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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말하다(29회)ㅡㅡㅡ기행수필(속리산 법주사)~~제 1부~~(제1부부터 읽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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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1,998회 작성일 15-07-31 13:19

본문

전설과 사연도 많은

속리산 법주사

                          계영    이상근

 몇 해 전부터 취미삼아 수집한 난이 제법 늘어났습니다. 안목이 없어 소위 명품 난은 소장하지 못했으나 촉수가 늘어날 때마다 새로운 생명의 신비함이 매일같이 눈을 멈추게 하지요. 나는 그래서 난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꽃대가 며칠간 시름하다 만개를 하면 그 맑은 향은 사람을 취하게 하더군요. 천향(天香)이지요.

오늘은 내륙지방인 속리산으로 난 채집에 나섰습니다. 마티재는 지금도 넘기 힘든 고개입니다. 10여 년 되어가는 내 고물 승용차가 안쓰럽더군요. 굽이굽이 돌때마다 힘들어 합니다. 그래도 처음 이 고개를 넘을 때 보다는 많이 좋아졌지요.

이 고개를 처음 넘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미술 전시회 준비 차 해인사에서 일주일 합숙훈련을 끝내고 법주사로 이동할 때였습니다. 당시에도 흔치않은 대형 관광버스였으나 이 비포장 고개를 쉬어가며 넘었지요. 세조 대왕을 태운 마차가 고개를 오르지 못하자 길 위에 멍석을 깔고 임금이 친히 걸어서 넘었다는 마티재입니다.

마티재 정상에 올라 조금만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옵니다. 내속리면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차를 세웠습니다. 무려 35년여 만에 이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법주사가 눈에 아른거려서이지요. 난을 채집할 것인가 법주사로 갈 것인가 한동안 망설인 끝에 난 채집을 포기했습니다.

법주사로 가는 길옆에 우아하고 품위 있는 노송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이젠 늙어서 힘에 겨운가봅니다. 버팀목들에 지탱하고 서있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더군요.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하여 이곳을 지날 때였습니다. 길목에는 가지가 낮게 드리워진 소나무가 보였습니다. 이를 발견한 세조가 ()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지 않겠는가.” 라고 걱정했지요. 이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늘어져있던 큰 소나무 가지가 갑자기 버쩍 올라가 길을 내었다는 것이지요. 힘 안들이고 연이 통과하자 신통하게 여긴 세조가 벼슬을 내렸다는 전설입니다. 이 소나무가 바로 수령 700년의 정이품송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속리산은 유난히도 세조와 연관된 야사가 많더군요. 법주사를 가기 전에 세조와의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명산 속리산이 품은 많은 사연은 결국 법주사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지요. 세조가 법주사를 즐겨 찾은 것은 자신과의 깊은 인연이 있었음이며 법주사가 그만큼 법력이 뛰어난 대가람이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황보인과 김종서를 비롯한 세종의 고명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이르는 말이지요. 수양대군이 가장 두려워 한 인물은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였습니다. 함길도를 휩쓸며 육진을 개척한 영웅으로 만주지역에서는 호랑이로 통하는 김종서였으나 일개 무사의 철퇴 한 방에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이때 김종서와 함께 죽은 장남 김승규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합니다. 김승규의 부인은 유모를 시켜 아들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 대를 잇게 하라 부탁하였지요. 이에 유모는 아이를 데리고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왔습니다.

수양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수양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목격한 큰딸이 간하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미 권력의 맛에 녹아든 수양의 안중엔 딸은 보이지 않았지요. 수양의 부인(훗날 정희왕후)은 어린 딸의 신상이 온전하지 못할 것을 눈치 챘습니다. 유모를 시켜 은밀히 딸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유모 또한 소녀를 데리고 숨어 살 곳을 찾아 내려오다 다다른 곳이 속리산 자락의 산골이었지요.

작은 계곡 옆에 중년의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 외딴 움막집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보니 딱히 갈 곳이 없어 보이는 모녀에게 같이 살 것을 권했더니 모녀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서로가 숨겨야 할 사연을 간직한 두 가족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과거나 사연을 묻지 않았지요. 장성한 두 남녀는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요. 두 어머니는 서둘러 혼인을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속리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복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당시의 고승이며 대학자인 신미대사가 주석하고 있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신미대사였지요. 대사는 특히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에 능통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글의 기본 28자의 틀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숨은 공신입니다. 대사를 만날 겸, 몸에 솟은 부스럼을 치료할 겸 세조가 친히 속리산으로 행차를 한 것입니다.

마티재 아래 저수지 옆에 오백여 명의 수행원과 임금이 거처할 임시 행궁을 정하고 세조가 복천암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이품 소나무의 전설이 생긴 그 때의 행차였지요. 길목 좌우에 엎드려 있는 백성들 무리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행색이 허름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귀품 나는 자태가 천민 같지 않아 보인 것입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눈에 익은 얼굴처럼 느껴진 것이지요. 길을 멈추고 소년을 가까이 오게 하여 집안 내력을 물어 보았으나 소년은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답니다. 신하를 시켜 소년의 부모를 만나 행궁으로 데려오라 해서 알아보니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낳은 외손자였습니다. 출가 전에는 종친으로 알려진 신미대사였습니다. 법력으로 세조를 끌어들여 혈육을 만나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에 딸은 의숙공주 한 사람인 것으로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의숙공주는 일찍이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왕이 되기 전의 일이었으니 딸 하나는 잃은 것으로 치부했을 지도 모릅니다. 명분을 중시하는 세조였으니까요. 역적으로 몰아 참살한 김종서의 손자와 자신의 딸이 인연이 되었으니 호적에서 삭제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다만 정희왕후를 통해 음으로 도우며 음지에서 살도록 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이 내용은 1873년 서유영의 설화집 [금계필담]에 유사하게 언급되지만 실제 속리산에 거처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되었더군요.

이와 같이 아기자기한 전설과 사연을 간직한 속리산입니다. 조선8경 중 한 곳이라 할 만큼 빼어난 명승지이지요. 천왕봉을 주봉으로 하여 문장대, 비로봉 등의 9봉으로 이루어져 일명 구봉산으로도 불립니다. 법주사는 그 웅장한 속리산의 품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리 숲을 지나 일주문 앞에 서면 [호서제일가람]이라 쓰여 있는 현판이 보입니다. 이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속세를 떠나 해탈의 세계에 들어섭니다. 세간과 출세간, 일주문은 그 경계의 역할도 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속리산(俗籬山)이라 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덕여왕 때 고승 진표율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마침 농사철이어서 들에는 많은 농부들이 논과 밭에서 갈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밭갈이 하거나 꼴을 뜯던 많은 소들이 대사를 보자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놀란 것은 농부들이었지요. “짐승들도 부처님의 자비를 입어 숭배하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외면할 수야 없지 않은가.”며 진표대사를 따라 백성들이 입산수도 하였다 하더군요. 즉 속세를 떠났다 하는데서 속리(俗籬)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 그럴 듯합니다.

법주사는 백제유민의 지도자였던 진표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 영심이 절을 세워 길상사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가 개창한 팔공산 동화사나 율사가 직접 개창한 모악산 금산사 등은 진표율사와 법상종의 법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법주사는 법상종의 중심사찰이지요.

법주사는 창건 당시부터 크고 작은 암자를 거느린 대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기호지방 승병들의 본거지가 되어 왜군과의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들이 전소해 버렸다는군요. 전란 후에 개, 증축한 현재의 건물만으로도 웅장한 대가람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개산당시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이 청동미륵대불입니다. 역사는 짧으나 이미 법주사의 명물로 자리 잡은 세계최대의 불상이지요. 2002년인 작년에 이 거대한 불상 몸체에 순금을 입히는 대 불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온통 황금빛으로 아롱진 아름다운 자태는 가히 장관입니다. 어느 한 곳 붙인 흔적이나 흠집하나 보이지 않는군요. 용화전 위 연꽃무늬 입대부터 광배에 이르기까지 그 육중한 불신의 위엄은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황홀한 금빛은 불상의 자비로움과 어우러져 더욱 우러러 보이더군요.

원래 미륵대불은 일제 때부터 조성 불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콘크리트에 대한 환상이 한창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전쟁과 정정불안으로 지연되던 불사는 정부의 특별한 주선으로 늦게나마 완성이 되었지요. 그 때 조성된 불상이 동양최대의 미륵대불입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와서 본 것이 바로 콘크리트대불이었습니다. 지금의 청동불은 광배를 하고 있지만 당시의 미륵불은 머리에 사각의 보관을 쓰고 있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콘크리트가 부식이 되고 이끼가 앉는 등 문제가 되자 청동으로 다시 조성하여 세우게 된 것이 지금의 청동미륵대불입니다.

청동미륵대불에 관해서는 작년에 언론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황금색의 청동대불을 보는 순간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황금색 청동대불 위에 시커멓게 부식된 콘크리트대불이 자꾸 겹쳐져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청동미륵대불을 완성하고 점안식과 회향 식을 올리던 날이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명하던 하늘에 마른 무지개가 3개나 뜨고 상서로운 빛이 불상을 한동안 비추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관광객을 안내하는 스님도 직접 보았다고 자랑하더군요.

법주사에는 원래 대웅전보다 더 큰 용화보전이 있었습니다. 팔상전보다도 법주사의 대표적 건물로 높이가 약 5m 정도의 장엄한 청동장육상을 모신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불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장륙상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헐었다고 전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이에 사찰 측에서는 청동대불을 조성하면서 불상 기단 부를 높은 원형구조로 만들어 내부를 용화전으로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팔상전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소된 것을 선조 때에 시작하여 인조 때에 완공한 목탑이지요. 시작 할 당시에는 임란 시 승병장이었던 사명대사가 적극적으로 주관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완공을 본 것은 고승 벽암선사였습니다.

팔상전은 현재 국내유일의 목탑입니다. 목탑이냐 전각이냐 하는 논란이 있으나 일부의 주장처럼 금산사 미륵전과 더불어 탑이라기보다 전각에 가깝습니다.

팔상전은 내부의 벽면 4개를 이용해 면마다 팔상도를 2폭씩 나누어 걸어 놓았습니다. 석가여래의 일생 중에 전환점이 되는 내용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들이지요. 각 면마다 설치한 불단에는 불상과 오백 나한을 조성해 오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돋보입니다. 입구에서부터 내부를 한 바퀴 돌아야만 팔 상도를 차례로 볼 수 있도록 배치해 마치 전시장에 온 기분입니다. 부처가 열반하는 듯 누워있는 열반상이 눈길을 끌더군요. 이렇듯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를 전각 안에 모셨기에 이 목탑이 팔상전이라는 이름으로 유래된 것은 아닐까요.

팔상전의 안팎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층마다 구조와 수법이 왠지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스님에게 어색해 보이지 않느냐고 슬쩍 물었지요. 옆에 있는 관광객들도 그런 것 같다고 거들자 안내스님이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무려 20여 년에 걸쳐 중건공사를 했으니 그럴 만 하다고 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도편수마다 다른 솜씨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탓이 아니겠느냐는 스님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외침을 많이 당한 민족이지요. 목조건물이나 목탑 등은 수없이 많은 수난을 겪은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특히 몽고의 난과 임진왜란은 전국의 문화재를 전소시켰으며 최근의 6,25전쟁 또한 그랬습니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쌍봉사 3층 목탑을 비롯한 많은 국보급 목탑들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지요. 이제 팔상전은 국내 유일의 목탑이 되었습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전국의 사찰 여행을 자주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불교 그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불교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입니다.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우리 민족은 불교와 함께 살아왔지요. 그 역사와 생활 속에 묵호자가 있었고 의상과 자장율사, 원효와 원광이 있어 나라의 문화와 호국정신을 기려왔습니다. 그래서 해인사 등 3대 종찰과 수많은 사찰문화를 이룩한 것이지요. 고려조에서도 의천과 지눌 그리고 나옹선사 같은 대덕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재인 팔만대장경과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찬란한 재산을 남긴 것입니다. 특히 조선에서는 불교가 유난히 탄압을 받은 시대였습니다. 돌아보세요. 임진란 중 승병의 활약이 조선의 운명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이순신과 권율, 김시민의 승리를 제하고 관군의 승리는 역사에서 찾기가 힘듭니다. 승병과 의병이 없었다면 임진란은 패전의 역사가 되었을 이상한 전쟁이었지요. 그 승병의 중심에는 서산과 사명당, 그리고 영규와 처영대사 같은 스승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전란에도 호국종교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고승대덕들입니다. 또한 화염에 문화재가 사라지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게 한 이들이 스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라의 안위는 물론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 찬란한 역사와 문화재를 어찌 우리가 소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불교에 감사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절에 가면 나는 천주교 신자임에도 감히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 불교문화를 지켜준 스승들께 감사의 경배를 올리는 것이지요 추천1

댓글목록

淸草배창호님의 댓글

profile_image 淸草배창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 이토록 불교 사상과 우리네 호국 불교를 소상히 저술하시는
해박한 학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2부가 궁굼하여..

단혜 김강좌님의 댓글

profile_image 단혜 김강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불자인데도
이렇게 세세하게 모릅니다..
계영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부끄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덕분에 많은배움합니다..
2부에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합장 올립니다_()_

몽진2님의 댓글

profile_image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부끄럽습니다.
단혜님은 항상 고운마음으로
격려해 주셔서 용기가 납니다.
더욱 좋은글 쓰도록 노력할께요.

石木님의 댓글

profile_image 石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법주사에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30년쯤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다가 정2품 소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던 생각이 납니다.
노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굴러다니는 가을이었지요.
사찰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참 많이 조사하여 정리해 주셨네요.

몽진2님의 댓글

profile_image 몽진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석목선생님
감사합니다.
가을 단풍으로 물든 속리산은 더욱
절경이지요.
아홉봉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구봉산이라고도 하는 속리산은 중부
지방 최고의 명산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또 한번 가고싶은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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