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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함덕립과 임진왜란의 행주산성 / 함동진(詩와 글 2010.07.15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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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함동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5회 작성일 22-12-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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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함덕립과 임진왜란의 행주산성   / 함동진(詩와 글 2010.07.15 작성)

 

 *본문 맨아래의 [출처]를 클릭하시면 관련 사진과 함께 감상이 됩니다.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임진왜란 행주산성(幸州山城)  (2010년 7월15일 작성) 

                                    

 

             작지만 가파른 산 오르러면 숨이 헐덕 거리네

             구비치며 휘감은 저 한강물은 피빛이었으리

             벌떼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큰 무리의 왜놈들

             죽이고 죽여 버려도 또또 달려드는 끈질긴 원수

 

             구국일심에 처자 고향두고 달려와 싸운 의병들

             아낙들도 치마폭 돌나르다 얼마나 쓰러졌던고

             권율 장군휘하 관군들 용맹히 싸우고 싸웠으리

             그러나 의병들 승병들 아낙들 힘합쳐 승리였다네  

                                                                                             詩.글  -  함동진(2010.07.15)

 

행주산성(幸州山城 -사적 제56호 1963.1.21 지정)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의 덕양산(해발124.9m)에 소재하며

사적 제56호로 1963년1월21일 지정되었다. 

 면적 347,670㎡.로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룩한 곳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장군은

12월 수원근처(현재의 경부선 1호선전철역 세마역 근처)인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하였다.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 관군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들과 아낙네들의 피흘린 참전이 있기에

승전과 대첩은 더욱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에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및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병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벌떼같이 공격해왔다.

권율 장군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덕양산 정상에 있다.

1970년에는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두고 있다.

충장사는 덕양산 북향 기슭에 있다.

 

<필자의 희망사항>

국난 위기의 임진왜란 7년전쟁, 여기에서는 관군뿐만 아니라 의병 여성의병 기타 민간인들이

많이 전사, 순국희생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떨치는 장수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장졸들이 없다면

전쟁의 승리는 없을 것이다.

행주산성의 성역화는 임진왜란전투에 대하여 한국의  대표적 사적지로 조성한 곳이다.

현대판으로 비교한다면,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국립현충원에 비견되는 곳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고관 비천이 따로 없다.

행주산성의 사당은 오직 권율 장군만을 위한 사당이었다.

일반장병 의병 여성군들의 희생을 위령할 사당같은 것은 없었다.

정부나 지자체의 역사고증, 역사문화관리 등의 담당기관은 이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타지역의 옛 장군들의 사당이 있는 곳도 위와 같은 현상들이다.    


 

여성과 행주치마와 돌전투

 

행주산성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관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각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아냈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돌을 던지며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부녀자들의 호국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으니

이의 승리로 인하여 "행주치마(幸州山城 -사적 제56호 1963.1.21 지정)"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각궁>

우리나라 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물소뿔, 뽕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활로

탄력성이 매우 강한 것이다. 사정거리가 약 200보에 달했다.  

 

 

승군의 참전

 

승려의 신분으로 행주전투에 참전한 승군들이다.

승장 처영(僧將 處英)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

왜군들은 조총을 쏘아대며  성 역할을 하는 목책에 불을 질러 침탈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에  승장 처영이 승군을 독전하자 승군들은 육박전으로 용감히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의병대의 참전

 

의병들은 왜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관군을 지원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전투에서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을 따라 온  전라도 의병이 다수였다.

의병대는 관군에 비하여 훈련이 덜 되고 무장상태가 허술하였지만

 구국충정심은 끓어 올라 그 사기는 충천하였다.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왜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로 껐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왜적들을 치고 찍고 짓이겼다.


 

필자는 행주산성을 보수보완 공원화 조성할 때에 지방사학자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크게 나타내게 해줄 것을 문의하고

부탁하였으나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상 여자들과 의병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대첩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전황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직계 조상 중에는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투하다 전사한 분이 계신다.

바로 수정 함덕립(水亭 咸德立)이다.

그러나 행주산성 어디에도 단 한 줄의 의병장 수정 함덕립공에 대한 기록물이 없다.  



                                           수정 함덕립의 의병모군(義兵募軍)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1

1. 통문(通文)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도적놈들이 서울을 핍박하여 대가(大駕)가 외로운 성으로 옮겨가시고 적병이 포위를 하여

도로가 막히고, 호령이 통하지 아니하니 존하느냐 망하느냐의 기회가 순식간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오장이 타는 듯 합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니 무릇 혈기를 지니고 있는 자는

마땅히 몸을 잊고 국난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호남은 본시 충의의 고장으로서 전에도 의열(義烈)이 이미 드러났거든 하물며 이렇게 군부(君父)가

포위속에 계실때이겠습니까?
이제 통유(通諭)하시는 교서가 포위된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한 말씀으로 써 도내의

사민(士民)에게 바라시는 바가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읽고보니 실성통곡이 저절로 나와 죽지를 못하여 한입니다.
원컨대 모든 군자들은 각자 분발을 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糾合)하고

군량(軍糧)들을 도와주며 기일에 맞추어 의소(義所)로 모여 한마음으로 적을 섬멸할 것을 다짐합시다.
만약 망서리고 관망을 하거나 무관심한다면 이는 전일 충렬의 기풍이 땅에 쓸린 셈만 된 것이 아니라

 장차 윤기(倫紀)에도 죄를 얻어 고을이나 나라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마음을 합하고 힘을 뭉쳐 함께 나라의 일을 성사시켜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고함

호남절의용사각위(湖南節義勇士各位)의 좌하(座下)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通文

國運不幸奴賊逼京大駕移駐孤城賊兵合圍道路阻絶號令
국운불행노적핍경대가이주고성적병합위도로조절호령

不通存亡之機決於呼吸言念及此五內如焚主辱臣死古今
불통존망지기결어호흡언념급차오내여분주욕신사고금

通誼在有血氣者當忘身赴難而唯我湖南素稱忠義之邦曾
통의재유혈기자당망신부난이유아호남소칭충의지방증

在前世義烈已著況此君父在圍之日乎卽者通諭敎書自圍
재전세의열이저황차군부재위지일호즉자통유교서자위

中出來無非哀痛之語其責望於道內士민至深切矣讀來不
중출래무비애통지어기책망어도내사민지심절의독래불

各失聲痛哭求死而不得也惟願君子各自奮勵投메*而起糾
각실성통곡구사이부득야유원군자각자분려투메*이기규

合同志資助兵糧剋期齊會于義所期以一心殲敵如或遲回
합동지자조병량극기제회우의소기이일심섬적여혹지회

觀望越視察廢則非但前日忠烈之風掃地盡矣將得罪於倫
관망월시찰폐즉비단전일충열지풍소지진의장득죄어윤

紀不容鄕國毋淹(?)刻協心一力共濟國事千萬幸甚
기불용향국무엄(?)각협심일력공제국사천만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位 座下

*메:소매메
*(?):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대첩비각 안에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1.88m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선조 35년(1602)에 권율장군 막하에 있던 장수들이 권율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힌 것이다. 이 비문에는 행주대첩 전투과정을 상세히 새겨 넣고 있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수정공(水亭公)의 임진란(壬辰亂)을 당했을 때의 기록 -2

2. 거의문(擧義文 : 의병을 일으키는글)

위 글월로 거의를 고하는 바는 이제 왜적이 창궐하여 우리 강토를 유린하는 데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미 국토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 또 혈기가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울음으로 적을 죽일 생각만 하고 머리를 들고 곧바로 전진할 생각을 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 도내의 장사(將士)들이 갑옷 투구를 쓰고 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 사자(士子)가 된 사람들도

 마땅히 팔둑을 걷어부치고 눈물을 뿌리고 맹세를 하며 화살을 질머질 때입니다.
본래 우리 고을은 충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곳이니 어찌 적개심에 불타고 적을 둘러삼킬

마음을 가진자가 없겠습니까?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나서며 팔을 걷어 올리고 부르고 모여 비록 나무의 무기 대나무 깃대로 라도

모여들어서 왕의 군사가 되고 당나라 안지경(顔眞卿: 安祿山亂時의 義兵將) 같은 행차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분은 이 통문을 가지고 돌려 온 고을에 고하고

시각을 지체하지 말도록 해주시기 천만 바라나이다.

만력(萬歷:明 神宗 年號 선조25년) 20년 壬辰(1592년) 5월 일

호남절의설청 함수정(湖南節義設廳 咸水亭)

삼가 호남 절의소 용사 여러분의 좌하에 고합니다.



<原文>

水亭公當壬辰記

擧義文


右文爲擧義事今者倭賊猖獗躪蹂我疆場而한*禦無一人旣
우문위거의사금자왜적창궐린유아강장이한*어무일인기

食國土且有血氣則 安敢生哭殺之而不效載頭直前之策一
식국토차유혈기즉안감생곡살지이불효재두직전지책일

道將士관*甲胄以赴賊所則爲士子者亦當奮臂(?)제*誓面帶
도장사관*갑주이부적소즉위사자자역당분비(?)제*서면대

箭之日也顧我一州素稱忠義之鄕豈無懷敵愾之憤而欲胸
전지일야고아일주소칭충의지향개무회적개지분이욕흉

呑之者哉裂裳左袒一呼偕作雖木兵竿旗響集분*合爲王師
탄지자재열상좌단일호해작수목병간기향집분*합위왕사

顔行不其可乎伏願僉尊將此通文輪告一鄕毋滯時刻幸甚
안행불기가호복원첨존장차통문륜고일향무체시각행심 


萬歷二十年壬辰五月 日
湖南義設廳 咸水亭 謹告

湖南節義勇士各僉尊 座下

*한:호위할한
*관:꽬관
*(?):
*제:물제
*분:아우를분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수정 함덕립공 행장(水亭 咸德立公 行狀)
    공의 휘(諱)는 덕립(德立)이요, 자(字)는 사인(士仁)이요, 호(號)는 수정(水亭)이며 강능함씨(江陵咸氏)이다.

.................................
       강릉함씨는 라조(羅朝)로 부터 려조(麗朝)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동방(東方)에서

 바라볼 만한 부족이 되었다.    휘 승경(承慶)은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쳐 벼슬이 이름 미쳤고, 

그의 아들은 조선시대(我朝)에 와서 증직영상(贈職領相)이 된 이로 휘는 부림(傅霖)이요, 

호는 난계(蘭溪)로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워,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평공(定平公)으로 

만경두곡서원(萬頃杜谷書院)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정평공 때부터 이후로 동원(東原) 즉 강능(江陵)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림 아들의 휘는 우치(禹治)요, 호는 송담(松潭)으로 성종 임금때(成宗朝)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예조판서(禮曺判書)에 이르고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라 했다.
    우치의 아들은 휘는 영훈(永勳)이요,  호는 만포(晩圃)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판서(工曺判書)에 

올랐으니 곧 수정공의 5대조가 되신다.    
    수정공의 고조부위 휘는 이정(以正)이시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증조부의 휘는 록(錄)이시며, 형조참의(刑曺參議)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귀정(貴珽)이시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아버지 휘는 순진(順振)이시며 명천부사(明川府使)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鄭氏)로 참판 효항(參判孝恒)의 따님이시다. 
    공의 출생일은 1554년(嘉靖甲寅 明宗9年) 9월15일이다. 
    공의 본디 성품은 부모께 효성스러웁고 동기간에 우애했으며 아울러 그 자태와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양친을 정성을 다해 봉양하므로 향리(鄕里)의 이웃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인격의 도량과 재간이 우뚝 들려 보였고 품은 뜻을  이루려는 의기와 의지가 강했다.
    불설(不屑 : 우습게 여겨 뜻에두지 아니힘)하지 아니하여 사장(詞章 : 詩歌와 文章)을 공부하고 

궁마(弓馬)의 무예를 정밀하게 익혀 본바탕을 크게 이루었으며 경제에 대하여서도 깊이 알았다. 
    1576년(萬歷 丙子 선조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시초점에 벼슬하여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해미 신남도리(海美新南桃李)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강논한 사실이 가승과 

성조충훈(聖朝忠勳)에 사적(事蹟)이 실려있다.
    하루는 그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조 양경공(良敬公)이 보성군수를 지내면서 군민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이 지금도 그 말씀을 노래한지라, 마땅히 후손들이 살 곳이다 하였다.
    양경공의 휘는 유일(有一)이니 정평공(定平公)의 8대조가 되신다.
    드디어 수정공(水亭公)이 이곳을 헤아려 돌아보고 보성군 천봉산(天鳳山) 아래 죽천(竹川) 마을에 옮겨 사시니 

이곳은 죽천 박선생(竹川 朴光前先生. 別註<2>참조)이 사신 곳이며 우산 안선생(우산 안방준선생. 別註<1>참조)이 

자주 놀러 온 곳이다.
    겸하여 우물과 돌이 있어 좋은 곳이라 하여 공(公)이 시냇물 언덕 위에다 정자나무를 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한 곳이다.     그때 사람들은 주부정(主簿亭)이라 했고 후손들은 함정자(咸亭子)라 칭하고 있다.
    임진(壬辰 1592년) 난리에 公이 세상이 변해진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분개(憤慨)를 참지 못하고 

의병(義兵)을 이르켜 삼운장 오봉 김충강(三運將 鰲峰 金忠剛 :齊閔  別註<4>참조)公과 같이 

(호남의설청湖南義設廳에서) 꾀하니 여러 고을에서 무기와 식량을 가지고 옴으로 군사를 조직하여 

도원수 권公(都元帥 權慄)에게 급히 달려가 신발과 식량을 도와주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가 울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서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장차가 위태로우니 전장터에 나아가 그 훌륭한 동포들과 

생사(生死)를 같이 한다."고 말하며 분을 내어 적을 죽이고, 사로잡기를 많이 하니 

권공이(權慄장군) 말하기를 "함씨(咸氏) 군사는 정돈이 잘 되고, 무기를 정밀히 하여 

일대영걸(一代英傑)을 이루었다." 하였으며 그리고 군사를 맡아(이끌고) 자주 공을 세웠고, 

성(城)이 함락하던 날에 미치어서는 적의 총탄에 맞아 순절(殉節)하시니 모든 의병들이 같이 따라 순절하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1593년(癸巳 선조26년) 10월 16일이다. 
    그의 아들 복시(復矢)가 (시신을)모시고 돌아가서 보성 대곡면 빗말 고개 둔덕 깁좌(寶城 大谷面 碑末峴 甲坐原)에

 장사 지냈다.
    선조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갸륵한 전사소식을 듣고 명하여 선무원종훈록(宣武原從勳錄)에 기록케 하니 

사림(士林=儒림)들이 흠모하였고 아울러 보성읍지(寶城邑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에도 기록 되었다.
    수정공의 아내는 정숙부인(貞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참봉 이방(參奉以邦)의 따님으로 1555년

(乙卯 明宗10년)에 출생하여 1597년(丁酉 선조30년) 11월8일 별세하여 수정공의 묘와 함께 합장하였다.
    수정공의 아들 봉신(奉臣)으로 벼슬이 통정(通政)이요, 손자는 의방(義邦), 의용(義容), 의형(義亨), 

의운(義運)이며 증손, 현손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가지고 온 병수(炳壽)는 의형(義亨)의 6대 손이다.
    슬프다. 훼복제서(卉服제*서* : 오랑캐가 누더기를 걸치고 미친 개가 물어 뜯듯이)의 기세(氣勢)와 

 치장열진(치*張列陣 : 마치 솔개떼처럼 진을 쳐)하여 혼백도 능히 그 칼날을 접할 수 없는 판국에 

(수정 함덕립)과 모든 병사들은 냉철히 몸을 가다듬고 의의(意義)를 이르켜 분을 떨치며 몸을 돌아보지 않고 

도원수의 기회를 꾀하여 적의 형세를 꺾어 능히 배척하니 하늘이 순히 도와 모든 뜻을 모아주며 굶어 죽게

 아니하니  어찌 진실로 열장부(烈丈夫)가 아니랴.
    當時에 작은 공을 세운 이와 한가닥 절개를 지킨 신하도 다함께 제사 모심을 입었는데 홀로 公만 높은

 기상(기*常)의 명(銘)에 참여하여 오히려 포양(褒揚)의 은혜가 빠졌으니 이 어찌 사론(士論)의 재감(齎憾)과 

後孫의 원통이 맺힌 곳이 아니리오.    이제 병수(炳壽)가 수백리 빙정록 마을(氷程錄:氷月亭)까지 걸어 公의 

행실이 기록된 책을 가지고 와서 말도 변변치 못하는 사람(말주변 없는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제 

보책(譜冊)을 만들게 되니 우리 선조 절열(節烈)의 행장(行狀)이 좀먹고 낡아서 자취와 징신(徵信)의 

文이 있지는 못하나, 어찌 하나의 은혜스러운 말이라도 써두어 永久히 보존하지 아니하리요 하니 내가 

더불어 책을 반도 못읽고 검임(검*임*)을 알지 못하며 훌륭한 덕을 찬(撰)하니 병수(炳壽)의 請함을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하여 날마다 그치지 아니하고 거듭거듭 뜻을 부지런히 하여 보통말(쉬운말)로 

엮어 놓아 상덕논세(尙德論世)의 재택(財擇)을 기다린다.    
                                                      김   기  기술함 (金陵    金  기*   述)   

     *제: 미친개제 
     *서: 씹을서
     *치: 솔개치 
     *기: 용대기기
     *검: 탐할검
     *임: 요임 
     *기: 쉴기   

      *編者註 :  (1) 本 水亭公의 行狀은 1865년(乙丑 고종2년) 두곡서원 간(杜谷書院刊) 강능함씨세보

(江陵咸氏世譜)에 실려있는 수정공행장문을 원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이다.  原文이 들어있는 乙丑年刊 세보는 

수정공의 9세손인 죽포 함병후(竹圃 咸炳후)공이 앞장서서 험난한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8도의 방방곡곡 

함씨 족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입수하는 등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간행한 족보이다.  (竹圃의 行狀文을 참조 바람.) 
                 (2) 강능함씨 장산리파 세보-송암 함봉표 찬(江陵咸氏長山里派世譜-松庵咸鳳表 撰)은 원문이 한자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함동진(咸東振-송암 함봉표의 長孫)이 발굴하여 번역, 번역본을 책자로 편찬하고

 여기 인터넷에도 올림.)





충장사는 권율장군의 공덕과 얼을 기리기 위하여 세원진 사당이다. 원래는 행주나루터의 안마을에

<기공사(紀功祠)>라는 명칭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북괴의 6.25남침전쟁 중에 소실되었던 것인데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때에 <충장사(忠莊祠)>라고 개칭하여 덕양산 중턱에 새로 세운 것이다.

충장사 현판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다.

충장사 울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헌종11년(1845)에 세운 또다른 행주대첩비 1기가 세워져 있다.


 

행주산성 입구에 세원진  <해병대행주도강전첩비>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군사요충지이다. 우리국군 해병대는 북괴남침 6.26전쟁 때에 서울탈환작전시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며 승전한 곳이다.

 

덕양산 아래 행주대교 가까이에 <행주산성공원>이 있다. 여기에 몇기의 시비가 있는데 그 중 한 기는

생육신의 시를 새긴 시비이다. 이 한기의 비에 각면마다 각각의 시를 새겨넣은 시비이다.

생육신: 남효온(南孝溫),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섬담수(成담壽)


행주기씨는 필자의 여러 先代에걸처 양가가문이 교류하여 왔기에  <행주기씨유허비(幸州奇氏遺墟碑)>를 보고 

반가웠다.

 

 [(유허비)안내문]

행주는 기씨의 발상한 세거지이므로 기씨는 이곳 행주를 관향으로 삼아 왔었고  국가는 공훈이 많은

기씨를 부원군(府院君) 또는 군(君)으로 봉(封)할 때에는 반드시 幸州와 관련된 덕양(德陽) 행원(幸原) 등

   옛 지명을  많이  인용하였었다.

기씨는 여조양조(麗朝兩朝)에 많은 將相, 學者, 忠臣, 등을  배출하여  三韓甲族으로 성망(聲望)을

빛내었다. 이 유허비는 1966년 5월에 幸州奇氏 大宗中에서 건립히였다.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

 행주서원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승리로 이끈 명장인 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그의 호국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헌종(憲宗) 8년(1842)에 왕명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당시 왕은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에 행차할 때마다 임진왜란 때 공적이 높은 권율 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애석히 여기던

중 왕명을 내려 이 서원을 건립케 했다고 한다. 바로 앞의 한강을 바라보고 나 있는 솟을대문채를 들어서면 장대석(長臺石)의

 이벌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반의 규모를 가진 강당이 마당에 면하여 있다. 강당의 정면 5칸 중 좌우 양끝의 1칸은

전퇴(前退)를 둔 온돌방으로 꾸몄으며 중앙의 3칸은 우물마루로 꾸며진 전형적인 강당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 강당 뒤쪽에는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사당인 기공사(紀功祠)가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건물은 없고 장대석과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특히, 이 건물터는 장대석을 정교하게 3단으로 다듬어 올려 기단을 조성하고, 기둥을 받치는 초석

또한 잘 가공된 상태여서 당시에 상당히 공을 들여 지은 중요한 건물임을 추정케 한다. 현존하는 유구(遺構)를 중심으로 보아

 사당은 맞배지붕에 측면벽은 방화벽을 구성하고 용지판을 덧대어 놓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서원의 현판은, 조선의

 철종(哲宗)·고종 연간(高宗年間)의 무신으로 고종 19년(1882)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을 체결하기도 하였으며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신헌(申櫶)이 썼다. 경내에 있었던 행주대첩비는 헌종 11년에 세운 것으로, 1970년에 행주산성 내에

 새로 지은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옆으로 옮겨 놓았다.(문화재자료 제71호(경기)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  

 

대첩문은 개선문이나 비등하다고 본다.  승전의 표상으로 보여주는 개선문에 사진과 같이

상업적 광고와 같은 프랑카드와 안내판을 덕지덕지 걸고 붙여놓았을까?

혹 외국인들이 이런 광경을 사진에 담아갈까 걱정된다.

대첩문의 몰골이 얼굴에 반창고를 붙여 놓듯 보기에 미관적이 못된다.

주위에 담벽과 나무들이 있어 대첩문을 피아여 붙일 곳도 있는데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여러 곳에 답사를 다니다 보면 다른 곳에서도 출입구나 중요한 시설물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장면들을 피하다 보면 놓지는 장면들이 있게 된다.

*********************************************************

 

 

수정 함덕립공의 시(水亭 咸德立公 詩) 몇 首

(水亭1) 죽천초당(竹川草堂)에 앉아서

하늘은 넓어 청명하고 땅은 궁벽치 않고
동남으로 트인 들녘 넓직하게 흐른듯
마음엔 달이 있어 물결속에 담담하고
신세는 고개 위의 구름과 함께 뜬다
사람 따라 지팡이는 방초를 찾고
세상 잊은 신선되어 낚싯배에 기대있다
말년에 큰 복을 많이 얻었으니
태평속에 늙어간 몸 흥치가 높다

<原文>

(水亭1)
坐竹川草堂

天浩淸明地不幽 천호청명지불유
東南大野闊如流 동남대야활여류
心期有月波中淡 심기유월파중담
身勢與雲嶺上浮 신세여운령상부
隨人杖屢尋芳草 수인장루심방초
忘世仙緣倚釣舟 망세선연의조주
暮年所獲多胡福 모년소획다호복
老此升平興亦豪 노차승평흥역호
----------------------

 

(水亭2) 우(又) 우산 안선생(牛山安先生) 시를 차운하다

부귀를 멀리하고 이 마을에 숨었으니
연하(烟霞) 깊은 곳에 하나의 신선집
다정한 밝은 달은 손님인양 찾아오고
모습 뽐낸 푸른 산, 들 기둥처럼 서있다
저자 피해 숨은 몸 암혈(岩穴)이 깊고
갓끈 씻은 흥취에 시냇소리 맑아라
공명(공명)이 노는 흥만 못한 것이니
성세(聖世)에 노는 것도 영광이로다

<原文>
(水亭2) 又 次牛山安先生韻

謝絶朱門隱此洞 사절주문은차동
烟霞深處一仙庄 연하심처일선장
多情明月來如客 다정명월래여객
呈彩靑山立似楹 정채청산립사영
避市幽종*岩穴邃 피시유종*암혈수
濯纓眞趣澗聲淸 탁영진취간성청
功名不及逍筵興 공명불급소연흥
聖世優遊是亦榮 성세우유시역영

*종: 자취종(뜻이 같은 글자 종踪: 자취종)
-----------------------

 

(水亭3) 죽천박선생 광전(竹川朴先生光前)의 시를 차운(次韻)하다(1)

(1)
산 이름 빌려서 한 정자 지었는데
차군(此君:竹)의 외로운 절개 사시로 푸르도다
서리 눈 속에 초연하여 선세의 묘소를 우러러 보고
사머하는 마음으로 서서 다시금 뜰을 쓴다
바람이 드는 곳에 거문고 소리를 듣고
달이 비쳐올 때에 성경(聖經)을 대한다
기수(淇水) 가에 옥과 같은 모습 쪼으고 갈았으니
모두가 취한 천지에 그대 홀로 깨었도다

<原文>
(水亭3) 次 竹川朴先生 光前韻

(1)
剩借峰名構一亭 잉차봉명구일정
此君高節四時靑 차군고절사시청
超然霜雪先瞻墓 초연상설선첨묘
立以羹牆又掃庭 립이갱장우소정
因風入處聽琴韻 인풍입처청금운
有月來時對聖經 유월래시대성경
淇濱如玉工迫琢 기빈여옥공박탁
衆醉乾坤子獨醒 중취건곤자독성
------------------------

(水亭10) 서과 (西瓜)

나의 외로움 알고 누가 이를 보냈는고?
수박 한개에도 감사한 마음 안다
팔고 가는 사람은 노장(老將)인가 생각 되는데
길게 뻗은 외 넌출 주시(周詩)에도 들어있다
쪼개면 서릿발에 더위가 식혀지고
먹으면 꿀 맛이 창자를 채우누나
선물을 할려고 집집마다 사가니
당중늬 어버이가 좋아하여 눈섭이 펴진다.

<原文>
(水亭10) 西瓜

念我孤居進此誰 념아고거진차수
西瓜一介感回心 서과일개감회심
賣去行人思老將 매거행인사노장
綿綿其질*入周詩 면면기질*입주시
剖得霜光除暑可 부득상광제서가
食當蜜味飽脹宜 식당밀미포창의
因爲膳物家家買 인위선물가가매
竝賀中堂喜展眉 병하중당희전미

*질:자질구레한오이질(瓜+失)
-------------------

 

(水亭15) 오봉 김충강공(鰲峰金忠剛公)을 모시고 짓다 


춘풍에 눈 속 매화꽃을 보내고 나니
천기(天機) 따라 도는 일월 석학(碩學)이 오도다
삼경(三逕)이 묵어가니 진세(塵世)의 더러움 씻고
제현(諸賢)들 자리에 드니 온 땅에 열렸다
고기가 밥상에 못올라 저자(시장)가 멀다 핑계를 하고
술을 사야 할 일이지만 집에서 빚은 술을 낸다
기다린 마부 리구곡(離駒曲:離別曲)을 부르고 난 뒤에
은근한 뜻 오히려 남아 다시 잔을 올린다.

<原文>
(水亭15) 侍鰲峰金忠剛公作

已送春風雪裡梅 이송춘풍설리매
天氣日月學俊來 천기일월학준래
三逕就荒塵陋掃 삼경취황진누소
諸賢入座滿堂開 제현입좌만당개
魚不登餐稱市遠 어불등찬칭시원
情當沽酒釀家배* 정당고주양가배*
候夫唱罷離駒曲 후부창파이구곡
慇意猶餘更進盃 은의유여갱진배

*배:술괴일배

-----------------------

* 水亭 咸德立(명종9년 1554.9.15-선조26년1593.10.16) : 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주부 벼슬에 올랐으나 곧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던 중 임진년(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절의소를 설청하고 의병들을 모아 행주전투 권율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전투하던 중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선무종훈록>에 오르고 <보성읍지>와 <호남절의록>에도 사실이 올려져 있다.
* 本 詩는 수정공의 13世孫이 되는 詩人 함동진이 발굴하여 발표, 松庵 咸鳳表의 홈에 올렸던 것으로 여기에 몇 首

올려 놓는다.
* 本 詩는 松庵 咸鳳表(함동진 시인의 조부)께서 한자어로 집필한 송암의 가승보에 의함 .

-----------------------------

 

함동진

http://hamdongjin.kll.co.kr/ 

http://cafe.daum.net/hamdj 

 

[출처] (일기) 수정 함덕립과 임진왜란의 행주산성 (2010.07.15) / 함동진 |

​                                          [출처]를 클릭하시면 관련 사진과 함께 감상이 됩니다. 

                                                                                 ​작성자 깊은산골 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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