)
  
   일행의 버스는 저자거리 울 밖 도로 곁의 주차장을 떠나 건너편의 죽계구곡(竹溪九曲)의 물이 흘러내리는 죽계천 위의 제월교(일명 청다리) 곁을 약간 지나 경북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437번지에 소재하는 순흥향교(順興鄕校 문화재자료 347호·1998.04.13 지정)에 들렀다.
  향교는 국가에서 지방민의 교화를 위한 교육목적과,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게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마련한 교육기관이다.  순흥향교는 고려 후기의 향교로 고려 충렬왕 30년(1340) 때에 순흥부 북쪽인 금성에 창건되었었으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순흥부(順興府)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후 약 200여 년이 흐른 숙종9년(1683)에 순흥부가 회복됨과 함께 재건되었고, 1718년에는 순흥부 동쪽 위야동에 이건하는 등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한 후 정조14년(1790)에 현위치로 옮겨 안주하게 되었다.
  순흥향교의 현재 건물로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그 앞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무·서무가 있다.  순흥향교의 전면 영귀루를 지나면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삼문 등이 있다.  현재 순흥향교의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었는데 그 뒤로 별도의 일곽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북쪽에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한국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오늘날에는 교육기능은 무시되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소수서원과 순흥향교를 돌아본 후, 오늘날의 선비라고 자처하는 문인들이 얼마나 갈고 닦아야 후세로부터 우러름을 받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 자신을 돌아보니 좁쌀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민(愚民)을 실감케 되었다. 


             금성대군위리안치지(錦城大君圍籬安置地)


      도로변에 있는 풍기의 인삼과 온천, 인접해 있는 순흥의 소수서원 그리고 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석사 등 지나가는 길에 두루 예불을 하거나 관광을 하면서도 들르지 못하는 곳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에 위치한 금성대군위리안치지는 이들이 지나는 도로로부터 엉뚱하게 벗어나 상당한 거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도로마저 협소해 관광객들이 여간해서 특별한 목적이 없이는 들르지 않는 곳이다.   얼마나 인적이 드문지 넓은 주차장에는 우리 이외엔 한 대의 차량도 주차하여 않았고 공중화장실 입구 문지방 밑까지 잡초가 무성하였다.  주차장에서 죽계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 과수원과 밭들 사이에 금성대군위리안치지가 있다.
  세종의 6자이며 단종의 숙부이면서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두 번에 걸쳐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된 이곳이 금성대군위리안치지이다.  위리안치는 중죄인들을 범죄현장이나 부근 인적이 없는 들판에 돌우물 같은 구덩이를 만들어 죄인을 가둔 후 우물주변에 탱자나무를 심고 감시인을 두어 형이 확정되어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가두었던 미결수 구금장소인 셈인데,   금성대군위리안치지도 역시 탱자나무를 울로 하고 있다.  이곳은 세조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다 이 곳으로 부처를 당한 금성대군이 이보흠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위리안치 되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형벌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금성대군이 이 안에서 고통의 안치(安置) 곧 거주제한의 연금생활을 한 셈이다.
  조선시대 형벌제도 중 일종의 유배형으로 죄인에게 내려지는 부처(付處-流配刑 가운데 하나로 중도부처中途付處라고도 함)와 안치(安置)가 있었는데,  안치(安置) 형벌에는 세종류가 있었다.  1). 본향안치(本鄕安置)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    2). 절도안치(絶島安置) -중죄인에게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형생활을 하게 하는  안치 형벌,   3).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장 중벌에 속하는 위리안치는  탱자나무 울타리 또는 가시덤불 울타리를 쳐 외인의 출입을 통제한  가장 엄중한 안치형벌이었다.  그러나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부인과 함께 머물러 생활하게 하였던 제도이며,  안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 또는 고관일 경우 예우하여 부인과 함께 머물러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유형(流刑)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 생활케 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역사문화탐방 순흥넷]의 <순흥 위리 안치지> 제목하에 이의제기를 한 부분이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금성대군의 중형 수양대군이 단종[조카]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것에 대하여 위법 부당함을 간하다가 순흥에 유배[위리안치]되어 정축지변(단종 복위 운동)으로 죽음을 맞기까지 마지막 주거지이다.    그러나 현재 복원시켜놓은 위리안치지 [돌 우물]의 위치와 형태는 조성 과정에 충분한 사실관계를 규명하지 못한 듯하다. 따라서 지금 복원된 돌우물 형태의 구조가 어떤 근거에 의해 조성 된 것인지, 향토 사학자나 관심 있는 분들이잘 잘못을 가려 줄것을 기대하여본다.    관련 문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월27일 을축일에 의금부에서 상감께 아뢰기를 ´지금 전지를 받들어 유(금성대군)를 경상도 순흥에 안치 하오니 청 하옵건데 그 고을 수령에게 명령하여 미리 거처할 곳을 준비하고 난간과 담장과 문을 높고 견고하게 설치하여압송해서 내려갈 때을 기다리며 사람을 차출하여 교대로 지키게 하여 외부의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니 상감이 그 말을 따랐다." <세조실록 , 금성대군실기>     "임금께서 의금부에 전교를 내려 말씀 하시기를 ´이유, 이영,이어, 이전, 정종의 처첩과 자녀들은 원하는데로 모여 살게 하고 부리는 여종은 이유는 4명으로 하고, 그나머지는 3명으로 하여 숫자를 정하고 ,또 소재지의 고을에 명령하여 양식과 소금.장,술,고기,채소,과일 등을 때에 따라 적당하게 갖추어 지급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수령이 친히 문안 드리고 관찰사에게 보고 하면 관찰사는 계절마다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금성대군 실기>     위 기록 중, 담장과 섬돌, 난간과 문호 등의 단어는 와가(瓦家)를 의미하고 있으며, 미리 거처할 곳을 마련하라는 것은 금성대군을 배려하여 신분에 걸맞는 가옥을 물색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 고을수령에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군을 친히 문안드리라는 어명으로 보아, 숙소 외에 객이 드나들고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있었으며, 4명의 여종들이금성대군의 거주지와 같은 공간 내에 있었거나 근접한 별도의 부속 건물에 거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숙소와 접객 장소의 분리, 유배자와 노비의 거처 분리는 영월 청령포 ´단종 어가 제현´의 사례와 남제주군 추사선생 적거지, 유적지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석사(浮石寺)
  
  강동문인회 일행은 늦은 점심을 마치고 기행일정 목적지의 하나인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명당에 위치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라 하는 부석사를 기행을 하였다.    자상한 부석사의 기행 내용은 기행문의 분량관계도 있고 하여 이번 기행문에서 생략키로 하겠다.  다만 답사한 코스 순서에 따라 부석사 관할 하에 있는 중요 시설물들의  명칭만을 나열하는 정도로 한다.
  주차장의 주위에 상가가 있고 부석사로 오르는 솔숲 길가 아래에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어 인근의 풍광과 잘 어울려 우리 일행의 마음을 시원히 닦게 하였다.
   1)매표소를 지나면   2)→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란 현판이 달린 일주문이 있다.   3)→ 다음에 부석사중수기적비가 있고.   4)→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보물 제255호)가 있다.   5)→천왕문(天王門(석축에는 원래 조계문曺溪門이 있었다함)이 있고.   6)→천왕문을 지나 석축단을 올라 정원 같은 곳에 왼쪽은 요사채, 오른쪽은 비각, 그리고 동방폐사지에서 옮겨 왔다하는 나란히 앉힌 삼층석탑의 쌍탑인 2基의 東탑과 西탑(東탑만이 경북유형문화재 제130호)이 있다.  西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석존사리5과를 봉안하고 있다.    7)→석탑에서 전진하여 올라가면 범종루(梵鐘樓)가 있고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란 현판이 달려있다.   8)→범종루 왼쪽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부석사 2개 누각 중의 하나이다.   9)→범종루  밑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마당에 약수가 있고, 부석사고려각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벽화(보물 제46호) 등이 소장되어 있는 유물전시관인 보장각(寶藏閣)있다.   10)→범종루를 지나면 오른쪽에 응향각(凝香閣), 왼쪽에는 취현암(醉玄庵)이 있다.   11)→범종루의 영역을 나와 자연석을 쌓은 석축 위에 세워진 안양문(安養門)을 통해 계단을 오르면 마당쪽의 안양루(安養樓)에 이르고 이승만의 글씨인 <부석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하나의 건물에 문과 누가 함께 하여 있다 .   12)→무량수전 앞마당에는 8각의 옥개석 석등(石燈 국보 제17호)이 앉혀 있다.    13)→드디어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고려공민왕이 썼다고 하는 현판이 걸림)에 이른다.   14)→무량수전 뒷편 왼쪽에 작은 3기의 불상이 있고 그 곁에 설화가 담긴 고인돌무덤 모양의 들뜬 돌 곧 부석(浮石)이 있다.    15)→부석 옆으로 약간 내려간 곳에 삼성각(三聖閣)이 있고,    16)→반대편으로 무량수전의 오른편 산으로 향한 무량수전 동쪽 작은 언덕 위에 보물로 지정된 부석사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보물제249호)이 있다.     17)→석탑 뒤쪽에는 부석사 창건시 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 선묘를 기리는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18)→선묘각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조사당(浮石寺 祖師堂 국보 제19호)이 있고,    19)→조사당 추녀 밑의 축대 위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쓰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라 하는 전설(*1)의  선비화(禪扉花) 나무가 있다.  훼손되지 않도록 철조망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1300여 년 동안이나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부석사 승들은 이 나무를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르는데  골담초(骨痰草-콩과목)이다.  

       <선비화 나무에 대한  퇴계 이황  詩>
                                     시 번역 : 박 희 교수

        擢玉森森倚寺門       탁옥삼삼의사문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옥같이 뽑혀서 무성한 모습으로 가람에 의지해
       卓錫(*2)에 신령스런 뿌리가 내렸다고 스님들은 말하네
       지팡이 위에는 曺溪水(*3)가 스스로 있어
       자연의 이슬비 은혜는 빌리지도 않았네.

         (*1)  : 부석사를 찾아온 이들 중 선비화(禪扉花) 나무의 전설을 믿지 못하겠다하면 부석사의 스님들은 위의 퇴계 이황의 시를 제시하면서 진실이라고 말한다 한다.
               (*2)  : 卓錫(탁석): 승려가 지팡이를 꽂고 머무르는 것(駐錫)- 승려의 우뚝한 수행 
               (*3)  : 曺溪一滴水(조계일적수)로 禪의 本流
        

  이로서 일행은 부석사의 경내 기행을 마치고 하산하였다. 


             죽령(竹嶺)

  강동문인회의 <선비의 고장 영주 문학기행>일정에는 죽령 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상 터널를 통하여 죽령을 들랑날랑 하였다. 상기 열거된 기행지들은 모두가 많은 시간을 가지고 답사해야하는 곳이다.  당일치기의 답사로는 당초의 기행계획대로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였다.  부석사에서 내려온 회원들은 귀경시간이 촉박하여 죽령답사는 그만두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죽령에 얽힌 방대한 역사이야기는 별도의 기행문으로 취급해야할 사안이고, 그 중에는 문인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 있어 궁금증을 풀 겸 아래에 몇 가지를 간추려 소개한다.
  죽령은 소백산맥(해발 1,440m)이 영남과 호서를 가르는 경북 풍기읍과 충북 대강면 사이에 있으며 높이 689m의 고개로 대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를 이곳에 두고 봄 가을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910년까지 경상도동북지방의 과거객, 선비, 관료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이었다.
  1999년5월에 2.5km의 터널을 뚫어 죽령의 옛길은 산행객 또는 가족단위의 산책코스로 되어있고,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답사와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잇다.
  단양쪽의 죽령휴계소 옛 고갯길에 들어서서 영주쪽으로 넘자면 풍기읍과 영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옛 고갯길이 시작된다.  죽령의 곳곳에 관련된 사건과 이야기들에는   1). 죽령주막의 약수.   →2)마의태자.  →3)왕건.  →4)안향.  →5)정몽주.  →6)정도전.  →7)금성대군.  →8)의병대장 유인석, 이강년 등이 있다.  
  또한 죽령에 얽혀 전해지는 특별한 이야기에는 <신라명신 죽지 탄생이야기>, <신종(상원사동종 국보36호)의 이변이야기>, <잔운대와 촉령대 이야기> 등 역사적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특별히 보아 둘 것은  명종 3∼4년(1548∼1549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 재임시 형인 충청감사 온계 이해(溫溪 李瀣 : 1496∼1550)와 죽령에서 만나고 헤어질 때 그 장소의 골짜기를 안영협(안影峽)이라 이르고, 동쪽은 잔운대(棧雲臺), 서쪽은 촉령대(矗領臺),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를 소혼교(消魂橋)라 하였다.  소혼교에서 형제가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이 영결(永訣)이 되어 버렸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서려있다.  시비 윗 부분에는 퇴계선생의 칠언율시 <촉령대>와 <소혼교> 두 수가 새겨있고, 아랫부분에는 퇴계선생의 죽령유적비문이 실려있다.   비(碑)는 풍기로부터 죽령을 넘어갈 때 희방사로 들어가는 길 검문소에서 약1㎞ 정도 올라가는 곳의 작은 다리 근처  길 우측에 있다.  

      안영협 냇가에서 나뉜 그림자,
      소혼교 다리에서 애끓이는데.
      평안히 넘으소서 험한 고갯길,
      명년 다시 오실 기약 지키옵소서
                                        (퇴계退溪).

      어느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술 끝나도 다릿가에 서성거리네.
      구름 산도 분명 내말 들었으려니,
      내년에 다시 오리 기다리게나
                                        (온계溫溪).

   죽지령(竹旨嶺)의 <모죽지랑가>시비(詩碑)
                                   낭도(郎徒) 득오(得烏)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 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모죽지랑가> 시비는 희방사 들머리 길섶 언 덕에 있다.
                    *죽지는 진덕여왕(眞德女王) 때의 재상 술종(宰相 述宗)의 아들이다.
                    *효소왕(孝昭王:재위 692∼702) 때의 낭도(郎徒)인 득오(得烏)가 8구체(八句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득오가 당전모량익선아간(幢典牟梁益宣阿干)에게 볼모로 붙잡혀가서 부산성(富山城)의 창(倉)지기로 고생할 때 화랑 죽지랑이 구해주었으므로 죽지를 사모하여 만가(挽歌)인《모죽지랑가》)를 후세에 남겼다(가사의 원문은《삼국유사(三國遺事) 권2<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竹旨郞條>≫)고 한다.  

  강동문인회 회원들 중 시간을 마련하여 죽령에 오르며 옛 고갯길을 답사할 때에 참고하였으면 하며 간단히 기술하였다.
일행은 귀경중 곤지암에서 석식을 끝으로 영주 선비의 고장 기행을 마감하였다.
문심시심(文心詩心)을 살찌우게 하는 화기애애한 멋진 문학기행이었다.  금번 문학기행을 위하여 빈틈없이 준비하여 주신 회장님 이하 임원진 및 사무국에 감사를 드린다.  



2007. 06. 17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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